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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8화 (178/184)

178화

에드윈의 재촉하는 눈빛에 겨우 목만 축인 제롬이 말을 이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피터입니다. 그는 촌락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해서…… 그와 있으니 촌락에 접근할 수 있었어요. 아마 출입을 허가하는 뭔가가 이 남자의 몸에 남은 거겠죠.”

제롬은 끝내 붉은 일족이 사는 촌락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늘 안개에 싸여서 같은 곳을 맴돌던 것과 달리 피터와 함께 있으니 정상적인 길처럼 촌락에 접근할 수 있었다.

“촌락도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엿듣기로는 누군가 ‘금단의 주술’을 썼다는데 아마 트리샤 블랑이겠죠? 도대체 그걸 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른다.”

에드윈이 참담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 직전에 여기로 출발했다. 중간에 데클란이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지만, 나는…… 디아나의 뜻을 따라 멈출 수 없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롬은 드물게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두려움을 이기고 있는 것은 아마 그의 강력한 의지일 것이다.

“내 군사들은?”

제롬이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저와 피터, 그리고 전하의 군사들은 밤을 틈타 촌락을 야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점에서 촌락도 정상이 아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독기가 너무 강했어요. 그때,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이 어떤 돌을 둘러싸고 손을 잡은 채 원을 그리고…… 뭔가를 했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경험인지 제롬이 얼굴을 찡그렸다.

“병사들 대부분이 그때 환각에 시달리며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촌락 남자들의 화살에 맞았는데 거기 독이 있던 건지…….”

“시간이 없다. 중요한 이야기만 하도록.”

“전 소란을 틈타서 그 마녀들이…… 둘러싼 물체가 뭔지 봤습니다. 그건 돌이었어요.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돌입니다.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고 그 균열마다 검붉은 액체가 굳은 것처럼…… 너무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힘의 근원인가?”

“제 조사대로라면, 예. 피터에게 물으니 그들은 그 돌이 하늘에서 내려온 조각이라더군요. 그들은 그 돌을 숭상하는 것 같습니다.”

이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에드윈이 시선으로 제롬을 재촉했다.

“독기도 거기서 나오는 거였어요. 보기만 해도 숨을 쉬기 어려웠고, 그 마녀들도 돌에는 절대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파괴하면 끝나는 건가?”

“아마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당장 가지. 그까짓 마녀들이라면 몇이라도 내가 죽여 주겠다.”

에드윈이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제롬이 에드윈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뇨…… 마녀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롬의 금빛 눈동자에 공포가 다시 어렸다.

“마녀들은 발작을 일으키며 미쳐 있어요. 제 살을 쥐어뜯고, 촌락을 이탈하는 자도 있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당한 우리 병사들처럼…… 그들은 금단의 주술 때문에 재앙이 일어났다고 외치며 공황 상태입니다.”

“그럼 더 손쉽겠군.”

그때 데클란이 에드윈과 제롬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마 제롬 경이 혼자 해내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끔찍한 기억을 애써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금단의 주술이 부활했다! 재앙이야, 재앙이 온다…….’

‘오, 붉은 돌이여. 하늘의 조각이여! 우리의 피를 바칠 테니 부디 일족을 용서하소서!’

제롬은 지옥도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 돌의 균열이 붉게 빛나기 시작하고 마녀들이 남자들부터 차례로 목을 베어서 그 피를 돌에 먹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악마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자꾸 피가 필요하다고.”

“사악한 것들.”

“그러다 남자들이 떨어지자 어린애들을, 그러고 나자 막무가내로 아무나 잡아서…… 마치 그 돌에 피를 먹이는 걸 멈추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늙은이가 계속해서 피를 먹이라고 명령하고 있었어요. 그 돌이 만족할 때까지 피를 먹여야 일족이 용서받는다며…….”

기괴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트리샤는 이 촌락에서 자라지 않았으니 그들의 사정은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힘의 근원인 돌을 파괴하는 방법이었다. 그 파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부수는 것? 중심을 꿰뚫는 것? 아니면 파편이 모래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끝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 하필 코앞에서 이런 문제가 나올 줄이야.

“도대체 어떻게 파괴하라는 거지?”

제롬이 에드윈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제가 방법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모두 흩어지는 바람에 쫓겨서 여기까지 왔지요.”

“그럼, 우리와 함께 가면 제롬 그대가 그 근원인 돌을 파괴할 수 있나?”

“네. 할 수 있습니다.”

방법까지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제롬은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깊이 파고든 자였고, 누구보다 그 근원을 파괴하고 싶어 했다. 에드윈은 그것을 믿고 먼저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지금도 디아나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에드윈이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방해자를 베겠다. 제롬 그대는 그대의 일을 하라.”

“예. 그리고…… 데클란은 여기 남아 피터를 지켜 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데클란의 항의에 제롬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증인이다. 그것도 온전히 정신을 되찾은 증인. 데클란, 우리의 일은 일족을 절멸시키는 게 아니라 교황청에 정식 이단 심문을 요청하고 그분의 명예와 이름을 되찾는 일이야. 잊지 않았겠지?”

