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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82화 (182/184)

182화

비의 기세는 날이 밝고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차츰 혼란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디아나가 눈을 떴을 때는 대공저의 익숙한 침실이었다.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곁에 있던 시녀가 얼른 달려가 디아나가 깨어났단 사실을 알렸다.

“샤…… 샬롯은?”

이제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안도할 사이도 없이 디아나는 가장 먼저 샬롯의 안부를 물었다.

“부상이 심하지만, 나을 수 있을 거래요.”

시녀의 말에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또륵 눈물을 흘렸다.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순간이란 이런 거였나 보다. 몇 번을 살면서도 몰랐던 감정을 또 하나 배웠다.

“공작님은 큰 부상이 없으시지만, 발 쪽에 약한 화상이 있어요. 그리고 머리카락이 좀 그을리셨어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머지 사람들은?”

“직접 만나 보시겠어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녀는 발을 다쳤으니 일어나지 말라고 만류하고선 몇 사람을 직접 침소로 데려왔다. 법도를 어기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차피 정상적 상황이 아니었다.

“그레이!”

반가운 얼굴을 보자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몇 군데 붕대를 감은 그레이는 자신만큼 거대한 목발을 짚고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라서 더 반가웠다.

“샬롯 부인은 무사합니다.”

그는 디아나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응, 들었어.”

두 사람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도가 찾아왔다. 그제야 디아나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알자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생겼다.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전하는?”

“전투는 중지됐고, 음…… 자네가 하게.”

말수가 워낙 적은 그레이는 딜런에게 설명을 떠넘겼다.

“전투는 우리 측이 압도적으로 이긴 것과 같습니다. 다만, 무익한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황군 측의 전투 중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철수해서 황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디아나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일선에 있던 기사의 증언으로는 돌연 벼락이 쳤고, 그 순간 황제가 있는 막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전투를 부추긴 건 트리샤 블랑입니다. 하지만 목격자에 따르면 황제가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서서 이 전투가 중지됐다고 들었습니다.”

“……루카스는 자아를 빼앗겼어. 그런데 어째서?”

적절한 때에 다니엘이 나타났다. 그는 딜런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 대공 전하와 제롬 경이 사명을 다한 것 같습니다.”

“동쪽 땅에서 그 힘의 근원을…… 파괴했다는 거야?”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디아나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흘렸다. 정말 그걸로 끝난 걸까. 막상 에드윈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진 믿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제롬 경의 전서구를 받았습니다.”

“그래?”

디아나의 얼굴에 단연 화색이 빛났다.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돌아오신답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제야 마음이 오롯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필요한 법이고, 지금은 더욱 그랬다.

“트리샤 블랑은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었어.”

디아나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딜런이 그에 동조했다. 곧 에드윈이 돌아오면 대공가와 공작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될 것이다. 전쟁을 바라지 않을 만큼 평화주의자인 디아나가 행여라도 자비심을 품을까 걱정스러웠다.

“내 결단은 분명해. 트리샤 블랑에게 있어서…… 관용은 없어.”

디아나가 또렷하게 말했다. 이 악연은 반드시 끝내야 했다. 그리고 트리샤는 이미 인간으로서 자격을 잃었다. 이제 디아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악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옳은 결단입니다.”

그레이가 묵묵히 덧붙였다. 모두의 생각도 같았다. 직접 전투에 참여한 사람과 대공저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봤던 사람들, 소문을 들었을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트리샤 한 명을 처단하고 끝낼 일은 아니었다.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

에드윈이 대공저에 도착한 것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다. 동행한 데클란이 반나절이나 늦은 걸 보면 더 확실했다.

그런 에드윈조차 무척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를 의지 하나로 주파한 것은 그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얼굴이며 거칠어진 손이 그 여정을 짐작하게 했다. 에드윈은 자신을 반기는 자들에게 겨우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물을 석 잔 연거푸 들이켜고 디아나가 있다는 침소로 향했다.

“에드!”

이미 소란스러워진 대공저의 분위기에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디아나가 먼저 외쳤다. 에드윈은 아무런 말 없이 다가와서 그런 디아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전서구를 통해서 그간의 일을 대충 보고받은 에드윈은 무사한 디아나의 모습을 보고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에드, 어서 와요.”

디아나가 에드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를 둘러싼 흙먼지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여정을 떠올리면 더욱 마음이 애틋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에드윈은 답이 없었다.

“에드?”

디아나가 자세히 살펴보자 에드윈은 디아나를 안은 채로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가혹한 여정은 이미 신체의 한계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고생했어요.”

디아나가 가만히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디아나는 한참을 에드윈의 단잠을 지켰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맞는 평온한 순간이었다.

