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화 (1/130)

# 1

제국력 712년, 어떠한 소문이 에카르 제국을 뒤흔들었다.

‘에닉스 여신의 축복이 깃든 조각상.’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예술가의 조각상이었다.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조각상은 한 번 보면 헉 하면서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경매시장에 출품된 조각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최고가에 낙찰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각상에 성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지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자작부인이 침실 협탁 위에 조각상을 두자, 이틀 만에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소문이 널리 퍼지며, 예술가의 조각상은 경매시장에 출품될 때마다 최고낙찰가를 기록했다. 소문을 들은 귀족들이 너도나도 사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조각상을 둘러싼 소문은, 치유의 여신 에닉스를 모시는 대신전까지 이르렀다.

신전 측에서는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신관들을 파견했고, 조각상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의 협조 아래에 신관들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가 엘을 수배하는 교황 리안테의 칙서가 제국 곳곳에 나붙었다.

베일에 싸인 조각가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제국을 뒤흔든 천재 조각가는 다름 아닌 라한 엘 카녹스 대공의 약혼자로 알려진 이스엘 블리샤 백작영애였다.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공 각하?”

하얗게 질린 블리샤 백작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이스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백작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스엘은 아버지인 블리샤 백작과 함께, 저택을 찾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제국식 예복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이 손님의 이름은, 라한 엘 카녹스였다.

윤기 흐르는 흑마들이 이끄는 사두마차가 백작가 저택 앞에 당도한 것은 약 이십 분 전이었다.

검은 마차 측면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뒤로 두 자루의 칼이 교차되어 있는 붉은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카녹스 대공작가의 문장이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인물이 누구일지 단번에 깨달은 저택의 기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현 카녹스 대공작이 가지고 있는 악명 때문이었다.

카녹스 대공가는 황제의 외척에 속하는 명문가였다.

하지만 4년 전, 카산트 전투에서 전대 대공이 전사하면서 카녹스 대공가는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남자, 라한 엘 카녹스였다.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다양했다.

전쟁광, 악마, 학살자, 인격파탄자…….

이스엘은 기사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인격파탄자, 아니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쥐고 있는 손은 마디가 길쭉했다. 곳곳에 굳은살과 흉터가 있는, 검을 잡는 자의 손이었다. 한 달 전 이스엘에게 후드를 씌워줬던 바로 그 손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그 손의 주인이 카녹스 대공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찻잔을 살짝 기울이던 대공이 백작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공의 말에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그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청혼이라니?

“누구, 누구에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블리샤 백작은 질문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그의 얼굴은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점철되어있었다.

찻잔을 달칵 내려놓은 대공이 고개를 살짝 돌려, 백작의 옆에 앉아있는 이스엘을 쳐다보았다.

대공과 이스엘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은은하게 일렁이는 금색 눈동자가 이스엘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대공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스엘 블리샤 백작영애에게 말입니다.”

백작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흰 찻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카펫 위에 나뒹굴었다. 뜨거운 차가 카펫을 물들이는데도, 백작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이스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스엘은 명백하게 예절에 어긋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된 목소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에?”

당신 정신 나갔어? 하고 묻는 것 같은 말투에 카녹스 대공의 미소가 살짝 진해졌다.

그는 이스엘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대공이 이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레이디 이스엘.”

이스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다급히 그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무슨 약조를 했지……?

종잡을 수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의 이스엘을 보던 카녹스 대공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이 움직였다.

“저와 결혼하기로.”

***

수도의 동쪽 구역에 위치해 있는 델리온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물건을 내다놓고 큰 소리로 호객행위를 하는 자부터, 가격을 흥정하는 자들까지.

장날을 맞아 주머니를 두둑이 채운 상인들이 노상주점에서 술을 들이켜며 와하하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스엘은 머리 위에 뒤집어쓴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시장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품속에는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석재조각상이 들려있었다. 두꺼운 책 한 권 정도 되는 작은 크기였지만 꽤 묵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었다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스엘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기사들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초조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스엘 블리샤, 블리샤 백작가의 영애인 그녀는 지금 몰래 외출을 나온 상태였다.

몰래 나왔다고는 하나, 꽤 소심한 행보였다.

침대 위에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쪽지도 남겨두었고, 실제로 그녀는 두 시간 정도 후에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시종들이 이스엘이 남겨놓은 쪽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올 호위기사들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리며, 이스엘은 빠르게 발을 옮겼다.

이스엘이 향하는 곳은 델리온 거리의 끄트머리에 위치해있는 작은 화방이었다.

그곳에는 화방의 주인이자, 이스엘의 스승님이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매달려온 조각상의 완성품을 그녀에게 보일 생각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대감이 차올랐다.