“……네.”

“그저, 우리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다.”

데클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여기저기 다친 몸으로 일어서서 에드윈과 숲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은 그 미쳐 버린 촌락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해서 흡사 지옥도 같았다. 마찬가지로 미쳐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제롬이 에드윈을 살짝 치고 눈짓으로 그 돌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유난히 피가 낭자한 곳이라서 쉬이 찾을 수 있었다.

“이제…… 피가 충분해졌나 봅니다.”

제롬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아까보다 사람은 줄었지만요.”

그 사이에도 피를 먹인 것이리라.

“나는 그대를 방해하는 자들을 막는 역할이지?”

“예. 그리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을 살려 두시길 바랍니다.”

“교황청에 넘기기 위해서?”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불행을 영원히 막기 위해서입니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에드윈은 제국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검술을 구사하는 검사였다. 그라면 제롬도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었다.

“근원을 파괴할 방법은 확실한가?”

“예.”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듣지.”

제롬이 힘없는 미소를 싱긋 지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살며시 비췄다.

“셋을 세면 돌입한다.”

“예.”

에드윈이 손가락을 펼쳤다. 셋, 둘, 하나. 손가락이 모두 접히자 에드윈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촌락의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사악한 것들, 나 에드윈 체스터가 너희 일족의 끝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으니 내 검을 받아라.”

제롬은 그 틈을 타서 근원의 돌로 향했다. 촌락에 남은 사람들은 일제히 에드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침입자다! 재앙의 악마가 왔다!”

에드윈은 우선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자의 다리를 베고 칼등으로 머리를 가격해서 기절시켰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노파는 에드윈을 향해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외고 있었지만, 신속이라 불리는 그의 검이 더 빠르게 그녀를 기절시켰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주술은 본래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야 그 효과가 컸다. 그들에게 지금 갑자기 나타난 에드윈이라는 적을 상대하기엔 무척 불리한 요소였다. 그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픽픽 에드윈의 검에 쓰러져갔다.

“겨우 이게 단가.”

에드윈은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자신의 병사들이 있는 것을 보고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등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육감이 발달하지 않은 그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독살스러운 기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돌아보자 나무 풀숲에 몸을 숨긴 작은 노파가 무언가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독입니다!”

순간, 제롬의 외침이 들렸다. 에드윈은 자신이 쓰러트린 자의 활을 빼앗아 노파를 향해 쐈다. 노파는 화살을 맞고도 붉은 눈동자로 에드윈을 노려봤다.

“금단의 주술이 풀리고…… 재앙이 온다…….”

원통함이 사무치는 목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강한 별을 타고난 자가 와서…… 일족을…… 우리…….”

그러나 노파의 생명은 거기까지였다. 노파가 푹, 고개를 떨구고 숨을 거두는 것을 확인한 에드윈은 그제야 제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원의 돌에서 흘러온 피와 풍기는 독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여기는 끝났다. 내가 도울 일은…….”

제롬은 돌의 코앞에 서 있었다. 독기가 상당히 강할 텐데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젓고 더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한 제롬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묻어났다. 제롬은 천천히 돌에 쌓인 시체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제롬, 나도 뭔가.”

“아뇨.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느낌이 이상했다.

“드디어…… 저의 모든 이유를 찾았습니다.”

다음 순간, 제롬이 자신의 가슴을 푹하고 칼로 찔렀다. 에드윈이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고 말리기엔 더욱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의 손길엔 망설임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제롬이 그대로 돌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그의 피가 새로 돌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입니다…….”

에드윈이 다가오려고 하자 제롬이 애써 말을 이었다.

“제롬, 도대체 무슨 짓을…… 아니, 됐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라.”

“전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밝은 별의 인도와 강한 별의 동행이 필요했……습니다.”

제롬의 피가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균열을 메웠다. 검붉은 색으로 음습하게 빛나던 균열에서 점차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독기가 옅어졌다.

제롬의 피가 흘러 바위를 적실수록 사악한 빛이 꺼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 근원의 돌에 흐르는 피는 평범한 한 남자의 피였다. 그리고 처음의 한 방울이 바위의 균열을 타고 땅에 톡, 닿는 순간…… 모든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제롬!”

에드윈은 독기가 사라진 것을 느끼고 제롬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제롬의 출혈이 상당해서 이미 살려 낼 가망이 없었다. 제롬은 고요하고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로 에드윈을 바라봤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근원의 돌에 바쳐야 하는 건…… 무조건 일족의 피여야…… 했…….”

쿨럭, 제롬이 피를 토했다. 그건 하나의 가능성이었지만, 제롬은 자신의 판단력을 믿었고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수였다. 그리고 그 수가 통했다. 지금 제롬이 평온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였다.

“제 아버지의…… 이름은…… 드리우스…….”

“그래. 내가 반드시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겠다. 약속한다.”

“저는…… 그분의 아들…… 데안으로 죽겠습니다.”

제롬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 제롬 하이든이었던 남자는 목숨을 바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그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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