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루카스를 장악한 순간부터 황실은 트리샤의 손에 굴러떨어졌다. 트리샤는 은쟁반 위에 놓인 과일을 음미하듯이 자신의 권력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취했다.
그럴 때마다 트리샤는 디아나를 불러와서 자신을 지켜보게 했는데, 어린 시절 이룰 수 없는 상상이 현실이 됐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루카, 여기 디아나가 있어. 기분이 어때?”
트리샤의 옥좌는 루카스의 무릎 위였다. 지고의 황제라는 자의 무릎에 앉아 그를 꼭두각시로 부리는 것은 트리샤의 야욕을 채워 줬다.
“아니면 그보다 내가 네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게 더 좋아?”
디아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이 괴로웠다. 트리샤의 오만 때문이 아니라 혼을 잃은 루카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황제였던, 그리고 일말의 반성을 품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루카스의 결말이 너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답하라고!”
트리샤가 거칠게 루카스를 흔들자 루카스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좋……아. 짐은 좋다…….”
“그렇지? 루카, 너는 날 평생 지켜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트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트리샤가 변덕을 부리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생각처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탓이었다.
대공저에 집결한 병력은 요새를 지키는 데만 열중했고, 황군은 쉽게 요새를 넘지 못했다. 방어만 하고 맞서질 않으니 전쟁도 아니었고 학살은 시작도 되지 못했다.
“디아나, 너희 가문에 루비가 있지? 나도 다 기억해. 공작저를 박살 내면 네 보물을 전부 가져올 거야.”
“공작저를 부수지 않아도 줄게.”
순순한 디아나의 답에 트리샤가 거칠게 은쟁반을 내팽개쳤다. 쨍그랑, 트리샤가 가진 권력의 상징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언제까지 고결한 척을 하려고? 나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려고 해.”
디아나는 두려워하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서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주는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게 트리샤의 눈엔 유독 거슬렸다. 마치 이런 것 따위 조금도 굴욕이 아니라는 듯이 고고한 디아나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땅을 기고 흙탕물을 마셨던 자신처럼 버둥대지 않는 게 보기 싫었다.
“넌 황후가 되어야 그림이 완성되는데, 내가 고문을 할 수도 없고. 참.”
가증스러운 붉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난 네가 항상 아름답길 바라. 그래야 날 더 빛내 줄 수 있잖아.”
비뚤어진 욕망. 그 욕망이 금단의 주술에 손을 대게 했고 트리샤는 그 광기와 자기 자신을 끝내 분리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면…… 기쁠 것 같아?”
디아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그야 당연하지. 추하게 애원하고 네 애인을 살려 달라고 빌어. 공작저의 사람들을, 이 수도의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위선적인 소리를 하다가 그저 네 인생만 편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될 때까지.”
“아니, 넌 이미 전부 잃었어.”
“내가 지금 옥좌 위에 앉아 있는 거 안 보이니?”
트리샤가 차갑게 실소했다.
“네가 앉아 있는 건 옥좌가 아니라 껍데기만 남은 루카스겠지.”
디아나의 푸른 눈은 진실을 꿰뚫었다. 트리샤는 늘 그게 싫었다.
“내가 필요했던 것도, 네가 루카스의 마음을 빼앗았단 걸 과시하고 싶어서였지. 네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네가 원했던 건 마음이었어.”
트리샤는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욕구였다.
“그게 뭐가 나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이미 모두가 사랑하잖아!”
“나쁘다고 한 적 없어. 이미 잃어버렸다고 한 거지.”
트리샤의 마음엔 공허한 점이 있어서 아무리 좋은 걸 얻어도 자꾸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디아나는 그런 트리샤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음을 얻고 싶었던 소녀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네가 얻을 루카스의 마음은 없어.”
“웃기지 마! 루카는 평생 날 지켜 줄 거야!”
“루카스의 껍데기가, 네가 부린 주술로 인해서겠지.”
디아나의 차분한 말이 화살처럼 트리샤의 가슴에 박혔다. 일부러 허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일순 여유를 잃을 정도로 아픈 일격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루카스의 기분을 맞추지 않아도 되고 편리했으니까. 하지만 디아나의 일침처럼 루카스는 껍데기만 남았다. 트리샤조차 이 정도가 될 줄은 모르고 궁지에 몰려 쓴 주술의 결과였다.
“아마 넌 그걸 되돌리는 방법을 모르는 거지?”
트리샤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건 기억 속의 삶이었다. 루카스와 남몰래 사랑을 나누고 디아나에게 그것을 과시하며 매일 어린아이 장난처럼 즐겁게 살아가는 꿈.
그러나 루카스는 기계 인형처럼 대답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이제 트리샤를 향해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수도 없는 꼭두각시가 된 거다.
사실 트리샤는 남이 모르는 곳에서 루카스를 흔들어도 보고 때려도 보고 다른 주술을 써 보기도 했다. 그거로도 부족해서 침대에서 루카스의 은밀한 부위를 애무하며 유혹도 해 봤다. 하지만 무엇도 루카스를 깨우지 못했다. 그제야 트리샤는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네게 무릎을 꿇어도 똑같아. 내 마음은 여기에 없어.”
트리샤의 분노가 디아나를 향했다. 따지고 보면 디아나가 자신을 몰아세워서 이렇게까지 된 거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역시 넌 똑똑하네.”
