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뛰어가는 샬롯에게 황실 쪽 병사가 접근하려는 순간, 다른 기사가 나서서 몸으로 그를 밀쳐냈다. 샬롯은 주위를 볼 겨를도 없이 디아나를 향해 뛰고만 있었다.
이제 몇 발자국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저 디아나를 향해 가야 한다는 본능만이 샬롯을 움직였다.
그 순간, 푹하고 샬롯의 몸에 화살이 박혔다. 어깨에 화살을 맞은 샬롯은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가도 금세 일어서서 디아나를 향했다.
‘안 돼…….’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쳤다. 다시 한 번, 화살이 샬롯의 허벅지에 맞았을 때는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지금 자신의 발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샬롯은 비틀거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도 디아나에게 오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보통의 부인인 샬롯이 화살을 맞고도 저리 똑바로 오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그러나 샬롯은 기어이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불길이 타오르고 있대도 그런 샬롯을 막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우리 아가씨, 많이 무서웠지요?”
디아나는 샬롯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계속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약을 바른 디아나는 몰라도 샬롯에게는 무척 뜨거울 것이다.
“이 샬롯이 왔으니 안심하세요.”
샬롯은 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세차게 고개를 젓던 디아나도 그 품에 안기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나쁜 것들이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군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을 밀어내고 싶어도 팔이 묶인 채였다.
“괜찮아요. 아가씨의 마음은 다 안답니다. ……하지만 용서하세요.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게 더 고통스러워서 그랬어요.”
언제부턴가 샬롯은 디아나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공작이 된 후로 부르지 않던 호칭이었다.
“평생 아가씨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화살이 꽂힌 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샬롯의 옷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샬롯의 미소는 여전히 온화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기사들이 와서 이 불을 끄고 저것들을 죽일 테니까요.”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디아나는 입의 마비를 풀려고 자꾸만 제 입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제야 효과가 드는지 다소 얼얼하지만 조금씩 입의 감각이 돌아왔다.
“……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게 다였다.
“가…….”
“아뇨. 전 여기서 아가씨와 함께 있을 거예요. 우리 편이 구해 주러 올 때까지요.”
“가아…….”
디아나가 안간힘을 써서 말해도 샬롯은 미소만 지었다.
“혼자 무서웠지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 샬롯이 아가씨를 지켜 줄 테니까.”
샬롯이 디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자신이 낳은 적은 없으나 언제부턴가 마음속에선 딸로 여겼다. 감히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불길에 빠진 자식을 품는 건 어미의 몫이다. 샬롯은 이 순간 디아나를 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곧 매캐한 연기가 덮쳤다. 디아나는 그제야 샬롯이 자신을 끌어안은 채 의식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샬롯의 몸 여기저기서 피가 나고 있었다. 디아나가 어깨를 비틀어 힘을 주며 샬롯을 깨우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샤…… 샤……!”
어째서 이런 순간에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는 건지. 불길에서 자신을 감싸려고 뛰어든 샬롯을 위해서 왜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는 건지. 샬롯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참혹했다. 실제로 승리는 대공가의 군사에게 기울고 있었지만, 디아나가 보기엔 그저 처참한 전쟁터였다.
‘만일, 회귀할 수 있었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러나 디아나는 제게 닿은 샬롯의 온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성유물을 쓸 수 없어서가 아니다. 디아나는 이생을 택한 것이다.
설령,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두 번 다시 에드윈의 얼굴을 볼 수 없대도. 그래도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생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인생.
그렇게 연기가 서서히 디아나를 덮쳐왔다. 샬롯이 그나마 감싸 주고 있었지만, 점차 디아나의 의식도 멀어져 갔다. 안전한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트리샤는 순간 제 실수를 깨닫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군사가 밀리고 있습니다.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디아나를 데려와!”
“무리입니다. 보십시오, 대공가와 카를가의 군사가 저기까지…….”
근위대장이 가리키는 곳에는 황급히 불을 끄고 두 여인을 구출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트리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이대로 저들이 역경을 이기고 돌아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트리샤가 바란 광경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목숨을 걸고라도 데려와! 병사 따윈 많잖아!”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벽에 궁수를 배치해서 다가가는 족족 활을 맞을 겁니다.”
“우리도 궁수가 있잖아!”
“그게…….”
트리샤는 전쟁이나 전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근위대장은 설명을 멈추고 남은 병사라도 회수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보기에도 이미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일부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보고만 있을 트리샤도 아니었다. 트리샤는 냉큼 루카스에게 다가가서 그 권위를 다시 한 번 보여 줬다.
“폐하께서 전군을 진격해서라도, 밤을 새워서라도, 몇을 죽여서라도 디아나 카를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야전은 더 불리합니다.”
