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1화 (11/130)

# 11

“……그렇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어조는 침착했으나, 말의 끄트머리에는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노기가 옅게 서려있었다.

콰드득!

커다란 소리가 났다. 라한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나무테이블의 모서리가 부스러지면서, 목조조각이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잘게 조각난 나무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스엘은 깜짝 놀라 라한을 쳐다보았다. 나무테이블을 부순 장본인인 라한도 아, 하고 외마디를 뱉었다.

“테이블이 낡아서 쉽게 부서진 모양이군요.”

세레스가 들었더라면 열이 뻗쳤을 이야기였다. 그가 화방에 놓은 가구들은 모두 견고하기론 으뜸인 라킨나무 원목으로 특수 제작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엘은 그 사실을 몰랐다.

“괜찮으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스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테이블이 저렇게 부서질 정도면 분명 손에 생채기가 나거나 멍이 들 텐데…….

이스엘의 눈동자에 염려하는 기색이 비치자, 라한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괜찮…….”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전쟁터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은 그의 손은 살짝 쓸려 붉어졌을 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라한은 멀쩡하기 짝이 없는 제 손과 이스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윽고 말을 정정했다.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먹을 느릿하게 쥐었다가 폈다. 손 근육을 다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스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손 이리 줘보세요.”

그녀의 두 손이 그의 손을 감쌌다. 그녀는 엄지에 살짝 힘을 주고 단단한 손아귀를 살살 문질렀다.

근육이 놀랐을 때는 이렇게 천천히 주물러주는 것이 좋았다.

오라버니가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가 손 근육을 다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오라버니에게 간혹 부탁받은 덕에, 라한의 손을 부드럽게 누르는 이스엘의 손길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이스엘과 달리, 라한은 돌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이스엘의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바닥을 살살 풀어준 이스엘이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살짝 확장된 라한의 동공이 이스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이스엘은 황급히 손을 떨어트리며 의자의 등받이까지 몸을 물렸다.

무심코 오라버니에게 하듯이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피가 막혀 있다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에 닿았던 부분에 전류가 저릿 흘렀다.

“죄, 죄송해요.”

이스엘의 사과하자, 눈을 깜박이던 라한은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스엘은 양손을 맞잡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매만졌다.

라한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개인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원치 않는 결혼인 겁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잊고 있었던 묵직한 것이 다시금 존재감을 뽐내며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스엘은 서서히 눈을 내리깔았다. 화끈거렸던 양쪽 뺨이 순식간에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작은 입술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조각을 계속 하고 싶어요.”

“…….”

“결혼을 하게 되면, 못 할 것 같아서…….”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라한의 시선이 짙게 잠긴 이스엘의 눈으로 향했다.

한참 말을 잊지 못하고 있던 이스엘은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이기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요.”

이스엘의 목소리 끝이 가냘프게 떨렸다. 둘 사이를 무거운 침묵이 가득 채웠다.

“이스엘.”

이스엘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네……?”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멍하니 라한을 쳐다보던 이스엘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하였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옅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울렁거리던 뱃속이 한결 진정된 기분이었다.

라한은 한참 동안 말없이 이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세레스는 멀리 가지도 못하고, 화방 앞의 거리를 뱅뱅 돌았다. 물론 라한을 향해 입에 담기 힘든 저주들과 욕을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입도 다리도 아파져서, 그는 결국 화방 근처에 있는 화단 울타리에 주저앉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세레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거리를 배회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세레스는 얼굴을 푹 수그렸다.

내가 가문에서 뛰쳐나온 것만 아니었어도! 저 악덕 건물주 새끼!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타리아 후작가문에서 나왔기에 그는 지금 자유롭게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돈, 권력과 맞바꾼 이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대체 무슨 일이지?”

침착하게 앉아서 머리를 굴리다 보니 점점 의문이 커져만 갔다.

라한은 예전부터 타인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놈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귀찮게 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차 없이 제 손으로 치워버리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세레스는 라한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무려 10년 전, 제국아카데미 입학식 날이었다.

깨끗한 흰 피부에 단정한 검은 머리. 잘 정돈된 앞머리 아래, 그때는 금색이 아닌 주홍빛의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에도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적어도 인격파탄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격이 더럽진 않았다.

