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83화 (183/184)

183화

루카스의 녹안에서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루카스.”

디아나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차분하게 불렀다.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어요. 순간은 순간으로 스쳐 가면 그뿐이죠.”

“아니야, 그대는 돌릴 수 있잖아? 무수히, 무수하게 그랬잖아!”

“그래서 그 기억은 모두 같았나요? 그 아이는…… 다시 태어났나요?”

루카스의 얼굴이 망연하게 질렸다. 디아나가 일으킨 것도 소용없이 털썩,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된다, 안 돼…… 되찾아야 해.”

“그럴 수 없어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건, 그런 거예요.”

“그럼 난 이렇게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하나? 이 기억을 가진 채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그래요.”

모든 것이 루카스의 탓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래, 트리샤 때문에, 나는…….”

“알아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러나 모든 것이 그녀의 뜻이었나요? 루카스 당신으로 살았던 적은 한순간도 없나요?”

전부 트리샤의 탓도 아니었다. 루카스도 그 참혹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그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루카스 파렐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러나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찾을 수 있지?”

루카스는 넋이 나간 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건 원작 디아나도 끊임없이 품었던 의문이었다. 그녀는 결국 한도까지 회귀하고 비슷한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이젠 루카스의 차례였다. 그러니 디아나는 루카스를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더 아팠던 사람이 너무 많았다.

“소중했던 모든 건 영원히 잃어버린 거예요. 평생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사라지고 잊힌 그들을 위해서라도.”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중얼거리는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의 역할은 끝났다. 이게 루카스와의 마지막이란 예감이 들었다. 기나긴 악연의 끝이었다. 디아나는 루카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난, 길게 말하지 않겠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닐 테니.”

에드윈이 루카스 앞에 섰지만, 루카스는 그를 주목하지도 않았다. 내내 회한에 빠진 채로 돌아가는 것만 되뇌는 채였다.

에드윈은 그런 루카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턱이 부서지고 입가에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루카스는 그 충격으로 멀리 날아간 채로도 신음 한 번 내질 않고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이제 루카스는 한 사람으로서 끝난 것이다.

“……이젠 됐다.”

고작 주먹 한 방으로 해결될 원한은 아니었지만, 에드윈은 껍데기만 붙들고 화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이것으로 끝내야 했다. 에드윈다운 생각이었다.

어차피 루카스는 영원한 감옥에 갇혔다. 그는 살아 있는 매 순간, 회한과 절망 속에서 잃어버린 걸 그리워하며 말라죽을 것이다. 결국 원작 디아나가 영원히 잃고 아파한 존재를 루카스도 똑같이 갖게 된 것이다.

“루카스 파렐은 여기서 죽었다.”

에드윈이 직접 사망 선고를 하고 돌아섰다. 아직 만날 사람이 더 있었다. 근위대장은 이미 돌아가는 판도를 예측한 듯, 담담하게 그들을 지하 감옥으로 인도했다.

트리샤를 감옥에 가둔 것도 그의 판단이었다. 충성을 바칠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황실에 충성하려고 한 것이다.

“에드, 나 혼자 가고 싶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 둘이 끝내야 할 이야기거든요.”

디아나가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잠깐이다.”

에드윈이 단서를 달았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거운 걸음으로 근위대장이 안내하는 지하 감옥으로 들어섰다. 죄인은 트리샤뿐이었고, 둘 사이엔 창살이 놓여 있을 뿐 공간이 좁았다. 트리샤에겐 이미 짙은 죽음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 그 생명이 곧 다할 것이다. 품어선 안 되는 힘을 탐한 대가였다.

“또 날 비웃으러 왔니?”

트리샤는 죽어 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스르륵 일어서 창가 바짝 다가온 트리샤가 디아나를 마주 봤다.

“아니면, 또 저주하려고?”

픽, 트리샤가 실소를 뱉었다.

“그게 아니면 동정해 줄 거야?”

“아니, 난 널 동정하지 않아.”

디아나가 선을 그었다.

“왜? 난 그냥…… 너처럼 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사실, 널 가장 사랑한 건 나야. 알고 있잖아? 디아나.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응?”

트리샤가 창살을 붙들며 디아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는 꺼져 가는 생명을 보여 주듯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난 원래 평범한 소녀였어. 항상 그랬어. 그냥 너처럼 되고 싶었어. 그게 나쁜 거야?”

“그걸 위해서 했던 행동이 나쁜 거야. 아직도…… 모르는구나.”

“모르는 건 너야!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 내 환경에선 그렇게 해서라도 극복해야 했다는 걸!”

디아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참회를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끝까지 무엇이 잘못이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네 일족은 몰살당했어. 나머지는 교황청의 이단 심문을 받게 될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너, 어차피 내가 죽는다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마의 흔적이 트리샤의 몸을 좀먹고 있었다. 얼기설기 핏줄이 푸르게 두드러졌고 안색이 창백했다.

“니콜라는 무사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누가 그런 머저리 따위 신경이나 쓴대?”

디아나가 긴 숨을 뱉었다. 그래, 너는 트리샤 블랑이다. 끝까지 그래야 한다. 지금 와서 참회를 구하는 게 더 나빴다. 적어도 트리샤는 마지막까지 악역으로 남는 것이다.

