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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6화 (176/184)

176화

재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엠마가 떠나고 얼마 후, 황실 근위대가 와서 디아나를 구속했다. 알현실로 끌려가는 길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곧 구속당한 디아나가 알현실에 덜렁 놓였다.

디아나는 붉은 카펫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옥좌엔 텅 빈 녹안의 루카스가 앉아 있었고,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트리샤가 감히 그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서 와.”

트리샤가 디아나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디아나는 분노를 담아 그런 트리샤를 노려봤다.

“이젠 폐하께 예도 갖추지 않는 거야?”

“이건…… 폐하가 아니야. 여기엔 폐하가 없어.”

마녀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루카스의 육신뿐이었다. 그마저도 트리샤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다. 디아나는 그 영락한 루카스의 모습을 보며 참담함을 삼켰다.

그래도 그는 노력했다. 적어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트리샤는 그런 사람의 영혼을 아예 빼앗고 자신의 꼭두각시 따위로 전락시킨 것이다.

“무슨 소리야, 폐하는 이제부터 늘 여기 계실 거야. 나와, 너와 함께.”

트리샤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루카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루카?”

“……응, 그래.”

넋이 나간 채로 대답하는 루카스를 보며 디아나는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루카스가 나쁜 사람이었대도 저렇게 유린당하는 걸 보고 있자 분노가 치밀었다.

“뭐, 우리 사이에 긴 이야기는 필요치 않겠지.”

트리샤가 툭 내뱉었다. 이제 디아나는 손을 묶인 채로 자신의 눈 아래에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제국의 권능을 상징하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무릎 위에 앉은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어. 너무 긴 길을 돌아온 기분이 들어. 어차피 루카는 바보였으니까…….”

트리샤가 가증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친구였는데, 친구라고 했으면서, 디아나가 나타나자 바로 자신을 내친 루카스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트리샤가 원한 것은 늘 자신만 바라보는 루카스였으니까.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하지만 그게 폐하의 영혼을 빼앗아 갔다는 건 알겠어.”

“역시 넌 똑똑해. 그럼 이제 어떻게 될지도 잘 알겠네?”

디아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희생은 디아나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졌어.”

디아나가 담담하게 인정했다. 승패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디아나에겐 더 큰 희생을 막을 의무가 있었다.

“그건 정답이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난 널 버릴 생각이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그래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셋이서 살아가도.”

키득, 트리샤가 진지한 얼굴을 한 디아나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혹시 내가 다른 사람들은 살려 줄까 봐? 안 돼,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디아나는 참담함에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폐하의 칙령으로 재상이 지금 대공가를 향한 전쟁을 선포할 거야. 죄명은 당연히 반역이 좋겠지?”

“원하는 건 다 가졌잖아. 황실에서 셋이 살아가면 되는 거 아냐?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 둬! 전쟁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다 예전의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야.”

“우리처럼……?”

트리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더 좋겠네. 내 인생은 항상 지옥 같았거든. 세상 사람들도 그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날 끌어당기는 저 밑바닥의 늪…… 그게 어떤 건지 말이야.”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오만하게 빛났다. 원작에서 트리샤는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러나 상대인 디아나가 성장했고, 필연적으로 트리샤도 그렇게 돼 버렸다.

어쩌면 디아나가 원작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 낸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후회는 늦었지만.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너에게도 이해할 때까지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트리샤의 눈에 담긴 것은 광기였다. 열등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들을 제치고서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힘이었다. 사악한 힘을 쓰면서 그녀 자신도 점차 물들어 가고 있었다.

“트리샤. 넌 이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디아나가 진심을 담아 트리샤를 봤다.

“아까 말했듯이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게 사악한 힘을 빌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게 강한 힘을 썼는데, 네게도 영향이 있을 거야. 내겐 그게 보여.”

디아나는 감정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애써 자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때는 무척 증오했던, 그러나 또 다른 때엔 동정을 품었던 그 트리샤였다.

“사악한 힘에 너까지 삼켜지는 걸 원해? 이러다가 너 자신도 잃고 말 거야.”

트리샤가 잠시 물끄러미 디아나를 바라봤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지금은…… 그래.”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신랄한 실소였다.

“미안한데, 이제 우리 위치는 바뀌었어. 앞으로는 내가 널 동정할 거야, 디아나.”

트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트리샤이자 트리샤가 아닌 자였다.

“그리고 난 지금이 너무 좋은걸. 이제 세상이 전부 다 보이는 것 같아. 아마 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걸지도 몰라. 이젠 너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거지.”

“그래, 인정할게. 그러니 무고한 학살은…….”

“시끄러워!”

트리샤가 앙칼진 소리를 질렀다. 디아나는 이 와중에도 눈만 깜박이는 루카스를 보며 점점 더 암담함을 느꼈다.

“이건 금단의 주술이야. 그런데 막상 써 보니까, 왜 금단이었는지 알겠어.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성공했어. 그건 나도 그만큼 강하다는 거야. 특별하고, 선택받은 존재라는 거지.”

트리샤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 채였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우면서, 처참해 보였다.

