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루카스는 현실적으로 황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죄책감과 회한은 정신을 좀먹었고 정상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카스가 짧은 치세 동안 외척 세력을 짓밟아 둔 터라 누구 하나 섣불리 제국의 권력에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대로 제국의 귀족들은 대공가가 황실을 이어 갈 것을 청했다.
공식적으로 대공가는 방계 황족이었고 그 외의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황제가 되라고 하는 거죠?”
“……그래.”
에드윈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옥좌에 올라야 했다. 아직 제국은 황제가 필요했고, 옥좌를 오롯이 장악할 수 있는 자가 앉지 않으면 피의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나 때문에 망설이고 있고요.”
에드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디아나는 영명한 여인이었다. 정세가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았고, 지금 에드윈이 받는 압박도 이해했다.
사실상 에드윈이 아닌 사람이 옥좌에 앉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방계 황족이라는 명분과 실질적 권세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에드윈이었다.
“난 황제가 되길 원한 적 없어.”
그것도 진심이었다. 둘은 모든 일이 끝나면 북방의 영지로 떠나서 평온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그건 오랫동안 함께 꿔 온 꿈이었다.
그 사실은 에드윈의 마음에 큰 걸림돌이 됐다. 황제가 되면 디아나는 황후가 되어야 했고, 어찌 보면 디아나에게 악몽 같았던 공간으로 돌아가 평생을 살아야 했다.
“나도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에드윈이 그 마음 씀씀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안타까운지, 에드윈을 서글프게 만드는지, 디아나도 알고 있을까.
“하지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내가 모자라서 또 그대에게 결단을 미루는 것 같아.”
에드윈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고, 달리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난, 가능하면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대안을 찾고 있었어.”
“그런 대안이 있었다면, 다른 이들도 이미 찾았겠지요?”
디아나의 미소가 살짝 씁쓸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음대로 끝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책엔 마침표가 찍혔지만,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모두의 삶이 그렇듯이 어떤 것은 감내해야 했다.
“에드. 우리가 이대로 떠나면 몇 년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황좌를 두고 다툼이 벌어질 거예요.”
디아나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달콤한 꿈에서 눈을 돌리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야만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수도를 삼키면 언젠가는 우리의 평화도 깨지겠죠. 그때가 되면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을 테고요. ……우린 이미 결말을 알고 있어요. 그렇죠?”
에드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힘으로 누르지 않으면 귀족들이 저마다 들고 일어서 황위를 넘보겠지.”
가장 유력한 인물은 에드윈의 외조부인 드노아였다. 그러니 그들의 속셈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심각한 표정 짓지 말아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데는 관심 없어. ……하지만 강한 힘을 손에 넣어 그대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죄 많은 왕관을 기꺼이 써야겠지.”
디아나가 양손으로 에드윈의 굳은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일부러 그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위로 올렸다. 그렇게라도 그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당신이 왕관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루카스가 내려놓아야 했던 왕관과 옥좌는 죄로 물들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다를 것이다. 디아나는 제 남편이자 대공인 에드윈을 믿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황제라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어울렸던 건 에드윈이었을 것이다. 맞지 않는 자리에서 태어난 것은 루카스에게도 불행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지켜야 하는 건 이제 나만이 아니에요.”
“그래, 백성을 지켜야지. 그들은 무고하고, 제대로 된 통치를 받아야 하니까. 이제 체스터 대공가와 카를 공작가가 천천히 합쳐지는 것도 지켜봐야 하고, 기사단과 사제들까지.”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 명씩 손을 보태 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 손이 하나로 모였다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기적은 하나 더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아, 니콜라라는 아이는 셀린 양이 함께 살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앞으로도 지원할 생각이고.”
“그리고요?”
“어머니는 반 테스 저택에 가서 외조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아마 내게 화가 나신 게지. 굳이 붙잡고 싶지 않아서 그러시라고 했다.”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디아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선대공비인 그레이스와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사이였고 결정적으로 디아나를 황실에 넘겼다. 에드윈도 자신의 어머니이긴 했지만, 드노아 경을 뼛속까지 닮은 그녀와 점점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황태후는…… 아마 루카스와 함께 황실 소유의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단지 황제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황실이 탄생해야 했다. 자연히 이전 황실의 잔재는 사라져야 했다. 그것이 모든 황족의 운명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에드윈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디아나가 싫어하게 된 표정이었다.
“웃어 줘요, 에드.”
“그대의 손가락이 날 웃게 만들고 있잖아.”
그 말을 하며 에드윈이 장난스레 디아나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아야.”
“아프면 이제 놔줘. 혼자서도 웃을 줄은 아니까 말이야.”
그제야 디아나가 손을 놨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의 손을 습관처럼 잡고 꼼지락거렸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정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지쳐 기절하곤 했지만, 지금은 사뭇 달랐다. 오랜만에 디아나가 품에 안겨 있다고 생각하니 에드윈은 슬쩍 체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깐, 내 얘기 안 끝났어요!”
에드윈의 손이 능글맞게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빠르게 저지한 디아나가 자못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는 듣고 있는데.”