라한의 인상이 사나워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2년이 지났을 때쯤이었다.

그때 라한은 틈만 났다 하면 기숙사에서 탈출해 바깥을 쏘다니곤 했었다. 마치 뭔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저 사람 같지 않은 놈한테도 뭔가 소중한 게 있나 보다 했었는데…….

세레스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잠시만, 뭐 때문이었더라? 분명히 여름 방학이 지난 후에…….

기억을 더듬어가던 세레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

머릿속에는 ‘설마, 아니야, 설마?’라는 단어들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고 화방 쪽을 노려보았다.

***

이스엘은 창밖의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말했다. 곧 해가 질 것 같았다.

“저,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늦었으니,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아직…….”

이스엘의 말에 라한이 싱긋 웃더니 물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이스엘이 영문도 모르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라한은 화방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레스가 다급하게 화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승님.”

“이스엘!”

“일은 다 잘 해결하셨어요?”

“어? 아니 그게…….”

세레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스엘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세레스를 뒤따라 들어온 라한이 그를 대신해서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마침 볼 일이 끝난 것 같더군요.”

뻔뻔한 말투에 세레스가 라한을 홱 돌아보았다.

사실은 볼 일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한 채 화방 밖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던 저를 부른 것이면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라한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세레스가 눈을 찌푸리려는 찰나, 이스엘이 말했다.

“스승님. 그리고 테이블은 다른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뭐?”

이스엘의 말에 세레스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전에 거금을 들여서 놔둔 라킨나무 테이블의 모서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있었다. 그는 입을 벌리며 기함했다.

“이게 대체…….”

“오래된 것이라 그런지, 손으로 건들기만 했을 뿐인데 부서졌어요.”

이스엘은 스승님도 다치실까 봐 겁이 난다며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실상을 알고 있는 세레스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맨손으로 라킨나무를 부술 수 있는 괴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라한 엘 카녹스……!

세레스가 라한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라한은 그 눈빛을 모른 척했다.

이스엘은 후드를 쓰고 나갈 채비를 했다. 라한과 이스엘을 번갈아 쳐다보던 세레스가 황급히 이스엘을 붙잡았다.

“이스엘, 나한테 할 말이 있었던 거 아냐?”

세레스의 물음에 이스엘은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그녀는 잠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바구니를 응시했다. 그녀의 연녹색 눈이 잘게 흔들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가 닫던 그녀가 말을 뱉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스승님.”

“……으응. 그래.”

세레스는 황망히 화방을 빠져나가는 라한과 이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겠지?

***

약간 차게 식은 바람이 후드 사이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어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를 응시했다.

이스엘이 작기도 했지만, 라한이 워낙 장신이라 한참 턱을 올려야 했다.

이상한 남자였다.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고, 낯설지 않은 사람.

옛날의 그 사건 이후 이스엘은 낯선 남자의 손길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살짝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듯 놀라고, 머릿속이 캄캄하게 물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이상하게 그의 앞에 있으면 이때까지 타인에게 세워왔던 단단한 벽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스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날이 선 콧대와 약간 얇은 입술을 타고 이어지는 턱선이 깔끔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앞을 응시하던 라한이 고개를 틀었다.

석양 빛 때문에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금색의 눈동자가 이스엘을 가득 담았다.

이스엘은 눈을 크게 떴다. 아……?

기억 속 깊숙한 곳, 먼지가 잔뜩 쌓인 곳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이스엘?”

왜 그러냐는 듯 불러오는 라한의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가슴 속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했다.

그들은 어느새 마차들이 오고가는 큰길가에 도달해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줄지어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스엘은 라한에게 자신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리 말하기도 전에, 그들을 향해 마차 한 대가 접근해 왔다. 검은 말 두 마리가 이끄는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분명 귀족들이 타고 다닐 법한 크기였으나, 마차의 측면에는 아무 문장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앞까지 당도한 마차에서 깔끔한 옷차림의 마부가 내리더니, 라한과 이스엘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부가 마차 문을 열자, 라한은 이스엘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군요.”

이스엘은 그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라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이스엘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온 마차에, 귀족가문의 시종처럼 차려입은 마부까지. 이스엘은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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