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80화 (180/184)

180화

딜런은 그레이의 눈빛을 본 순간 말릴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주저앉아서 울부짖던 샬롯은 이내 눈물을 닦고 그레이의 곁에 섰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한 것이다. 발루아 기사단장인 캘빈은 잠시 제 형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그 뒤에 섰다.

“발루아 기사단에 고한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다. 대공가에 남을 자는 남아서 더 버텨 주길 바란다.”

기사단장으로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캘빈의 마음이 무색하게 기사들이 하나둘, 캘빈의 뒤에 섰다. 아무도 말하진 않았지만, 북쪽 땅의 발루아 기사단의 긍지와 명예를 지키겠단 각오였다.

“여러분, 마음은 이해하지만…… 모두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발.”

“딜런 경의 호의는 감사하오. 하지만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맹세를 어긴다면 우리의 존재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캘빈의 말에 딜런은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딜런도 마찬가지였다. 피차 기사였기에 차마 기사도를 어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때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괴로운 법. 나는 이제 후회는 싫소.”

그레이가 말을 덧붙였다. 두 번이나 주군의 죽음에 손도 못 쓰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는 목숨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디아나를 위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니 딜런 경. 우리를 그냥 보내 주시오.”

딜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말릴 수도 없었지만, 뻔히 의미 없이 죽을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같은 기사로서 가슴이 에였다.

“미안합니다. 더 도울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딜런이 겨우 울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게 딜런 경의 역할이잖소. 부디 주군이 돌아오실 때까지 대공저를 잘 지켜 내시오.”

노장은 오히려 자신보다 젊은 딜런을 보고 격려를 건넸다.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다.

“대공 전하께 전해 주시오. 우리의 복수는 필요치 않지만, 공작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 저들을 모두 지옥에 몰아넣어 달라고.”

그레이는 몇 번이고 마주쳤던 에드윈이란 사내를 떠올렸다. 그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복수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모두 죽더라도 디아나를 살리는 길이었다. 디아나만 살아 있다면 약속대로 에드윈이 와서 어떻게든 구해 주리라. 그거면 됐다. 모두의 목숨을 써도 아깝지 않은 길이었다.

***

디아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나오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간교한 트리샤는 디아나에게 약을 먹여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눈으로 보이는 재갈이 아니었으니 성안의 사람들이 자신의 침묵을 오해하는 게 두려웠다.

‘이건 그냥 놀이야. 널 정말 해칠 생각은 없는 거 알지? 우린 친구잖아.’

트리샤는 그렇게 말하며 디아나에게 목소리를 빼앗고, 불에 타지 않는 약을 온몸에 정성껏 발라 주고는 같은 약에 담근 옷을 입혔다. 루카스의 혼이 나간 지금, 트리샤에게 유일한 장난감인 디아나를 불에 태울 생각 따위는 없는 것이다. 불행한 건, 트리샤를 그만큼 아는 사람이 디아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널 구하기 위해서 달려오다가 피를 쏟고 죽는 거……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증오는 한계를 넘자 얼음처럼 가슴을 차갑게 굳혔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고 온 마음을 다해 트리샤를 저주했다.

원작 디아나의 슬픔과 원한을 이해했단 건 자만이었다. 진짜 증오란 이런 거였고, 사무치는 원한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저며 나갔다.

그러나 디아나는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다. 성의 작은 문이 기어이 열리고 가장 먼저 그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막연히 알고 있던 답이었다. 그레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디아나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디아나를 사랑하고 아껴 준 죄로 너무도 뻔한 함정에 걸어 나와야 했다.

“카를가와 발루아 기사단은 투항하겠소.”

그레이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 증거를 보여라!”

근위대장의 외침에 오와 열을 이루고 있던 기사단원 전원과 그레이가 무기를 내려놨다. 철컥이는 쇠의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우선, 공작님을 풀어주시오.”

“감히 반역자가 요구하는 것인가! 대공가의 군사도 모두 투항하라, 이건 완전한 투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딜런의 피가 말랐다. 대공가를 지킬 의무가 있는 루모스 기사단은 여기에서 생명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맹세였다. 그 의무가 없었다면 딜런도 기꺼이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곁에 서고 싶었다.

“대공가와 협정은 끝났소.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그럼 죽여서라도 투항을 증명해라!”

“우린 성을 나온 순간부터 카를가의 독립적인 병력이오. 우리가 투항한다고 하지 않소!”

그레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그 모습을 본 디아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어차피 구실이었다. 둘 다 투항하든, 하지 않든, 트리샤는 그저 이런 꼴을 즐기는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투항에 응하지 않았다면 제풀에 지쳐서 불을 지르다가 질려 디아나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갔으련만, 그러기에 트리샤의 술수는 너무 영악했다.

