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4화 (4/130)

# 4

“여기서 멈춰주세요.”

마부는 이스엘의 말에 마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서 내린 이스엘은 마부에게 마차 삯을 건넸다.

블리샤 백작 저(邸)는 수도의 외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중심 상업가와 달리, 저택 주변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이스엘은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풍경을 눈에 담았다.

파란 하늘에 닿을 듯 높다랗게 솟은 포플러 나무들은 저택의 정문까지 나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저택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있는 돌길 위로 나무들의 길쭉한 그림자가 늘어졌다.

돌길 끝에 있는 고전풍 저택의 하얀 외벽은 햇빛을 온전히 받아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풋풋한 향기가 담긴 바람이 코끝을 살랑이고, 햇빛이 잎사귀 위로 내려앉는 오후의 풍경은 이스엘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잘게 부서지는 따스한 빛의 잔상들을 바라보던 이스엘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젠 정말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스엘은 저택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저택은 왠지 모르게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으로 가까워질수록, 다급한 외침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를 샅샅이 뒤져!”

“북쪽은 확인했나?”

살인범이라도 쫓는 것처럼 긴박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스엘은 미간을 찌푸리고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저택의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대체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스엘은 무방비하게 열려있는 쇠 울타리의 대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평상시에는 기사들이 열어주는 문이라서 몰랐는데, 묵직한 무게 때문에 손바닥이 쇠에 쓸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낑낑거리며 문을 닫으려고 하던 그때였다.

“……아, 아가씨?”

마구간에서 튀어나온 하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이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여서, 반신반의했던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후드를 뒤로 젖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

이스엘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벨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스엘에게로 달려들었다.

“아, 아가씨이이!”

이스엘이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스엘의 옷자락을 잡는 손길이 절박했다.

하인으로서 주인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댄 행동은 크게 혼을 내야 마땅했지만, 이스엘은 별말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또 저택이 한바탕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벨은 이스엘의 후드자락을 꼬옥 부여잡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큼직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는 마치 어미를 잃은 어린 동물처럼 서글프게 울었다.

“대체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제가, 으흑, 얼마나 걱정했는데!”

탈진할 때까지 울어 젖힐 것 같은 기세였다. 이스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울지 마. 뚝.”

벨이 끕, 하고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벨을 다독이던 이스엘은 주변을 살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보다 기사들은 모두 어디 갔어? 도둑이라도 들었어?”

“기사님들은…….”

벨이 울먹이며 뭐라고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아가씨⁈”

누군가의 외침에 이스엘이 고개를 돌렸다.

짧은 진저색 머리에, 정갈한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채 이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스엘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인 알렉 케언즈 경이었다.

“아, 아가씨이!”

그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이스엘에게로 달려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알렉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는지,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쉽게 이스엘을 발견한 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가씨!!”

“이스엘 아가씨!”

이스엘은 미처 상황을 납득하기도 전에 열댓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되고 말았다.

제일 먼저 이스엘에게로 달려왔던 기사, 알렉 케언즈가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부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납치범은요? 도주했습니까?”

이스엘은 느닷없는 질문 세례에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괜찮은……. 잠시만, 뭐라고? 납치범?”

“예! 아가씨를 납치한 납치범이요! 그 흉악한 놈은 어디에 있습니까?”

“뭐어……⁈”

또 납치야? 황당함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스엘이 언성을 높이자, 옆에 서 있던 벨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 그렇지만…… 낮잠을 주무신다고 하셨는데, 침실에는 아무도 없고…….”

벨은 차마 문장을 끝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스엘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침대 위에다가 곧 돌아오겠다고 쪽지 남겼잖아. 이번엔 정말로 납치당한 게 아니라고도 적어놨는데, 그거 못 봤어?”

“그걸 둔 사람이 아가씨셨습니까?”

놀란 얼굴로 묻는 알렉의 모습에 이스엘이 대꾸했다.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한 거야?”

알렉이 순박한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납치범이요.”

“대체 왜 항상 생각이 그쪽으로……!”

바로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인 정문 쪽으로 돌아갔다.

포플러 나무 사이로 난 널찍한 길을 따라 쌍두마차가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이 방금 들었던 소리는, 다름 아닌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였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검은색 마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철썩! 하고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를 응시하던 이스엘이 입술을 벌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마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정문 앞에 도달했다.

마부가 급히 고삐를 당기자, 말들이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요란하게 날뛰었다.

말들이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남자가 마차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발 디딤판도 이용하지 않고 단번에 뛰어내린 사내들은 모두 예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하게 든 중년 남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남성을 꼭 닮은 젊은 청년이었다. 푸른 망토가 어깨 너머에서 펄럭였다. 망토 끝자락에는 황실기사단을 상징하는 흰 월계수 잎사귀가 수놓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자마자,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스엘을 발견했다.

“이스엘!!”

“이스엘!”

소리치며 달려오는 그들은 에드가 블리샤 백작과 이스엘의 오라버니인 레오 블리샤였다.

‘설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스엘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단숨에 이스엘 앞까지 뛰어온 짙은 금발의 남자가 이스엘의 양어깨를 살짝 붙들었다.

부서지기 쉬운 유리공예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스엘의 얼굴을 살피는 레오 블리샤의 암녹색 눈은 불안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스엘은 입술을 열어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이스엘! 괜찮니? 다친 곳은!”

다급하게 묻는 레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끝이 살짝 갈라져있었다.

