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2화 (2/130)

# 2

이스엘과 남자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다른 이들은 남자가 그저 위협하려고 검을 꺼내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엘은 아니었다. 블리샤 백작가는 유명한 검술 명가였다. 이스엘은 어렸을 때부터 기사들이 대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래서 이스엘은 기사들이 살기를 내보일 때 어떤 기운을 풍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검을 뽑아든 바로 그 순간부터, 남자에게서 옅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제된 기운이었다.

그는 숙련된 검사였고,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자였다.

이스엘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스엘의 손목을 쥐고 있는 용병을 베어 넘겼을 것이다.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건 말건,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이스엘이 남자를 말린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각칼 살 돈을 받아야 하거든요. 죽어버리면 받아낼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발아래에 엉망으로 부셔져 있는 자신의 조각칼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산뜻한 웃음소리였다. 모양 좋은 입술 끝이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날카로웠던 눈매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휘었다.

이스엘은 그 모습에 말을 잃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원래도 준수한 외모였는데, 다정하게 웃으니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까닥인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그대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깔끔한 갈무리였다.

“알겠습니다.”

방금까지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한 미소였다.

검을 집어넣은 남자가 용병의 팔을 잡아채 꺾어버린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팔이 꺾인 용병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우득,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크악!”

팔뼈가 부서진 것인지, 용병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그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스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보상하십시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본 용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자의 싸늘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취기가 날아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제 팔을 쥐고 있는 사내의 힘은 인간의 악력이 아니었다.

덜덜 떨던 용병은 결국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이스엘에게 넘기곤 냅다 도망쳤다. 그가 비틀비틀 뛰어가는 뒷모습이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이스엘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많지는 않지만, 부서진 조각칼과 끌들을 새로 살 정도는 되는 돈이었다.

돈주머니 속을 확인하던 이스엘이 고개를 들었다. 이스엘을 도운 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스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사례를 하고 싶은데…….”

급하게 저택에서 빠져나온 탓에 이스엘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이스엘은 손에 들고 있던 돈 주머니를 천천히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거라도……?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돈 주머니가 아닌, 이스엘의 손가락에 닿아있었다.

양쪽 새끼손가락에 낀 은반지를 본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금색 눈동자 위로 이름 모를 감정이 잔잔하게 떠올랐다.

잠시 입술을 닫았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스엘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 타인에게 빚을 지는 것은 극구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고민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네?”

“제가 저 남자를 죽일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스엘은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냥…… 그러실 것 같았어요.”

굳이 여기서 자신이 검술 명가인 블리샤 백작가의 영애이며,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검사라며 과한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남자의 눈이 이스엘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스엘이 한 말의 진의를 판단하려는 것 같았다.

이스엘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또렷한 눈빛에 남자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둘 사이에 한참 흐르던 정적을 깨고, 그가 입술을 열었다.

“이름을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제 이름이요?”

이스엘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을 내려다보는 눈은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외출할 때면 늘 가명을 썼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남자에게 거짓말을 했다간, 너무 큰 양심의 가책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장바닥에서 자신이 백작영애임을 밝히는 것은 지극히 멍청한 짓이었다.

주저하던 이스엘은 입술을 열었다.

“……이스엘.”

결국 그에게 내어준 것은 성을 뺀 이름뿐이었다.

남자는 이스엘이 본명을 다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바람에 흔들리는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이스엘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쪽은요?”

이스엘의 질문에 남자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금색 눈동자가 휘어질 때마다 따스한 빛깔의 입자들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이스엘에게 한층 더 가까워졌다.

남자의 곧고 마디 긴 손이 이스엘의 목덜미 옆까지 올라와 있었다. 마치 그녀의 양 뺨을 다정하게 감싸기라도 할 것처럼.

이스엘은 왜인지 모를 긴장감에 숨을 삼켰다.

피가 혈관을 따라 박동하는 소리가 유독 선명히 귓가를 타고 돌았다.

남자의 시선이 이스엘의 눈, 살짝 상기된 볼, 그리고 턱 끝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젖혀졌던 후드를 이스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아까부터 훤하게 드러나 있었던 이스엘의 얼굴은 후드 아래의 어둠에 폭 가렸다.

그림자 속에서 연녹색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이스엘에게 속삭였다.

“다음 기회가 있을 것 같군요.”

“……?”

“다시 뵙게 되면, 그때 제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해 묻기도 전에, 남자는 미련 없이 이스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이스엘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스엘.’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바퀴를 돌고, 또 돌았다.

***

딸랑, 문에 달려있던 작은 종이 나지막하게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안료와 석회가루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있는 화방은 손님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화방 안의 커다란 진열대에는 푸른 천이 깔려있고, 그 위로 갖가지 그림도구들, 조각칼과 끌들이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이스엘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진열대를 지나쳐 검은 휘장이 쳐져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휘장을 젖히려고 손을 뻗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밤갈색의 생머리를 묶어 어깨 위로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곧게 뻗은 높은 콧대와 턱선, 커다란 키를 가진 그녀는 중성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안쪽의 작업실에서 벚나무 목재를 옮기던 여인은 이스엘을 발견하고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스엘이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스승님. 오랜만이에요.”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고, 여인이 미간을 천천히 좁혔다.