비틀린 입가에서 더욱 비틀린 목소리가 나왔다.
“마음은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건 얻을 수 있어.”
트리샤가 루카스의 무릎에서 일어섰다. 갈 곳을 잃은 욕망이 가리키는 곳은 명확했다.
트리샤를 잠식하고 있는 사악한 힘이 피를 원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피를 보고 나면 디아나의 마음도 산산이 부서질 테다. 어차피 가질 수 없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을 얻지 못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그건 디아나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좋아, 너에게도 내 세계를 알려 줄 때가 됐지.”
트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루카스를 사이에 두고 농락할 수 없다면 이제는 디아나가 절망을 느낄 차례였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바로 앞까지 가서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루카스의 무릎으로 돌아가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어때, 루카. 좋은 생각이지?”
“짐……은 좋다.”
끔찍한 인형 놀이였다.
“들었지? 루카도 좋대. 디아나, 우리 같이 놀러 갈 시간이야.”
트리샤의 손짓에 마찬가지로 영혼을 잃은 근위병들이 다가왔다. 디아나는 막연히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황군이 대공저를 공격한 지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트리샤는 결판을 보려는 것이다.
***
해가 저물고 있음에도 황제의 행렬이 너무도 사치스러워 사방이 번쩍였다. 대공가의 근처까지 황실의 마차를 타고 간 일행은 그 자리에서 위세 좋게 황제의 휘장을 올리고 옥좌를 마련했다.
함께 데려온 군악대가 나팔을 불어서 그 도착을 알렸다. 그러자 대공가를 공격하던 황군이 잠시 물러났다. 물론, 이 수상한 등장에 대공가의 모두가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반역자들은 들어라!”
근위대장이 큰 소리로 외치자 루카스에게 꼭 달라붙은 트리샤가 흥미로 눈동자를 빛냈다. 성벽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디아나의 모습을 찾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역모의 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농성에 들어간 체스터 대공가와 카를 공작가의 작태는 이미 관대함의 영역을 벗어났다. 또한, 그러한 반역자를 좌시하는 것은 황실의 본분이 아닌 바!”
다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나무 기둥을 하나 세우고 머리에 자루를 쓴 사람을 기둥에 묶었다.
그 순간, 성벽에서 지켜보던 그레이가 탄식을 흘렸다. 아무리 가려도 자신이 길렀던 디아나를 모를 수 없었다.
아예 근위병이 자루를 벗기자 하얀색의 홑옷 하나만 걸친 디아나의 백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제야 대공가 여기저기서 탄식이 퍼졌다.
“당장 투항하고 성문을 열지 않으면 디아나 카를을 역모의 혐의로 여기서 화형에 처하겠다!”
화형은 이미 자취를 감춘 종교 재판의 유물이었다. 아무리 역모라 해도 고위 귀족을 화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따지는 것조차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러는 중,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30분 후, 다시 북을 울리면 그땐 화형의 시작이다. 카를가는 주군을 지키고 싶다면 당장 대공가의 군사를 죽이고 투항해라! 다시 한 번 말한다. 다음에 북을 칠 때는 화형을 시작한다!”
근위대장은 할 말을 끝내고 물러섰다. 황제의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기둥에 묶인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감히 두려워 백성들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지만, 너무 잔혹한 처사였다.
“안 돼요…….”
성벽에 선 기사들이 모두 말을 잃은 사이, 샬롯의 흐느낌이 들렸다.
“이럴 거면 전쟁을 시작해요! 우리의 본분이 뭐죠? 공작님을 지켜야 한다고요!”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무엇을 위한 군사죠? 대공 전하도 이걸 바라실까요? 공작님을 잃으면 전부 잃는 거라고요! 그레이, 당신은 알잖아요. 뭐든 해 봐요, 어서. 성문을 열든, 전쟁을 시작하든, 뭐든 해 보라고요!”
그레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마음도 이미 샬롯처럼 절규하고 있었다. 기사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린 디아나를 길러 낸 것은 샬롯과 그레이였고, 감히 딸처럼 여기는 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삶의 의지를 잃었을 때 목숨을 이어 간 이유였고, 다시 검을 잡은 이유기도 했다.
“그레이 경, 안 됩니다. 이건 도발이에요.”
딜런이 다급하게 그레이에게 외쳤다. 하지만 지금 묶인 것이 디아나가 아니라 에드윈이었다면 딜런도 냉정을 잃었을 것이다. 가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를 갈라놓고 섬멸하려는 계략입니다. 둘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이 없단 뜻이에요. 그레이 경, 잠시…….”
딜런은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음 말을 잊고 말았다. 아무 말이 없는 참담한 눈동자는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저며 내는 것 같았다. 단지 주군을 향한 충성을 넘어서 그 무엇보다 아프다는 자식을 잃는 마음이었다.
“안타깝지만 우리 협정은 여기까지요.”
기어이 그 말이 나왔다.
“그러나 서로 피를 보지는 맙시다. 그건 공작님이 원하지 않으실 테니. 그저 날 내보내 주시오. 내가 투항하겠소.”
“죽으러 가는 겁니다! 함정이라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정이든 무익한 희생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디아나의 모습을 보는 채로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게 설령 죽음으로 향하는 걸음이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