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트리샤는 디아나를 본래의 처소에 가뒀다. 루카스의 영혼을 빼앗았어도 여전히 디아나를 황후로 만들고 자신이 바라는 셋의 그림을 그리겠단 의지였다. 마지막까지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게 트리샤다웠다.
“공작님, 어디 다치신 데는…….”
디아나는 시녀였던 엠마와 함께 감금됐다. 그 또한, 트리샤가 디아나를 차기 황후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엠마. 내가 했던 부탁은 어떻게 됐어?”
“확실히 전달했습니다. 그분은 무사히 나가셨어요. 그 직후, 황궁의 출입이 막혔죠.”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큼은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트리샤가 황궁부터 고립시키려는 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사제 하나가 빠져나갈 틈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공작님,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해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엠마가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디아나도 답을 주고 싶었지만, 이젠 앞일을 조금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에드윈을 떠나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필 그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불안했던 마음이 오히려 바보 같았다. 에드윈이 있었어도 이렇게 사악한 힘은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라도 이곳을 떠나서 화를 면하는 게 나았다.
“난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하려고 해.”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자신의 사람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저의 식구들과 발루아 기사단, 대공저의 사람들, 자신을 대신해서 궁을 빠져나간 다니엘, 그리고 동쪽 땅으로 떠난 에드윈과 다른 이들까지.
“만일 신의 자비가 있다면…… 그들이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길.”
디아나가 천천히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고한 학살이 일어나지 않기를.”
운명이 가혹하다는 것은 이미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건 디아나의 운명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다른 이들까지 역모로 몰려 서로 무의미한 칼을 겨누다가 죽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로 인해 디아나가 평생 황궁에 갇혀서 시든 꽃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해도.
적어도 디아나는 제 사람들을 얻었고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바라건대, 에드윈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
바로 다음 날, 황실이 군사를 일으켰다. 목표는 대공가와 공작가였다. 무소불위로 무력을 휘두르는 황제 앞에선 암막의 정치 공작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 외척 세력은 모두 근위병의 위세에 갇혔고 제국은 공포로 물들어 아무도 황제를 비판할 수 없었다. 백 년이 넘는 평화를 이어 왔던 수도의 사람들은 칼을 든 군사들을 보고 공포가 몰려오는 것을 직감했다.
가장 비장한 곳은 역시 대공저였다. 공작저는 과감하게 저택을 버리고 모두 대공가로 이동해 힘을 보탰다. 황실로선 표적이 좁혀지는 일이었다. 전술로선 불리했지만,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대공 전하와 공작님의 선견지명으로 우리의 병력은 황실과 붙어도 밀릴 수준이 아닙니다.”
딜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에드윈이 동쪽으로 가면서 측근인 딜런을 일부러 남겨 둔 이유가 바로 이런 비상사태였다.
“대공령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는 것도 시간문제. 그건 카를가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발루아 기사단의 수장인 캘빈과 곁에 선 그레이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상대는 황실이었지만, 대공가와 공작가가 힘을 합치면 비등한 수준이었다.
아니, 오히려 북쪽에서 칼을 갈았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 수도의 황군은 금세 수세에 몰릴 것이다.
“카를가와 발루아 기사단도 전시 체제를 유지한 지 오래됐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가문 모두 명령을 내릴 주군이 계시지 않는 치명적인 상황이지.”
그레이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선공하고 황궁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빠를 수도 있소.”
에드윈은 단지 동쪽으로 떠났을 뿐이지만, 디아나는 황실에 억류된 상태였다. 자연히 카를가와 발루아 기사단은 더 절박한 상황이었다.
“여러분, 그전에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다니엘이 다급하게 나섰다. 그는 디아나의 전언을 전할 의무가 있었다.
“공작님이 제게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제야 모두 다니엘을 바라봤다.
“공작님께서는 무고한 희생이 있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전쟁을 막아야만 한다고…… 그리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황군이 먼저 전쟁, 아니 반역을 선포하고 진을 쳤다.”
이번엔 딜런이 딱 잘랐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와 기사단장의 처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께선 대공 전하를 믿고 계십니다. 데클란과 전하는 초를 다투며 달려가셨으니 곧 동쪽 땅에 도착하실 겁니다. 공작님께선 최소한 그때까지만이라도…… 전쟁을 막아 달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그때 디아나가 내린 결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장 자신의 처지가 가장 위급한데도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다니엘을 내보내는 판단력은 진정 군주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줬다. 결코, 그 뜻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공작님은 그걸 위해 도망치지 않으신 겁니다. 자처해서 황궁에 남아 사태를 지켜보겠다고…… 그렇게까지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하셨습니다. 진정, 전하께서 답을 찾아낼 때까지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실 수는 없습니까?”
