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세레스에게 처음 조각을 배웠는데도, 이스엘의 조각에는 다른 그 어느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녀가 조각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절로 입이 벌어졌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망치질로 과감하게 돌 조각을 깎아내려가는 그녀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머릿속에 오브제를 떠올리고 나면 일말의 지체도 없이 제자리에서 조각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감과 조명이었다.
이스엘은 햇빛이나 불빛 아래에서 이 조각이 어떤 모습으로 눈에 들어올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조각상은 항상 생기가 넘쳤다.
눈을 잠깐만 떼도 움직일 것 같아서, 그녀의 조각상을 본 사람들은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세레스가 하고 있는 일은 그저 여태 혼자 조각을 해왔던 이스엘에게 부족한 기교를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도, 이스엘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세레스의 실력을 뛰어넘는 것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일 것이다.
오늘 가져온 조각상을 보고 있자니, 이미 뛰어넘은 것 같기도 하고…….
세레스는 반신 조각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건지 모르겠어…….”
처음 이스엘을 보았을 때는 저 여린 손과 팔로 망치질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세레스의 걱정은 기우였다.
몸에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스엘이 묵직한 망치를 들고도 거뜬한 것을 보고 세레스는 기함했다.
강한 바람만 불어도 쉽게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저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괴력이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레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근력을 강화해주는 물약이라도 마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스엘은 싱긋 웃으며 자신의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양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은반지였다.
전쟁과 힘을 상징하는 남신 카르뮈스의 인장이 작게 새겨져 있는 반지는, 카르뮈스 대사제의 축성을 받은 성물로 착용자의 근력을 배로 늘려주는 것이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망치질 하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지속되는 것은 아니어서…… 아껴 써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묻자, 그녀는 세레스에게 반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곧장 손깍지를 껴 양손을 맞잡았다.
-카르뮈스.
이스엘의 속삭임과 함께, 반지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성물은 절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신력을 인정받은 교황이나 대신관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만 일생에 단 한 번 신력을 불어넣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세레스는 이 반지를 어디에서 구한 것이냐 물었다.
-선물로, 받았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이스엘은 눈을 살짝 내리뜨고 손가락의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에게? 하고 물으려던 세레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연녹색 눈동자는 과거의 기억을 헤매듯 짙은 빛으로 침전되어 있었다.
세레스에게는 그녀의 상처를 헤집을 용기가 없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쓰이는 아이였다.
이스엘을 떠올리며 감상적인 생각에 젖어있는데, 화방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쾅! 하고 나무문이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문에 달려 있던 종이 떨어져 화방의 나무 바닥을 굴렀다.
이스엘이 세레스에게 선물했던 종이었다.
세레스는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종을 떨어트린 손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웬 놈이……!
하지만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세레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경첩이 부서져 덜컹거리는 문을 등 뒤로 닫은 남자는 세레스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라한 엘 카녹스……!”
경악한 얼굴의 세레스를 바라보며, 남자가 씩 미소 지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네.”
“하, 차라리 귀신이 낫지.”
세레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남자는 무채색의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는 평민들이 그러하듯 흔한 행색이었으나, 누가 보아도 귀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녹스 대공이 대 테르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후, 3년 만에 수도로 돌아왔다는 것은 세레스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곧장 화방으로 찾아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 돌아온 거야?”
“일주일 전에.”
“어쩐지. 그쯤부터 수도에서 피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
빈정거리는 세레스의 말투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카녹스 대공은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여유롭게 상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길게 늘어진 세레스의 밤갈색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여장하는 게 꽤 취향에 맞는 모양이지?”
“닥쳐. 전쟁터에서 칼 휘두르는 게 취미인 너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이렇게 험악한 말들을 주고받아도, 둘은 꽤 가까운 관계였다.
라한과 세레스는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6년 동안 함께 수학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세레스의 본명은 세레스티안 타리아로, 타리아 후작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정치나 검술에는 관심이 없었던 세레스는 일찌감치 계승권을 포기했다.
후작 가문을 이어받는 일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나 그리고 조각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나서자, 타리아 후작은 노발대발했다.
후작은 그럴 거면 후작가에서 당장 나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고, 세레스는 그 말에 얼씨구나 하며 당장 출가하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문에서 뛰쳐나온 세레스를 도운 것은 라한이었다.
델리온 3번가에 위치해있는 상점 건물은 대부분이 카녹스 대공 가문의 소유였다. 그는 세레스가 화방을 차릴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세레스는 라한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화방을 차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알아볼 사람들이 있을까 여장까지 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마음껏 예술을 할 수 있다면야 아무래도 좋았다.
워낙 중성적으로 생긴 외모 덕에 여장한 세레스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로브를 두르고 가발을 쓴 후 목소리를 가늘게 만들어주는 물약을 마시고 나면 감쪽같았다.
델리온 거리에 있는 화방의 여주인이 사실은 타리아 후작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온 수도를 통틀어서 딱 둘뿐이었다.
타리아 후작가의 충직한 집사와, 지금 세레스의 눈앞에 앉아있는 이 건방진 카녹스 대공.
“이번엔 또 얼마나 있다가 뛰쳐나갈 생각이냐?”
세레스의 질문에 라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라한이 수도에 오랜 기간 머무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전투가 잦아들면 보고를 위해 수도로 돌아왔다가, 그 직후 다음 전투에 출전하기 일쑤였다.
