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헤리스가 다급히 이스엘에게로 다가왔다.
“누굽니까, 설마 그자입니까⁈”
헤리스가 언성을 높였다.
백작가에 속한 기사들 중 제일 침착하고 냉철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의 얼굴이 분노로 잔뜩 굳어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당장이라도 빼들 것처럼 말이다.
“어? 그자라니?”
“아가씨께 조각을 가르쳐주는 화방 주인 말입니다. 그 여주인이 아가씨를……!”
이스엘은 자신의 손목에 난 멍보다도, 헤리스가 화방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 입술을 벌렸다.
“그걸, 헤리스가 어떻게 알아?”
이스엘의 말에 헤리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솜씨 좋게 숨기곤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녀를 부르겠습니다. 어서 치료를…….”
이스엘은 시종을 부르려고 뒤로 도는 헤리스의 옷자락을 잡아 붙들었다.
“나한텐 중요한 일이야. 어떻게 알고 있냐니까?”
헤리스를 올려다보는 이스엘의 눈이 또렷했다.
그녀가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헤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열었다.
“……저번에 아가씨를 미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헤리스의 고백에 이스엘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백작님께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을 뱉음과 동시에, 그의 입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헤리스는 이스엘의 손목에 난 멍 자국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스엘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 말고 다급히 말했다.
“스승님은 이거랑 관계없어. 화방으로 가는 길에 시비가 붙어서 생긴 거야.”
헤리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시비라고요? 대체 무슨…….”
“잘 해결했으니까, 헤리스가 걱정할 건 없어.”
해결했다기보다는, 해결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금빛 눈동자를 휘며 미소 짓던 남자의 얼굴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뵙게 되면, 그때 제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엘.’
그 말이 무슨 뜻일지, 이스엘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남자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모를 확신이 담겨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는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헤리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한 적 없습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 말과 달리, 그의 눈매는 걱정으로 짙게 물들어있었다.
겉으로는 차갑게 굴어도, 헤리스도 결국은 블리샤 백작가의 일원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호들갑을 덜 떠는 것뿐이지, 그에게도 가장 중요한 이는 역시 이스엘 블리샤였다.
이스엘은 싱긋 웃으며 헤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
붕대와 멍에 잘 드는 연고를 가져오겠다며 황급히 등을 돌리는 헤리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
에카르 제국의 황궁에는 수많은 정원들이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것은 황제가 기거하는 궁인 네르예프 궁에 있는 정원이었다.
거대한 아몬드 나무와 맑은 연못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선화들의 경치가 그야말로 일색인 곳이었다.
정원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테라스에는 한껏 정성을 들인 티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두 사람 모두 찻잔이나 다과엔 손도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 테르반 데 에카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인물을 쳐다보았다.
오후의 티타임을 함께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상대였다.
“수도 생활은 좀 어떻지?”
“나쁘지 않습니다.”
조금도 아양을 덧붙이지 않은 대답에 테르반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자의 이름은 라한 엘 카녹스였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로는 조카와 삼촌 사이였지만, 전쟁만 났다 하면 전쟁터로 향하는 라한의 성정 때문에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악마와 다름없이 취급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취급을 받는 라한은 소문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양이었다.
갓난아기였을 때는 꺄르르 웃기도 하고 귀엽기만 했는데, 이젠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라한이 징글맞았다.
조카는 언제나 능구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무슨 변덕이냐? 갑자기 차를 마시자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가볍게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라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연회와 관련하여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 알현을 청했습니다.”
라한의 말에 테르반이 눈을 치켜떴다.
***
그러던 어느 날, 이스엘 앞으로 초대장이 하나 도착했다.
블리샤 백작이나 레오 블리샤에게 연회 초대장이 오는 일은 흔했지만, 이스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초대장이 온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황금 테를 두른 초대장 안에는 블리샤 백작영애를 내달 1일,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고급스러운 양피지 하단부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황제의 직인을 본 이스엘이 눈을 깜박였다.
이스엘 곁에 서 있던 알렉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아가씨를 초대하신 겁니까?”
“……그런가 봐.”
이스엘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기회는 많았다.
베일에 싸인 블리샤 백작영애의 존재를 궁금해 하는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저택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하지만 그 초대장들은 이스엘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마련이었다.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열성적으로 이스엘에게 오는 초대장들을 모두 차단했던 것이다.
이스엘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들을 나무라거나 연회에 가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 역시 연회나 사교계에 관심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스엘의 손아귀에 든 초대장은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차단할 수 없는 종류였다.