***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데클란이 뒤늦게 도착했을 때 이미 황실로 떠날 사람들은 준비를 마친 후였다. 디아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모두 데클란과 증인을 설 피터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클란은 그 후, 살아남은 대공가의 병사들을 독려해서 촌락의 생존자도 같이 잡아 왔다. 그러나 모든 소식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제롬 경이.”

디아나가 말을 삼켰다. 울음이 나올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가 원했던 자리입니다. 평생…… 찾아 헤매던 곳이었죠.”

데클란이 고요히 말했다. 제롬은 어린 시절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수도사의 학살을 목격하고 그 품을 떠났다. 그리고 평생을 후회했다.

누구보다 아버지의 정의를 믿었어야 할 아들이 교황청에서 파문당하는 것을 방관했으며 눈으로 보기 전에 믿지 못했다. 믿음이란 그런 게 아닌데도.

“제롬은 아버지와 함께일 겁니다. 드디어 이유를 찾은 거지요.”

제롬의 유해는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웠다고 했다. 그 또한 제롬의 뜻이었다.

“우리는 제롬의 의지와 함께 온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걸 세상에 증명할 겁니다.”

디아나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그 곁에서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렇게 대공가의 행렬이 출발했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황실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소식을 들은 교황청에서도 교황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이 나서기로 했다. 드디어 심판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황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대공가의 일행을 맞아들였다. 그들 중에 무장한 기사들이 있었음에도 근위대장은 그것을 묵인했다.

너무 손쉬운 길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디아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근위대장이 안내한 알현실에 들어섰다. 그곳엔 루카스가 있었다. 혼자서, 옥좌에 앉은 채였다.

“폐하?”

디아나가 먼저 한 발짝을 뗐다. 루카스가 자아를 되찾은 건지 알고 싶었다.

“루카스 폐하, 디아나예요.”

그 이름에 반응하듯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녹안으로 디아나를 봤다. 텅 비어 있었던 때와 달리 그 녹안엔 감정이 넘쳐 났다.

“디아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루카스가 옥좌에서 일어서 디아나를 향해 다가온 것이다. 에드윈이 저지하려고 했지만,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의 손길을 막았다.

루카스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원작 디아나에게 서려 있었던 깊은 회한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던 루카스는 이내 휘청이다가 바닥에 쓰러진 후에도 무릎으로 기어서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미 황제가 아니었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은 알 수 있었다.

“디아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루카스가 디아나의 발목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건 뭐지? 그 무수한 생은…… 그 처참하고…….”

지금 흐느끼고 있는 건 황제가 아닌 절망에 사로잡힌 한 명의 사내에 불과했다.

“그건 환상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도 알고 있어. 그건 전부 실재했다.”

디아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황제가 주술에서 풀려난 부작용을 겪는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만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다.

“정신을 차린 순간, 무수한…… 무수한 기억이 쏟아졌다.”

루카스는 떠올려 버린 것이다. 아마 트리샤가 걸었던 금단의 주술이 풀리고 자아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여태 반복됐던 모든 회귀까지 함께 떠올린 것 같았다.

“난 끔찍한 짓을 했어. 그 아름다운 소녀는 어디로 갔지? 나의 소중한 아이는…… 그 아이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건가?”

루카스가 녹안을 들어 디아나를 보며 애원하듯 물었다.

“그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다시 돌이킬 수 없나? 내 목숨을 바쳐도 좋다. 디아나, 제발 알려 줘.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그들을…… 아니, 내 아이라도. ……그 아이는 실존했어. 그렇지?”

그건 원작 디아나의 생이었다. 그녀는 소중한 아이를 낳았지만, 트리샤의 손에 그 아이를 잃고 회귀를 택했다. 그러나 아무리 회귀해도 그 아이는 되찾을 수 없었다.

원작 디아나가 절망한 이유이자 지금의 디아나가 이 삶을 대신 살아가게 된 이유였다. 놀라운 것은 루카스에게도 그 기억과 감정이 있단 사실이었다.

“난 보고 있었다. 항상 보고만…… 있었어. 왜? 내 손이 있는데도…… 왜! 나는 황제였거늘.”

그건 루카스였되, 주술에 지배되는 루카스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영혼은 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그 영혼은 원작 디아나가 낳았던 아이를 사랑했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지만.

“제발, 말해 줘. 또 돌이킬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무수히, 무수히 반복했으니까…….”

디아나가 손을 뻗자 루카스는 구원이라도 얻은 것처럼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대는 할 수 있잖아. 그런 거지? 한 번만 더 돌려줘. 다시는 잃지 않겠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아…… 숨이 자꾸 막힌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잃어버린 채로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어, 디아나 제발.”

이제야 루카스도 깨달은 거다.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루카스.”

디아나는 폐하란 호칭 대신 루카스를 불렀다.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그 한 마디에 담겼다.

누구도 그 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에드윈조차, 디아나를 보호하고 서 있는 게 다였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기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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