다니엘이 강력히 호소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 전쟁을 벌여서 이긴다고 해도…… 전하와 공작님이 돌아오신다고 해도, 잃어버린 목숨과 희생된 이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란으로 짓밟힌 수도가 남겨지면, 그래도 우리가 이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절절한 호소였다. 각 기사단장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다니엘을 통해 전한 디아나의 뜻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카를가와 발루아 기사단은 공작님의 무사 귀환이 우선 목표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니엘 사제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수도가 전란에 휩싸이는 것도 문제지만, 만일 우리가 선공하거나 전시가 시작되면 황궁에 있는 공작님께 해가 될까 걱정입니다.”
그건 모두의 우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전하께서 남겨 두신 최정예가 몇 명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쓰라고 두신 것인데.”
딜런이 말을 꺼냈다. 보통 기사단의 기밀을 누설하는 일은 절대 안 될 말이었지만, 지금은 아군이었다. 에드윈이었어도 같은 결정을 내렸으리라.
“그들을 남모르게 황궁에 잠입시켜서 공작님의 안전을 확보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지금 황궁에서는 우리에게 신경이 쏠렸을 테고, 그들은 유능한 자객입니다.”
“흐음…….”
그레이가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카를엔 없는 자객이었다.
“당장이라도 파견하겠습니다.”
“이 상황에선 하나라도 희망을 늘리는 게 낫겠지. 부탁하겠소.”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고 곁에 선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황군이 몰려와서 진을 친 건……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군요.”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랐다. 주군이 없는 지금, 딜런이 판단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다니엘 사제, 며칠만 버텨 주면 된다고 했나?”
발루아 단장인 캘빈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잠시 캘빈과 그레이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며칠이라면…… 수성전이 가능하겠소?”
“수성전이라면.”
“대공저는 수도에서 유일하게 요새로 건축된 곳, 그저 성을 지키기만 하는 거라면 전쟁을 미룰 수도 있소. 그래 봐야 며칠이겠지만.”
“황군의 진입만 막고, 방어하자는…… 뜻입니까?”
딜런의 질문에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군이 진을 친 건 맞지만, 대공저에 침략하진 못했다.
전쟁에선 성을 수비하고 있는 쪽이 더 유리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랬다. 나름 요새의 시설을 갖춘 대공가를 치고 들어오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전쟁이 사라진 이 수도에서 당장 공성 무기는 없을 거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걸 조달하려면 며칠이 걸릴 테고, 그때까진 버틸 수 있겠지.”
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가장 적절한 합의점이었다.
“그럼, 우리는 아군으로서 대공저를 지키도록 합시다. 대공가와 공작가 모두 이 싸움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면서요.”
딜런이 악수를 청했다. 그레이는 그 손을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대공저는 그 순간부터 임전 태세를 갖춘 채로 방어에 돌입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쪽으로 떠난 에드윈의 행보에 달렸다.
***
대공가의 위세는 제국의 모든 땅에 퍼져 있었다. 덕분에 말이 기절할 정도로 몰아 대고도 적절한 곳에서 말을 바꿔 탈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린 탓에 데클란도 기절할 정도였지만, 그나마 정신력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에드윈이 밀어붙인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데클란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간 내에 동쪽 땅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제롬 경을 어떻게 찾지?”
에드윈은 말을 멈추자마자 물었다. 그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전하, 그것은…….”
“시간이 없다. 경칭도 예도 생략해라.”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데클란을 주시했다. 그때 데클란은 알 수 있었다.
에드윈은 전부 알고 있었다. 데클란이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잠시 말을 멈췄을 때, 에드윈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데클란은 말을 얼버무렸고, 그 순간 그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당장 디아나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 에드윈은 내내 말을 혹사하며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 선택이 아팠던 만큼, 동쪽 땅에 빨리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한 신호가 있습니다. 저기 연기가 보이는군요.”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으로 말을 달렸다. 이제 고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데클란처럼 육감이 발달하지 않은 에드윈도 피부가 욱신거릴 정도로 독한 공기가 느껴졌다. 제롬이 맞는 장소를 찾아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에드윈과 데클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숲속으로 발을 들였다. 데클란은 기묘한 휘파람을 불며 제롬을 불렀지만, 좀처럼 응답이 오지 않아 초조한 기색이었다.
“잠깐.”
그때, 에드윈이 풀숲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 그곳엔 두 남자가 엉망인 꼴로 엎드려 있었다. 한 명은 제롬이었고, 한 명은 제롬이 확보한 증인인 것 같았다.
“제롬, 정신 차려라.”
에드윈이 제롬의 상체를 일으켜 마구 흔들었다. 그래도 깨지 않자 강하게 따귀를 때렸다. 두 대쯤 때렸을 때 제롬이 겨우 눈을 떴다. 데클란은 서둘러 제롬에게 물을 먹이고 옆의 남자를 도왔다.
“역시, 저 혼자서는…… 무리였나 봅니다.”
목을 축인 제롬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의 눈빛에 총명함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드디어 동쪽 땅에서 필요한 사람이 모두 모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