“이제 나는 다 알아. 이 세상의 원리도…… 비밀이나, 마법. 그리고 우리 기억에 대한 비밀도.”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항상 의문이었어. 내게 떠올랐던 그 생은 분명 존재했던 건데, 왜 지금은 다른 건지. 왜 그걸 반복하고 있는 건지.”

디아나는 손끝이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는 아까부터 집요하게 디아나의 목덜미에 걸린 가느다란 체인을 보고 있었다. 그건 단검을 걸어 둔 체인이었다.

“그거, 시간 마법의 매개체지? 흔히 교황청에서 떠들어 대는 성유물이던가?”

성유물은 전설로 취급됐지만, 교황청에선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화에나 나오는 이름이었다.

“숨겨도 소용없어. 말했잖아, 난 이제 모든 게 보인다고.”

회귀할 수 있는 성유물. 디아나는 그 존재를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바로 이런 사태를 두려워해서였다.

심지어 에드윈도, 샬롯도 자신의 회귀에 대해선 몰랐다.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으며 괜한 불씨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트리샤는 성유물의 존재를 꿰뚫어 보게 됐다.

“너, 그걸로 시간을 돌린 거지? 내게 질 것 같을 때면 항상 꼬리를 말고 시간을 뒤로 돌려서 너만 기억을 가진 채로 날 이기려고?”

트리샤의 추론은 반만 맞았다. 아니, 그녀의 처지에선 그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겁한 거 아냐? 고결한 체는 혼자 다 하고선…… 혼자만 기억을 가진 채로 모든 걸 네 멋대로 하려고 했어?”

회귀는 트리샤의 말처럼 편리한 게 아니었다. 그 허망함, 고통, 외로움…… 하지만, 이미 트리샤에겐 말해도 소용없는 것들이었기에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루카가 잠시 날 외면했던 것도, 네가 그 검으로 루카를 찔렀기 때문이지. 누가 알았겠어, 너처럼 고귀한 사람이 그런 저열한 수를 쓴다는 걸.”

그 또한 디아나의 고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지? 이번에는 그거, 내가 빼앗을 거야. 네가 또 시간을 되돌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날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트리샤는 모른다. 디아나가 몇 번이고 회귀했다는 것을, 그녀의 말대로라면 진즉 죽일 수 있었다는 것도. 만일 안대도 디아나의 나약함을 비웃을 거다.

하지만 디아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런 짓을 해 버리면 지금 마에 물든 트리샤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넌…… 불가사의한 힘의 두려움을 몰라.”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트리샤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디아나. 난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강해진 거고 넌 아니었던 거지.”

하, 이번에는 디아나의 입에서 실소가 흘렀다. 그러자 트리샤가 옥좌 옆에 서 있던 근위병에게 눈짓했다. 그들도 루카스처럼 혼이 나간 듯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넌 돌아갈 수 없어.”

근위병이 디아나의 목에서 가느다란 체인을 끊어 냈다. 그 끝에 걸려 있던 단검은 곧 트리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두 번 다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고!”

담담한 디아나를 보며 트리샤가 재차 외쳤지만, 디아나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지금 단검을 빼앗긴 건 디아나에게 아무런 타격이 될 수 없었다.

“난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생은 디아나가 결정한 유일한 생이었다. 트리샤에게 패배하고 죽는다고 해도 혼자만 이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타인이 된 에드윈을 볼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만 되풀이하는 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게 영원하다고 해도, 디아나는 이제 혼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겠지. 몇 번을 회귀해도 너는 내게 질 테니까.”

트리샤가 코웃음을 쳤다. 디아나는 서늘한 눈으로 그런 트리샤를 응시했다.

“네 말대로 내가 졌어. 이제 네 마음대로 해. 난 완벽하게 무력해졌어.”

디아나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어. 이 제국도 네 것이고, 루카스도 네 것이고, 나도 네 것이야. 그러면 됐잖아. 지나친 악행은 분명 대가가 있을 거야. 네가 쓰는 그 힘도 반드시 어떤 대가가…….”

“지금 날 저주라도 하겠다는 거야?”

트리샤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아무 대가 없는 힘은 없어, 트리샤.”

성유물조차 그랬다. 그런데 트리샤가 쓰는 힘은 사악하기까지 했으니 더 무서운 대가가 있을 건 자명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대가? 있긴 있지. 마치 내 안에 어떤 불꽃이 피어오른 것 같아. 게다가 이 아이가 자꾸 내게 피를 더 보고 싶다고 해.”

붉은 눈동자의 광기가 고스란히 번뜩였다.

“그리고 이건 전쟁이 아니야. 반역자를 학살하는 거지.”

“네 목적은 나였어. 선을 넘을 필요는 없어. 아직…… 네 동생 니콜라도…….”

“그 모자란 것은 어차피 날 위한 제물이었어. 그걸 애지중지 보살핀 네 지능도 알 만하다. 어쩌면 현명한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네가 그걸 죽였어도 이미 생명력은 다 흡수한 후였거든.”

그 순간, 디아나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트리샤가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건 사람과는 다른 어떤 종류의 두려운 어둠 그 자체였다. 아마 디아나의 안에서 끊어진 무언가는 트리샤를 향한 마지막의 인간적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트리샤는 그조차도 저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광기였다. 트리샤의 광기가 피를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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