“끝나기 전까지는 손도 가만히.”
디아나가 반쯤 진심을 담아 에드윈을 노려보자 후, 한숨을 내쉰 에드윈이 마지못해 손을 꺼내 아쉬운 대로 디아나의 손을 조물거렸다. 디아나는 그것까진 봐주겠다는 듯이 선심을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이야기가 뭐지? 아, 굳이 서두르는 건 아니고.”
에드윈의 흑안에 묻어나는 뜨거운 열정이 거짓말이란 걸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디아나도 에드윈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의 품에서 느끼는 환희도, 절정을 맞이한 채 나신을 맞대고 잠드는 것도 전부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지, 그 양자택일은?”
“아뇨, 순서만 정하는 거예요. 얘기는 둘 다 해 줄 테니 걱정 말아요.”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을 보자 에드윈은 마음이 급해지는 걸 느꼈다.
“나쁜 소식?”
대공으로서의 습관이었다. 무릇, 나쁜 소식부터 대비해야 하기 마련이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음, 나쁜 소식은…… 우리가 당분간 손만 잡고 자야 한다는 거예요.”
“뭐?”
에드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된다는 항의가 시선으로 똑똑히 전해졌다.
“왜!”
자신도 너무 격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에드윈이 살짝 언성을 낮추고 디아나의 눈치를 봤다.
“아, 불청객이? 그래도 며칠이면 가겠지?”
제발 그래야 한다는 눈빛이었다.
“반대예요. 불청객이 오질 않아요.”
“좋아, 아주 좋군. 난 항상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불청객이란 디아나의 월경이었다. 에드윈은 그럴 때마다 애타는 마음으로 디아나의 손을 붙든 채로 잠들곤 했다.
“……그런데 왜?”
잠깐 공황 상태에 빠졌던 에드윈이 합리적인 의문을 던졌다.
“아, 그건 좋은 소식인데요.”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불청객이 안 온 지 두 달은 된 것 같아요.”
“그래, 그건 좋다니까. 그보다 왜 우리가 당분간 손만 잡고 자야 하는지…….”
열변을 토하려던 에드윈이 순간 말을 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미칠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에드윈은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디아나를 봤다. 그 눈동자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서 에드윈의 기분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직은…… 좋은 소식이 아닌가요……?”
디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모든 게 혼란스러울 때였다. 그걸 수습하기에도 바쁜데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긴 했다. 무엇보다 하필 이런 때 와 줘서 시련을 겪게 한 것 같아 새로운 생명에게도 미안했다.
“아니…….”
에드윈은 거의 넋이 나간 채였다.
“아니, 내 말은…… 아니!”
그러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에드윈에게 차오르는 기쁨은 디아나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디아나 자신이 새 생명의 잉태를 알았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역시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디아나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남자였다.
“아니, 나는…… 아니라는 게 아니고.”
“알아요.”
디아나가 다정하게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드윈은 볼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 손을 어디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디아나의 허리를 조심스레 안았다가 다시 어깨를 안으려다가 망설이는 게 너무 뻔히 보여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마음이 같다는 거.”
디아나가 에드윈과 이마를 맞댔다. 그러자 둘의 눈동자가 가까이에서 투명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죠?”
디아나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지켜 줘야 하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걸.”
에드윈은 울컥하는 감정에 말문이 막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모습조차 디아나에겐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대 다음으로 내 목숨을 걸고 지켜 줄 거다.”
그 순서가 묘하게 이상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디아나가 아는 에드윈은 모두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더 많은 사람을, 이 제국을 품어 주세요.”
두 사람이 만든 결말이었기에, 마침표 이후의 이야기도 둘이 계속 써야 했다. 디아나는 그 운명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중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자랄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제국의 모든 이도 한때는 이리도 소중한 새 생명이었을 거다.
“그게 진정 디나 그대의 뜻인가.”
에드윈이 신중하게 되물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의 여생이 전부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네. 우리가 만든 결말이니, 우리가 이어 가야죠.”
디아나가 분홍빛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있는 한, 에드윈의 왕관은 죄로 물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 품고 있는 새 생명이 이어받아야 할 왕관이기에 더욱.
“걱정하지 말아요. 난 자유로운 황후가 될 거니까요.”
“그 자유까지 내가 지켜 줄 거다.”
마지막 남은 에드윈의 걱정을 디아나가 불어서 날렸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며 빛났다. 둘은 지금 서로의 체온으로 하나의 새 생명을 품고 있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가족의 탄생이었다.
“디나.”
에드윈이 잠시 맞붙어 있었던 이마를 떼어 냈다. 디아나는 그저 눈을 들어 에드윈을 응시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는 그대를 사랑할 거다. 그것도 영원히.”
에드윈다운 정직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한다고 하면 돼요.”
가장 소중한 것들은 모두 이 순간에 머물러 있다.
“사랑해요, 에드.”
디아나가 먼저 에드윈에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순간이 모여 인생은 계속된다. 그 책이 끝난 후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인생이었다.
순간은 이렇게 또 지나간다. 하지만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들은 두 사람의 마음에서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