“흐음…… 서로 죽이는 걸 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디아나의 뒤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위대장, 불을 붙여라! 폐하께서 명하셨다.”

“……예.”

디아나는 눈을 감았다. 근위병들이 나무 기둥 아래에 건초 더미를 가져온 후에 정말로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었다. 불길은 두렵지 않았다. 트리샤의 처치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멈추시오! 약속대로 우린 투항했소!”

“인정하지 않겠다! 화형을 집행한다. 또한, 저 돌무더기의 선을 넘어서 다가오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한다.”

나무 기둥의 앞쪽에 놓인 돌무더기를 기준으로 한다는 뜻이었다. 무기도 버렸는데 참으로 비열한 처사였다. 전쟁에 대비가 없던 황군이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은 탓이기도 했다.

“그럼, 디아나. 특등석에서 잘 관람하도록 해. 난 루카스 곁으로 돌아가서 같이 지켜볼게.”

트리샤가 디아나에게 속삭이고는 그대로 루카스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높은 곳에서 자세히 보려는 작정이었다. 일촉즉발의 사태에서 성벽에 서 있는 딜런은 일단 궁수를 배치했지만,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인질이 없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이 상황이 너무 나빴다.

그 순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샬롯이었다. 디아나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너무 야속했다. 일부러 혀까지 깨물어 가며 계속 고개를 내젓는 디아나가 입 모양으로 필사적인 제 마음을 전했다.

‘오지 마.’

그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갑옷 하나 두르지 않은 여인이었다.

‘제발.’

이 정도면 샬롯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디아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던 샬롯이었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눈치를 채면서, 오지 말라는 입 모양은 진작 알아들었으면서도, 왜 모른 체를 하는 건지 그런 샬롯이 너무 야속했다.

‘오지 마.’

디아나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입을 벙긋거렸지만, 샬롯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등을 보던 그레이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제군들. 우리는 지금 그 어떤 기사보다 용맹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당장 화살이 쏟아질지도 모르는데 샬롯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황군이 정한 돌무더기의 경계가 어딘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디아나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우리가 그 여인의 용기보다 못해서 되겠는가.”

발루아 기사단장인 캘빈의 조용한 말에 기사들이 하나둘 전진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샬롯을 앞질러 그녀를 감싸듯이 진을 이뤘다. 그레이는 가장 선봉에 섰다.

“다시 기사가 되더니, 날 에스코트해 주는 건가요.”

샬롯이 조용히 그의 커다란 등에 대고 물었다.

“그냥…… 동행이라고 하겠소.”

“무뚝뚝한 사람.”

샬롯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일정 선을 넘자 경고의 의미로 황군이 나팔을 울렸다. 그러나 오히려 기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기사들의 기세가 높아지자 지레 겁을 먹은 황군이 명령도 없이 활을 당겼다. 첫 번째 화살이었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동요해서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샬롯을 감싼 채로 최대한 화살을 막아 가며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불을 붙여, 당장!”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자 트리샤가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근위병이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건초 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은 건초를 삼키고 디아나의 발치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을 발랐대도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디아나는 눈앞의 광경에 온 정신을 빼앗겨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버티던 기사들이 쏟아지는 화살에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디아나를 향해 오는 무리는 적어지는데 속도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우리도 활을 쏴라. 저들을 엄호해!”

드디어 성벽 위에 서 있던 딜런이 결단을 내렸다. 하나의 화살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기사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마 에드윈이 있었어도 같은 결정을 내렸으리라.

“아니, 모두 나가 싸워라. 책임은 내가 진다! 성문을 열어라! 포격을 준비하고, 병사들은 나가서 저들을 지키고 황군을 죽여라!”

그 말에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던 기사들이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며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곧 성문을 나서는 보병들이 보였다. 아군이 섞이자 궁수들은 사격을 중지했다. 그런데도 황군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병사 따위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한번 군사가 충돌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금세 난장판이 됐다. 아무리 전쟁에 익숙지 않아도 상대는 황군이었다. 그레이 일행은 곧 경계를 넘어서 황군과 대치했다. 무기를 전부 버린 채였다.

“동행은 여기까지군.”

그레이가 말했다. 어느새 그레이의 몸에도 화살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여기까지 샬롯을 감싸고 오느라 낙오된 기사가 너무 많아서 이젠 서너 명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샬롯에게 호위는 필요 없었다. 그녀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우리가 가는 길은 결국 같은걸요.”

샬롯이 그레이에게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디아나를 향해 달려갔다. 제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달리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