아무리 딸과 여동생을 아끼는 부자라도,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엘은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른 이라면 이때까지 그래왔듯 정중한 거절의 서신을 써서 전달했겠지만, 초대장을 보낸 이가 황제 폐하이니 가지 않을 방도가 없다.
“다음 주에 황궁에서 큰 연회가 열리는 모양이야.”
이스엘의 말에 알렉과 헤리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다음 주라면 분명히…….”
“승전 축하 연회군요.”
승전? 늘 저택에 갇혀 사는 이스엘에게는 낯선 이야기였다.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헤리스가 덧붙였다.
“카녹스 대공이…… 대 테르베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입니다.”
카녹스 대공은 카녹스 대공작가의 가주이자, 10년간 이어졌던 대 테르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다.
그가 이때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면서 제국에 귀속시킨 영토만 해도 수도의 배는 넘어간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공과는 달리, 카녹스 대공에게는 나쁜 꼬리표들이 따라붙었다.
사교계와 완전히 단절된 이스엘은 수도의 귀족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만큼은 예외였다.
반년 동안 테르베 전쟁에 참여했던 알렉과 다른 기사들이 대공에 대한 험담을 수도 없이 들려준 덕이었다.
전쟁터에서 카녹스 대공과 함께 싸우고 생활했던 그들은 카녹스 대공 이야기만 나오면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열변을 토해내곤 했다.
‘이 세상을 조져놓으려고 신이 보낸 악마가 분명합니다.’
‘그 인격파탄자와 함께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습니다.’
물론 이스엘은 그들의 저주와도 같은 험담을 들을 때마다 그저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애초에 이스엘에게 카녹스 대공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타인이었다.
저택에 거의 갇혀 사는 신세인 그녀가 대공을 만날 가능성은 전무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악명을 몰고 다니는 카녹스 대공이 드디어 전쟁을 종결짓고 수도로 돌아온 것이 얼마 전이었다.
전쟁도 끝났고, 대공도 수도로 돌아왔으니 앞으론 황실기사단도 재편성을 앞두고 바빠질 것이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게 그 이야기였구나.”
“아가씨! 설마 연회에 가실 겁니까?”
알렉이 순박한 갈색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딱히 가고 싶지는 않은데…….”
이스엘이 말꼬리를 흐리며 대꾸하자, 알렉의 얼굴에 화색이 확 돌았다.
하지만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곧바로 이어진 말에 단박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가야 하지 않을까? 황제 폐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내셨는데?”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을 받고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스엘은 물론 아버지인 블리샤 백작도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알렉은 절망에 휩싸여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됩니다, 아가씨!”
“……왜 그래?”
“위험합니다!”
“뭐가?”
다른 연회도 아니고,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였다.
그 어디보다 보안이 철저한 곳일 텐데 위험하다니?
“거긴……. 거긴 속이 시꺼먼 인간들이 득실득실한 곳이란 말입니다!”
“뭐……?”
“아가씨처럼 순진하고 순수하신 분이 가셨다간 분명……!”
“알렉…….”
저놈의 호들갑은 치유할 수 있는 약이 없는 걸까?
이스엘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알렉은 머릿속으로 무엇을 상상하는 건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이내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흑흑……. 아가씨이이……. 아가씨가 먼저 가시면 저는, 어흐흑!”
“아니, 먼저 갈 생각 없으니까 제발 진정…….”
“아가씨! 차라리 제가 아가씨를 대신해서 목숨을!”
이스엘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으로 헤리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있던 헤리스는 알렉을 말리기는커녕, 이스엘을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아가씨. 그저 흘려들으실 이야기가 아닙니다.”
“뭐?”
“춤을 신청하는 자제들은 단칼에 거부하시고, 다른 영애들이 웃으면서 접근해 와도 함부로 말을 꺼내시면 안 됩니다. 종종 부채를 떨어트리고 시비를 거는 영애들이 있는데…….”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차분하게 주의사항을 늘어놓는 헤리스의 얼굴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은 옆에서 꺼이꺼이 울며 손수건을 적시고 있는 와중에 믿었던 헤리스까지…….
이스엘은 찌푸려지려는 미간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타인이 건네는 잔은 받아선 안 된다며 기본 중의 기본인 이야기를 하던 헤리스가 목소리를 더욱더 낮춰서 말을 이었다.
“특히 카녹스 대공과는 단 한마디도 말을 섞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