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스엘을 불렀다.
세레스는 눈을 치켜뜨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라한이 이스엘의 이름을 알고 있지?
“어……. 안녕하세요.”
놀라서 잠시 라한을 쳐다보던 이스엘이 인사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세레스는 더욱 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이스엘과 라한을 번갈아 쳐다보며 경악을 삼켰다.
둘이 아는 사이란 말이야?
“우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그렇게 말하는 라한의 얼굴이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는 마치 이곳에 이스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들어온 것 같았다.
세레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스엘은 원래 달에 한 번씩 화방을 들렀다. 이스엘이 화방에 들렀다 간 것은 겨우 며칠 전이었다.
화방 주인인 세레스도 이스엘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지금 라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며칠 내내 화방 앞에서 죽치고 있었던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라한이 철저하게 계획한 그림이 분명했다. 라한의 곁에서 누구보다 그를 오래 지켜봐온 친우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세레스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유였다.
이렇게 일을 꾸밀 정도로 이스엘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단 말인가?
“너……. 여긴 왜 온 거야?”
세레스가 라한에게 건네는 말에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스승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
“아……. 그게.”
세레스는 눈을 살짝 굴렸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한이 먼저 나서서 이스엘에게 말했다.
“친구입니다.”
세레스는 그 말에 그만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라한과는 10년째 알고 지낸 사이긴 했지만, 그의 입으로 둘의 관계를 친구라는 부드러운 단어로 칭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스엘을 바라보는 라한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것을 한입에 삼킨 사람처럼 한없이 풀어져 있었다.
충격에 빠진 세레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아니, ‘그렇구나’가 아니거든? 세레스는 설명 좀 해보라는 표정으로 라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 시선을 말끔히 무시하곤 이스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스엘.”
“네?”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 담뿍 담긴 다정한 목소리에 세레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광경이었다.
라한 엘 카녹스가 걱정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 생물체던가, 저 인간이?
세레스는 이게 꿈인가 조심스럽게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싶어졌다.
꿈이라면 꽤 심한 악몽인 것 같기도 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이스엘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을 다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뿐한 손짓이었다.
“혹시 세레스가 심한 말을 하던가요?”
그와 동시에 다정한 말투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시선이 세레스를 향해 쏘아졌다.
세레스는 흠칫 몸을 굳혔다. 껍데기만 같고 영혼이 바뀐 건가 했는데, 저 성깔 더러운 눈빛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스엘의 시선이 돌아오기 직전에 얼굴을 부드럽게 바꾸는 라한의 모습이었다.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는 게 연극 무대에 세워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라한과 세레스의 눈빛 공방을 한 끗 차로 놓친 이스엘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답했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에 난처한 빛이 들어찼다.
“아, 아니에요! 스승님이 그런 게 아니라…….”
이스엘은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한은 이스엘을 화방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이스엘은 얼떨결에 푹신한 방석이 깔린 나무의자에 앉게 되었다. 이스엘이 편히 앉았는지 확인한 라한이 고개를 돌려 세레스를 불렀다.
“세레스?”
“어, 어?”
아직도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던 세레스는 말을 더듬거렸다.
라한은 바보 같은 얼굴로 대답하는 세레스를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이스엘에게 차 한 잔 내줄 수 있을까?”
“……!”
세레스는 라한의 부드러운 어조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저 새끼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다가, 얼떨결에 선반들이 있는 작업장 안쪽으로 향했다. 일단은 차를 끓이고 나서 라한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이스엘이 걱정되기는 세레스도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예전부터 집안에 일이 좀 많은 것 같긴 했는데…….
이스엘은 세레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세레스에게 귀족혐오증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딱히 알리지 않아도, 세레스는 이스엘이 평민은 아니겠거니,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후드로 가리고 다니는, 눈에 띄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스엘의 걸음걸이, 앉아있는 자세 그리고 화법에서는 예절교육을 곱게 받은 티가 났다.
밖으로 자주 나오기 힘들다는 걸 듣고, 꽤 엄격한 귀족가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설마 가출한 것은 아니겠지?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레스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선반에서 찻잎이 든 유리병을 꺼내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려는데, 누군가가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라한이었다.