“트리샤.”

아마 교황청의 처분이 내려지기도 전에 트리샤는 이 지하에서 숨을 거둘 것 같았다. 디아나는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트리샤를 응시했다. 창살을 건너, 시선이 똑바로 맞닿았다. 그 옛날의 한때처럼, 어느 생 일부처럼…… 그리고 지금, 이 마지막 순간에.

“이제 작별이야.”

“시간을 돌이킬 수 있잖아. 지금은 아니더라도, 네가 살면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처럼 네 아이를 잃어도?”

트리샤의 도발이었다. 아마 트리샤는 내심 또 디아나가 시간을 되돌려 자신을 만나길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디아나에게 도발은 먹히지 않았다.

“응. ……무엇을 잃더라도, 되돌리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사람은 그럴 수 없어! 네 아이가 죽게 저주할 거야, 네가 시간을 거슬러 다시 날 만나러 올 수 있게!”

트리샤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창살을 흔들었다.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다니, 앙상한 팔을 보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그늘이 졌다.

“정말 마지막이야.”

디아나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길고 험했던 길이었다. 그러나 끝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녕, 트리샤 블랑.”

작별이었다. 동시에 마침표였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결국, 이뤄졌다. 그러니 더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디아나는 복잡한 감정을 이 지하 감옥에 두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디아나는 등을 돌렸다. 망설임 없는 단호한 동작이었다.

“기다려!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잖아!”

트리샤의 사나운 목소리가 디아나를 향해 울렸지만, 아무것도 마음에 닿는 건 없었다.

“널 저주한다니까! 난 마녀야, 두렵지 않아? 이제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잠시라도…… 잠시라도 여기 있어. 그럼 저주하지 않을게! 어서 돌아와!”

비명에 가까운 절박한 목소리였다.

“잠시면 돼, 난 곧 죽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여기에…… 내 곁에…….”

지하 감옥의 문이 닫혔다. 트리샤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디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던 에드윈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끝났어요.”

그 한마디에 너무도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담겼다. 에드윈은 그저 묵묵히 디아나의 손을 꾹 잡아 주었다.

남은 건 교황청의 이단 심문이었지만, 트리샤가 그때까지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단 심문의 처벌이 잔혹한 것을 생각하면 트리샤에겐 다행스러운 일일 테다.

“잘 견뎌 줘서 고맙다.”

에드윈이 아픈 기억을 지워 냈다.

“내게 오는 길까지…… 우리의 행복한 미래까지 와 줘서.”

드디어 과거가 끝났다. 에드윈의 말이 그걸 실감이 나게 해 줬다.

“정말로 고맙다.”

지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디아나는 더 소중하게 에드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디아나는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는 방법을 이제 깨달았다. 그저 이 순간을 소중히 품는 것, 그게 전부였다.

이제 그 책은 끝났다.

마지막의 마지막 마침표였다.

***

수도의 혼란은 계속됐다. 다행히 사망자는 적었고 부상자들은 활기차게 회복하는 중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날이 따스해지고 여름을 바라보는 찬란한 해가 뜰 때쯤 에드윈과 디아나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둘은 대공저에서 신혼을 보내는 중이었고, 처음으로 부부의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공작님, 제발!”

애꿎은 샬롯의 비명이 울렸다. 화살의 상처와 화상 때문에 침대 신세를 진 샬롯을 디아나가 직접 간호하겠다고 나서서 무척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몸이 부자유스러워서 말리지도 못하니 샬롯의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억울하면 어서 나아서 직접 말리지 그래?”

디아나가 곱게 눈을 흘겼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런 샬롯이 이렇게 기운 좋게 소리를 지르는 걸 들으니 마음이 좋았다.

“차라리 대공 전하와 시간을 보내세요!”

“싫어.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디아나가 괜히 샬롯의 옆에 상체를 기대고 누웠다. 그러니 꼭 모녀 같았다. 샬롯은 그게 쑥스러운지 안절부절못하는 내색이었다.

“샬롯도 마음대로 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할래.”

“……제가 졌어요. 졌다니까요.”

디아나는 그 하소연을 모른 체하고 그대로 잠시 몸을 누였다.

잃을 뻔했기에 더 소중한 순간이었다. 아마 샬롯은 당분간 이런 당혹스러움을 참아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그레이가 문병할 틈이 없어서 내심 아쉬워하고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는 디아나였다.

***

디아나는 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샬롯이 잠든 걸 확인하고서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대공저는 부상자의 처치를 도맡고 있어서 분주했고, 대공인 에드윈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무척 바빴다.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동쪽 땅까지 다녀온 에드윈에겐 가혹한 일정이었다.

“에드, 아직 남았어요?”

디아나가 밀크티를 손수 타서 조용히 집무실에 들어왔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보자마자 소리 없는 미소를 짓고 자연스레 팔을 뻗어 디아나의 허리를 감싼 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모든 일이 마침표만 찍는다고 끝나면 좋겠지만…….”

디아나는 에드윈의 무릎 위에 앉아 책상에 쌓인 서류와 다급한 서신을 봤다. 그의 말처럼 현실은 마침표 하나로 간단히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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