날카로운 시선이 이스엘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녀는 이 화방의 주인이자 예술가인 세레스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본 것이 두 달 전이었는데도, 세레스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스엘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세레스의 눈길이 아래로 향했다.

이스엘은 검은색 천으로 동동 싸맨 조각상을 들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두 달 동안 보이질 않기에 드디어 제자놀음을 관두기로 한 건가 싶었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네.”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화방에 내려앉았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이스엘을 향한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스엘은 싱긋 웃었다.

세레스는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굴지만, 알고 보면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스엘이 세레스의 화방을 발견한 것이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날 이스엘은 우연히 물건을 사러 화방에 들어갔다가, 작업실에서 석상을 조각하고 있는 세레스를 발견했다.

이스엘은 조각정과 끌망치를 이용해서 달리는 말의 근육들을 표현해내는 그녀의 손길을 보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길로 세레스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세레스는 제자 같은 피곤한 걸 둬서 뭐 하냐며 냉정히 거절했다.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던 그녀의 단호함이 무너진 것은, 이스엘의 조각상을 보고 나서였다. 그녀는 이스엘이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가져온 조각들을 보곤,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이스엘은 한 달에 한 번씩 화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세레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엘이 세레스를 만나기 전까지 만든 조각들은 다 작은 나무나 돌로 만든 장식용에 가까운 조각들이었다.

이스엘이 작은 조각칼만 쥐고 있어도 다칠까 봐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가족들이나 기사들 때문이었다.

그들 때문에 큰 조각상을 만드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크기가 크고 무거운 석재와 목재를 깎는 조각은 세레스의 작업실에서 처음 해본 것이었다. 커다란 석재를 깎아내려가는 것은 이스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한층 더 조각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이스엘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겼다. 세레스에게는 귀족혐오증이 있었다.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자신이 실은 귀족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세레스를 정식교사로 초청하지 못하고, 호위기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화방에 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스엘이 블리샤 백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세레스는 더 이상 그녀에게 조각을 가르쳐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번 달은 좀…… 바빴어요.”

이스엘의 변명에 세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가져온 조각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엘은 품에 안고 있던 조각상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까 바닥에 떨어트리긴 했으나, 석재 조각상의 상태는 양호했다.

조각칼들이 모두 부서진 것은 확실히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래도 받아낸 돈으로 다시 싼 것을 장만하면 그만이었다.

조각상이 망가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혹시나 조각상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생겼다면, 이스엘도 용병을 베려던 남자를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금색의 눈동자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한 기분이었다.

이스엘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세레스는 천을 모두 걷어내고 조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말없이 조각상을 보던 세레스가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스엘…….”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이스엘의 이름을 불렀다. 상념에 빠져있던 이스엘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

“네?”

천진난만한 연녹색 눈동자가 세레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레스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이스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방의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한 뒤였다.

“이스엘?”

“시간이 벌써…….”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훌쩍 넘어서 있었다. 아까 길거리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끈 탓이었다. 이스엘은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화방에 들르는 날은 이스엘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호위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택에만 머물러야 했다.

이스엘이 이렇게 몰래 외출을 나오곤 한다는 것은 기사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스엘이 용케 때를 노려 나올 때마다 온 저택이 뒤집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스엘이 항상 화방에 다녀온다고 쪽지를 남기는데도, 매번 이스엘이 납치당했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돌아가 봐야겠군.”

세레스가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겨우 달에 한 번 찾아오면서도, 이스엘이 화방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두 시간 동안 열심히 세레스의 옆에서 석재를 조각하다가, 뭐에 쫓기기라도 하듯 급히 화방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이스엘은 새로운 조각칼들을 세레스에게서 받아들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는 더 일찍 올게요, 스승님.”

“그러니까 그 스승님이라는 말부터 좀 그만두라니까.”

세레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스엘이 살풋 웃으면서 화방을 빠져나갔다.

창 너머로 작은 뒷모습이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한 세레스는 이스엘이 놓고 간 조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살짝 감도는 화강암 조각상은 치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에닉스 여신의 반신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화방의 창을 타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이 사뿐하게 내리감은 눈매를 간질이고 있었다.

여신의 둥근 뺨과 목덜미를 따라 이어지는 곡선의 부드러움이 만지지 않아도 느껴질 것만 같았다.

허리까지 굽이쳐 내려오는 곱슬머리의 표현은 눈앞에 있는 것이 돌로 만든 조각상이라는 것을 무심코 잊어버릴 정도로 자연스럽고 섬세했다.

아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조각상을 보는 순간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했다.

그녀의 조각을 볼 때마다, 세레스는 뼈저리게 깨닫곤 했다. 이스엘은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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