“세레스.”
“……?”
“아까 급한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체?
세레스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라한이 말을 이어나갔다.
“급하게…… 나가봐야 한다고 그랬잖아?”
“내가 언…….”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박하려던 세레스는 순간 숨을 삼켰다.
서늘한 금색 눈동자가 세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꺼지라는 눈빛이었다.
이 가증스러운 새끼!
세레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높아진 세레스의 언성에, 라한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목소리 낮춰.”
밖에 있을 이스엘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줄이라는 말이었다. 세레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그의 말대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꺼지면 네가 꺼져야지! 나 이 가게 주인이거든?”
위협적일 법한 세레스의 말에도, 라한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
“그러는 너야말로, 이 건물 주인이 누군지 잊은 모양이군.”
“뭐……!”
세레스는 주전자를 쥔 자세 그대로 입을 떡 벌렸다. 얄미운 미소를 유지하고, 라한은 세레스의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지금 잠시 나갔다 오는 게 좋을까, 아니면 영영 나가는 게 좋을까?”
창조주 위에 건물주 있다더니…….
세레스는 네가 그러고도 6년 지기더냐, 하는 억울한 표정으로 라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저 세레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작업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대공 각하 본인은 어딜 가고…….”
훈련장에 도착한 레오는 수군거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황실기사단 소속인 그들은 제2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인 레오 블리샤를 알아보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부단장님!”
레오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넓은 훈련장에는 수도의 기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소속별로 나란히 열을 맞추어 서있는 기사들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연유를 모르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블리샤 백작가문의 기사들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놀란 기색이 확연했다.
분명히 오늘의 소집령은 카녹스 대공이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장을 꼼꼼히 살펴보아도, 카녹스 대공의 얼굴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대공의 부관인 데이먼 란체스트만이 내리 도착하는 기사들의 명부 작성을 지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레오는 잠시 말을 알렉에게 맡겨두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데이먼 경.”
“아, 레오 경. 오랜만입니다.”
레오의 얼굴을 알아본 데이먼은 웃으며 인사했다. 레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그에게 질문했다.
“실례이지만, 카녹스 대공 각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레오의 질문에 데이먼이 웃던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눈에 띄게 동요하였다.
“그것이……. 일이 있으셔서 좀 늦으실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레오 블리샤의 암녹색 눈이 그런 그를 의심스러운 듯 응시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그 눈빛에 괜히 찔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다행히 레오는 딱히 불쌍한 부관을 추궁할 마음은 없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먼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그도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싶었다.
오늘의 소집령은 사실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주군에게 무슨 끔찍한 일을 당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오전, 카녹스 대공이 소집령을 내리라고 했을 때, 데이먼은 그것이 앞으로 생길 황실특별기사단의 일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수백 명의 기사들을 한곳에 모으는 소집령을 불과 몇 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도 참으로 카녹스 대공다운 짓이었다.
하지만 명령을 전달할 전령들을 각 가문에 보낸 뒤, 카녹스 대공이 데이먼에게 내린 명령은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는 잡아놓도록 해.’
데이먼은 영문 모르는 얼굴로 그게 무슨 말이냐 되물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대공은 데이먼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카녹스 대공은 평상복 차림으로 환복한 후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각하, 대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소집은요……⁈’
데이먼의 애처로운 외침은 공중에서 쓸쓸히 흩어져버렸다.
데이먼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작 소집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사라지고 없는 이 어이없는 현장을 통솔하는 것은 데이먼 혼자의 몫이었다.
대공 각하는 분명 기사들을 해가 질 때까지 잡아두라고 하셨지…….
데이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환히 밝히고 있는 태양을 응시했다.
해는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 해가 산을 넘어갈 때까지 이 많은 기사들에게 할 일을 끊임없이 주어야 했다.
우선 명부 작성을 끝내고, 그리고 나서는 훈련 현황들을 확인하고……. 그 후엔 뭘 시키지? 정 할 게 없으면 훈련장에 난 잡초라도 뜯으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짜던 데이먼은 의미 모를 신음을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