귀족들은 카녹스 대공의 등 뒤에서 그를 피에 미친 전쟁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황가에 대한 카녹스 대공의 충심을 칭찬하는 의견도 드물게 있긴 했다. 세레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라한 엘 카녹스와 충심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을 넘어서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남자는 제 목전에서 황가가 스러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였다.
라한이 전쟁에 나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것은 전쟁터가 사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용인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카녹스 대공을 둘러싼 수많은 해괴망측한 소문들이 과하게 부풀려진 점도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전쟁터를 누비며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목격한 자라면 알 것이다.
라한 엘 카녹스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미친놈이라는 것을.
라한은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세레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테이블 위의 조각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방금 나간 사람. 네 제자야?”
뜬금없는 질문에 세레스가 눈을 깜박였다. 세레스는 자신이 이스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말로 언뜻, 분수에 맞지도 않는 제자를 들여 골치 아프게 됐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맞는데. 걔는 왜……?”
라한 엘 카녹스는 원래 자신을 제외한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라한이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가 싶어, 세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한의 표정을 살폈다.
라한이 내려다보고 있는 조각상의 끄트머리에는 유려한 필체로 ‘엘’이라는 글자가 서명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서명을 발견한 라한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이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라한은 마침내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세레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라한의 얼굴에는, 세레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돌로 만든 에닉스 여신과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레스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황급히 문지르며 라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얘가 왜 이러지? 뭐라도 잘못 먹었나?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라한의 모습에 세레스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라한이 에닉스 여신상을 눈짓하며 질문했다.
“이것도 경매에 내놓는 건가?”
“어? 어, 그렇지…….”
라한의 말대로 내달에 있을 경매에 출품할 예정이었다.
세레스는 이스엘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달마다 열리는 예술품 경매시장에 이스엘이 작업한 조각상을 내놓았다.
그렇게 시험 삼아 출품했던 조각상은 세레스조차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어 높은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
그 후로도 이스엘의 조각상은 경매 시장에 출품하는 족족 높은 경매가로 귀족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돌연 등장한 천재 예술가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들려오는 소문들 중에는, 예술가가 내놓는 조각상에 ‘신의 축복’이 담겨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스엘의 실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의 축복이라는 말까지 들을 줄은 세레스도 몰랐다.
교황이 가진 힘이 황권과 비등하다는 에카르 제국에서, ‘신의 축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이스엘의 조각이 높게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세레스에게 대체 어디 출신의 예술가고, 어떻게 생긴 자냐고 추궁해왔다.
자신의 정원에 둘 대리석 조각을 부탁하고 싶다는 귀족들도 여럿 있었으나, 그때마다 세레스는 말을 얼버무렸다.
차마 그 천재 조각가라는 자가 조각을 배운 지 3년도 되지 않은 초짜라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레스는 경매로 받은 돈을 모두 고스란히 이스엘에게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스엘은 수강료라고 생각하라며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스승님 간식이라도 사드세요!’
이스엘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고가에 팔려나가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조각하는 순간의 성취감이 중요할 뿐, 조각품의 가치라든가 예술가로서의 명성 같은 부차적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조각칼을 들고 눈을 빛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몇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각에 미쳐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레스는 언젠간 이스엘이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고살 길이 있어야 조각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세레스는 그녀에게 돈을 다 써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금고에 이스엘 몫의 돈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때가 되면, 모아둔 돈을 이스엘의 품에 안겨주고 화방에서 쫓아낼 계획이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세레스를 일깨운 것은 라한이었다.
“얼마지?”
“응? 뭐가?”
세레스가 바보처럼 되물었다.
라한이 턱짓으로 테이블 위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이스엘의 조각상이었다.
세레스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여기서 팔 게 아니라, 경매시장에 출품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라한은 세레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성인 남자의 주먹 크기는 될 법한 돈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라한이 품속에서 꺼내 던진 것이었다.
굳이 주머니를 열어보지 않아도, 그 속에 든 것이 죄다 금화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세레스가 이게 무슨 행패냐는 듯 노려보자, 라한이 말했다.
“모자란 값은 저택으로 청구해.”
“아니, 안 판다니까? 애초에 넌 예술품에 관심도 없잖아. 이걸 사서 뭐 하려고?”
다급히 쏘아붙이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라한은 이미 테이블 위에서 조각상을 집어 들고 있었다.
“앞으로도 네 제자가 만드는 조각상들은 모두 내가 살 테니, 경매엔 내놓지 마.”
“뭐라고……?”
세레스는 기함하였다. 자신의 친우는 이 조각상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스엘의 작품들은 점점 더 높은 가격으로 귀족들과 재력가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경매에 출품했던 주먹 크기의 흰 사슴상만 해도 혈통이 좋은 최고급 군마를 열 마리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가격에 팔렸다.
물론 그 정도면 카녹스 대공에게는 티끌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라한은 앞으로 나올 작품들까지 모두 독점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세레스는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열었다.
“가지고 싶으면 경매에 참여해서 정당하게 금액을 제시해. 그게 싫으면 작품을 만든 당사자랑 직접 거래를 하든가.”
세레스가 덧붙인 말에, 라한의 날카로운 눈이 이채를 발했다.
세레스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문득 등골을 따라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세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한이 조각상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좋은 생각이야.”
“뭐? 뭐가?”
“직접 거래.”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라한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세레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곤 사색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말갛게 웃는 이스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