“폐하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그 순간, 콰르릉……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다. 그러더니 투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리는 단비였다. 그 비가 트리샤가 지핀 불의 잔재를 끄고 있었다. 마치 이 형세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아서 트리샤의 얼굴이 구겨졌다.
“폐하의 명령이다!”
그러나 트리샤는 눈앞의 상황에 정신을 빼앗긴 탓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순간, 그것도 아주 찰나였다. 트리샤는 쿨럭, 피를 토했다.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폐하……!”
트리샤의 등을 찌른 건 루카스였다. 내내 앉아서 멍하니 있던 루카스는 벼락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눈의 초점을 찾았고, 반사적으로 황제가 차는 단검을 뽑아 트리샤를 찔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은 루카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폐하, 부디 정신을 차려 주십시오. 이 전쟁은 멈춰야만 합니다!”
“전쟁……이라니.”
드디어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모든 게 낯선 표정이었지만, 그의 의식이 있는 건 분명했다.
“지금 대공가와 카를가를 상대로 전투 중입니다. 이대로면 우리 병사를 다 잃을 겁니다. 부디 명령을 거둬 주십시오!”
“짐이…… 명령했다고?”
루카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근위대장을 보다가 앞에 쓰러진 트리샤를 봤다. 그러자 급격한 두통이 몰려왔다.
“짐은 그런 적…… 없어.”
“예.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근위대장은 서둘러 전쟁을 멈추기 위해 달려갔다. 루카스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그때, 등에 칼을 맞았던 트리샤가 루카스의 발목을 붙들었다.
“루카…… 나, 나야. 리샤…….”
칼에 찔린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벼락이 울리는 순간 트리샤는 자신 안의 강력한 힘이 역류하는 걸 느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루카…… 나, 아파. 지켜 줄 거지?”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끝이 아니란 거였다.
“약속했으니까, 지켜 줄 거지?”
찔린 상처에서 피가 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온몸에서 힘이 줄줄 새 나가는 느낌이 끔찍했다. 마치 트리샤의 생명력 자체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건 아무리 잡으려 해도 붙들리지 않았다. 트리샤는 몰랐지만, 그게 바로 트리샤가 마력을 쓸 때마다 니콜라가 느끼는 감각이었다. 당연하게도 곧 트리샤에게 발작이 찾아왔다.
금단의 주술이 어째서 금단이었는지, 트리샤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암전이 먼저였다. 트리샤는 재차 피를 토하고는 격한 발작과 함께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측근 근위병들이 자신의 임무를 상기했다. 벼락이 친 순간 그들도 자신의 의지를 찾았다. 그들에겐 단순한 의식의 지배만 걸었으니 루카스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짐은…… 짐은…… 모르겠다…….”
두통에 제 머리를 감싸 쥔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근위병들은 황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가마에 태우고 빠른 회궁을 지시했다.
남은 것은 전투의 종결이었다. 이대로면 대공가가 황군을 전부 죽이게 생겼다. 한번 승세를 잡았는데 전투를 물리려고 할지 근위대장으로선 근심이 컸다.
“전투의 중지를 요청하는 바이다! 다시 말한다! 전투는 중지다!”
상대의 분노는 컸다. 여기서 군을 물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본격적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역사상 없었던 비극이었다. 그건 무고한 백성들조차 전란에 휩쓸린다는 뜻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휘말려서 그 빛을 잃을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나간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지만, 근위대장도 한 명의 무장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같은 소리를 외치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전투는 중지한다!”
이미 사기를 잃은 황군은 속속들이 근위대장의 등 뒤로 피신했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자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공가와 공작가에 고한다! 이 전투는 중지다!”
근위대장이 소리 높여 말하자마자 어디선가 육중한 주먹이 날아와 그의 턱을 가격했다. 고개가 홱 돌아갈 정도로 무거운 일격이었다. 그 일격을 날린 자는 갑옷 여기저기에 화살이 박히고 얼굴에 피가 튄 백발의 노장이었다.
“좋소, 전투는 중지야.”
그가 검을 치켜들자 충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지는 말게.”
그레이의 눈동자가 무섭게 근위대장을 노려봤다.
“황실이 저지른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
위압적인 한마디를 남긴 그레이가 자신의 진영으로 등을 돌렸다. 진정한 전투의 종결이었다. 수도로 번지고 제국 전체를 집어삼킬 전쟁의 불길이 여기에서 꺼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것이 디아나의 의지였고, 끝까지 바랐던 소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디아나의 마음을 아는 건, 샬롯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밤이 저물었다. 비는 전투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날이 밝을 때까지 세차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