이스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았다고 덧붙이려는데, 레오의 뒤에 서서 이스엘을 바라보던 블리샤 백작이 알렉을 향해 질문했다.

“케언즈 경, 납치범은 어디에 있지? 산 채로 잡아뒀겠지?”

무게감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날이 뾰족하게 선 아버지의 말에 이스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존재하지도 않는 납치범을 왜 이렇게들 애타게 찾는 것인지…….

블리샤 백작도, 레오도 황궁에서 한창 기사단 업무로 바쁠 시간이었다.

둘은 이스엘이 납치 되었다는 전령의 말을 듣곤 곧장 저택으로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리는 알렉을 막아 세우고, 이스엘이 대답했다.

“납치범은 애초에 없었어요, 아버지.”

“뭐? 그럼 대체…….”

“납치당한 게 아니라, 그냥 저 혼자 잠시 외출하고 온 거예요. 쪽지도 남겨놓았는데, 다들 착각한 모양이에요.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차분한 이스엘의 목소리에 블리샤 백작과 레오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기사들을 향해 흘긋 눈짓했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소리였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기사들이 예를 갖추곤 물러났다.

옹기종기 몰려들었던 시종들도 서둘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의아해 하는 이스엘의 어깨 위로 블리샤 백작의 손이 올라왔다.

굳은살이 잔뜩 배어있는 손이 이스엘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이스엘,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와 내가 목숨 걸고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각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말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반문했다.

“뭘요……?”

“어떤 놈이냐? 혹시 얼굴을 아는 자였느냐?”

“누가요?”

당연하다는 듯 되돌아오는 레오의 진지한 대답에 이스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파삭 구겨야 했다.

“납치범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납치범이고 뭐고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

침실로 되돌아온 이스엘은 안락의자에 풀썩 몸을 맡기고 눈을 내리감았다.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자, 몸의 피로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스엘은 이때까지 오라버니와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납치당한 게 아니라 조각칼을 사러 다녀온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스엘의 손에 들린 새 조각칼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말을 믿어주었다.

그 후에도 호위 없이 혼자 외출한 것에 대해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었더니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이스엘의 일에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에, 이스엘이 변태적인 성벽을 가진 귀족에게 흉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 이후 이스엘은 거의 저택에서 나오는 일이 없이 살았다.

이스엘에 대한 과보호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딜 가든 호위기사들을 대동해야 했고, 조각칼에 베여 손에 상처라도 생긴 날이면 집안이 뒤집어지기 일쑤였다.

다른 영애들이 사교계의 각종 연회들을 즐길 때, 이스엘은 저택에 틀어박혀 나무나 돌조각만 만졌다.

덕분에 이스엘에게는 변변한 친구도 하나 없었다.

그녀는 호위기사들과 시종들을 말동무 삼아가며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싸고도는 이유가 자신을 사랑해서라는 것을 이스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호도 어느 정도라야지, 너무 과한 탓에 골치가 아팠다.

“휴우…….”

이스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문가에 서서 가만히 이스엘을 지켜보던 이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스엘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밀빛 머리의 남자를 응시했다.

제복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기사의 이름은 헤리스 하멜로, 알렉 케언즈와 마찬가지로 이스엘을 지키는 전속 호위기사였다.

지방귀족 출신인 그는 평민인 알렉과는 다르게 깔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헤리스 경.”

“예, 아가씨.”

“경도 내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했어?”

“뭐……. 그런 셈이죠.”

이스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가늠하듯 바라보았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구석이 있는 알렉과는 달리, 헤리스는 눈치가 빠르고 화술에 능한 편이었다.

“거짓말이구나.”

속내를 짐작하는 듯한 말에 헤리스는 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이스엘을 응시했다.

“……이번엔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화방에 다녀왔다니까.”

“필요한 재료를 사오는 정도의 일은 하인들에게 맡겨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이스엘은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좋아.”

“……그렇습니까?”

말투는 수긍하는 듯했지만, 헤리스의 잿빛 눈에는 선명한 의심이 담겨있었다.

“알렉은? 어디에 있어?”

이스엘은 주제를 돌리고자 부러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는 지금쯤 백작님께 불려갔을 겁니다.”

“왜?”

“아가씨를 지켜야 하는 본분에 충실하지 못했으니까요.”

“…….”

헤리스의 말이 바늘이 되어 양심을 콕콕 찔렀다.

헤리스는 알렉보다 훨씬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이스엘은 부러 헤리스가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운 시간을 골라 저택을 빠져나갔었다.

알렉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이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이스엘은 습관적으로 양손의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양손에 끼고 다닌 은반지는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스엘을 가만히 보던 헤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그때였다.

“아가씨.”

“응?”

“손목에……!”

이스엘은 황급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흰 피부 위로 검푸른 멍이 선명하게 들어있었다. 몇 시간 전 용병에게 붙잡혔던 손목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여리고 하얬던 이스엘의 피부는 살짝 부딪힌 정도만으로도 붉게 달아오르거나 멍이 들기 마련이었다.

조각을 하다 보면 망치에 부딪히거나, 조각칼 손잡이에 손바닥이 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푸르고 검은 멍이 그녀의 흰 손을 얼룩지게 하곤 했다.

“아, 이건…….”

하지만 지금 이스엘의 손목에 나있는 멍은 부딪혀서 생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손목 전체를 둘러서 선명하게 난 것은 분명히 손자국이었다.

이스엘은 당황한 눈으로 헤리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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