길을 막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던 이스엘이 누군가와 세게 부딪힌 것은 화방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윽!”

다행히 물건들을 품속에 꽉 쥐고 있었던 덕분에 그녀는 아무것도 떨어트리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는 들고 있던 술병을 놓치고 말았고, 돌바닥에 부딪힌 유리병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병에 담겨 있던 술이 사방에 튀었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화가 난 남자가 단번에 언성을 높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 남자의 목소리는 어눌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용병인 듯했다. 이스엘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 죄송하면 다야⁈”

사실 이건 이스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잘못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이 먼저 사과를 건넨 것은 빨리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언제 기사들이 쫓아올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몸집이 작은 이스엘을 보곤 대번에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굴었다.

그 속내에 깔린 저열한 인성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이스엘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이스엘은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술값은 보상해드릴게요.”

눈앞에서 성인 남성이 언성을 높이고 있는데도, 차분하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떨리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낭랑한 이스엘의 목소리에 잠시 굳어있던 용병이 다시 소리를 내질렀다.

“돈?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사과부터 다시 제대로 하라고!”

그는 완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을 키워선 안 됐다.

이스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어떻게 사과하길 바라시는데요?”

남자는 이스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깊게 뒤집어쓴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얇은 턱선과 작은 입술을 본 남자가 눈을 빛냈다.

그가 씩 웃더니, 갑자기 이스엘의 팔을 잡아챘다.

그의 손이 옷자락을 쥐고 당긴 탓에, 머리를 덮고 있던 후드가 살짝 젖혀졌다.

이스엘은 아차, 하고 급히 후드를 한 손으로 부여잡았지만, 이미 용병은 이스엘의 얼굴을 언뜻 본 뒤였다.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휘유, 하고 불량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뭐야,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목소리 끝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부딪힌 건 용서해줄 테니까, 얼굴 좀 보자고.”

변태처럼 킬킬 웃으며 용병이 이스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스엘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등 뒤에서 남자와 일행인 듯한 장정이 이스엘의 어깨를 턱 하고 붙잡았다.

술 냄새와 역겨운 체취가 이스엘의 코를 습격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용병에게 일행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실수였다.

이스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경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용병과 마찬가지로 술에 얼큰하게 취해 낄낄 웃고 있었고, 나머지는 혹시나 잘못 엮이게 될까 봐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스엘의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뼘은 큰 장신의 남성이었다.

외출복 차림을 한 남자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이스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독특한 남자였다.

햇빛을 등져 그늘진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검은 머리 아래, 날카로운 눈매와 금색 눈동자에는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마치 하찮은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에 이스엘은 순간 얼어붙었다.

잔뜩 굳은 이스엘이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는지, 이스엘을 보던 용병이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웃었다.

이스엘은 몸을 흠칫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저 남자가 아니라 눈앞의 용병이 문제였다.

혹시 만약의 일이 일어난다면…… 반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용병이 손을 훅 뻗어 이스엘의 후드를 완전히 뒤로 젖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후드 아래에 있던 결 좋은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이스엘의 새하얀 뺨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빛에 이스엘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로완강의 색을 꼭 닮은 연녹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박였다.

“……뭐야.”

후드를 젖힌 용병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낄낄 웃고 있던 이들 모두가 홀린 것처럼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후드가 벗겨지며 드러난 그녀의 청초한 얼굴에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스엘은 그 틈을 노려서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으나, 용병의 손이 훨씬 빨랐다.

그가 가느다란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그 탓에 이스엘이 안고 있던 조각상과 조각칼들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축축하고 두터운 손이 맨살에 닿자, 손목에서부터 벌레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이스엘은 소스라치며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억센 손은 이스엘의 손목을 꽉 잡고 놔주질 않았다.

“놔……!”

그 순간이었다. 조용해진 주변에서, 금속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이 뽑히는 소리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이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이스엘의 처지를 방관하던 장신의 남자였다.

이스엘의 눈에 남자가 품속의 검집에서 검을 빼드는 모습이 천천히 각인됐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이 날이 선 검 끝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흔들림 하나 없는 완벽한 발도였다.

그 깔끔한 솜씨에 감탄하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이스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이스엘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는 장정의 손에 꽂혀있었다.

검을 든 남자를 발견한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용병은 뒤늦게야 남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남자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검을 보고 잠시 얼어붙었던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무슨 일이오?”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 역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손등을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핏줄을 본 이스엘은 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

작은 목소리에, 남자의 시선이 돌아왔다. 이스엘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죽이지 마세요.”

검을 쥐고 있던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금색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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