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트리샤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처소에서 시간을 보낸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칼에 찔린 쇼크 때문인지 루카스는 너무도 간단하게 트리샤의 손길에서 벗어났고 접근조차 여의치 않았다.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처소에서 고양이와 둘이 남겨진 트리샤는 한동안 초조감과 열패감에 시달리며 제 손톱을 죄 물어뜯었다.
“난 잘해 왔는데…… 또 디아나 때문이야.”
트리샤밖에 모르는 고양이는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트리샤를 파고들었지만, 트리샤는 그런 고양이조차 사납게 밀쳐 냈다.
“저리 가, 디나! 이 쓸모도 없는 것!”
눈처럼 하얀 털에 푸른 눈동자. 한때는 디아나를 그리워하며 고양이에게 디나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런 디아나는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트리샤가 기껏 셋의 단란한 미래를 설계했는데, 그 호의도 몰라주고 자신을 죄인 취급하고 있었다.
“다 가졌으면서. 처음부터 그랬으면서. 내가 널 위해 완벽한 미래까지 만들어 놨는데!”
수세에 몰린 트리샤는 점차 판단력을 잃고 분노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 분노의 근거가 타당한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트리샤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최선을 다했고 그런데도 디아나가 보란 듯이 자신을 감옥 같은 이 처소에 처박았다는 것이었다.
“왜 날 무시하는 거야? 내가 신분이 한미해서? 쓰레기 같은 아비를 뒀으니까?”
저열한 감정이 트리샤를 좀먹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찾은 기억대로면 모든 게 완벽할 터였다. 그런데 디아나가 멋대로 대공과 정을 통하고 해피엔딩을 깨부수려 하는 게 밉고 또 미웠다.
“이제 약초도 없어…….”
트리샤를 처소에 가두기 전, 처소와 몸을 수색해서 최소한 사는 데 필요한 물건만 남겼다. 그것도 디아나의 지시였을 것이다. 트리샤는 이제 문지기 하나도 조종할 수 없는 한심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흉기가 될 물건도 전부 치운 탓에 그야말로 무력했다.
“루카도 날 배신했지. 친구라고 했으면서…… 주술을 걸기 전에도 날 좋아해 줬는데…….”
루카스는 분명 트리샤를 친구로 여겼다. 주술로 그 과정을 재빠르게 건너뛰었을 뿐이고 루카스의 본심은 트리샤에게 있을 터였다. 그래야 기억과 맞았다.
“디아나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카스를 칼로 찔렀을 때…… 뭔가…….”
트리샤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래, 내 주술이 통하지 않는 것도 수상해. 디아나야말로 마녀야. 그러니 늘 루카스를 홀리는 거야.”
극도의 초조감은 트리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은 일렀다. 아직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엔 패기가 있었다. 이 고난만 넘기면 된다. 세상은 트리샤에게 친절했던 적이 없으니 지금도 그저 그런 고비라고 여겨야 했다.
“어쩔 수가 없네.”
트리샤가 극도로 차분해졌다.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던 싸움이 끝난 것이다.
“이것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희가 나쁜 거야.”
트리샤의 모든 물건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그 머리에 담긴 마법서의 내용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어머니인 사라에게 감사해야겠다.
사라는 일족의 가르침을 거역할 수 없어서 트리샤에게 책의 모든 것을 외우도록 했다. 모든 것…… 바로 금단의 주술까지도.
‘……이 주술은 상대의 자아를 완전히 빼앗으며, 주술을 사용하는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금지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일족에서 추방하며 처단을 받을 것이다. 다만, 우리 일족의 존망이 달린 일에는 어쩔 수 없이 가장 큰 힘을 사용하도록 기록을 남기노라.’
그깟 일족 따위, 트리샤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사라는 도망자였고 트리샤는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자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다.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트리샤의 머릿속엔 주술을 위한 문양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트리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물과 음식뿐이었지만, 문양을 그릴 수 있는 건 잉크만이 아니다.
“어차피 전부 삼켜 버릴 거라면, 내 피로 그리겠어.”
트리샤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독하게도 제 팔목을 물어뜯자 예상대로 줄줄 피가 흘렀다.
그리고 첫 번째 문양을 그리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 안에 다른 누가 들어와서 대신 이 마법을 완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혼이 나간 듯 문양을 그려 낸 트리샤는 마침 눈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제물을 발견했다.
“디나, 내가 아까 화를 내서 놀랐니?”
트리샤가 달콤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부르자 주저하던 고양이가 그 품의 정을 잊지 못하고 트리샤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난 정말 널 사랑한단다, 디나.”
모든 준비는 끝났다. 트리샤는 문양의 중앙에 디나의 생명을 바쳤다. 그다음 펼쳐진 광경은 트리샤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여태까지 해 온 주술은 분명 효과가 있었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마법적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피로 그린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섬뜩한 붉은빛이 온 방을 메웠다. 트리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옷단 사이에 몰래 꿰매 둔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던졌다. 기록대로 섬뜩한 빛은 상대의 머리카락을 삼켜 버렸다.
“……이제 된 건가.”
트리샤도 이런 주술에 손을 대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책에 기록된 대로라면 주술이 상대를 각인한 순간 큰 이변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트리샤가 긴장한 채로 문양을 보는 사이, 문양을 따라 불길이 일어났다.
눈으로 보고도 쉬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검붉은 불길은 문양을 따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트리샤는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봤다. 그 불길을 낳은 것은 바로 트리샤 자신이었다. 트리샤는 홀린 듯이 불길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화재의 소란이 잦아들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쳤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개들 곁에서 정신을 잃은 루카스는 입술에 트리샤의 피를 묻힌 채로 쓰러져 있었다.
루카스는 황제이니 곧 누군가 와서 발견할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한 트리샤는 태연하게 대피한 궁인들의 행렬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제 트리샤는 이 제국을 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
디아나의 우려대로 루카스는 개들 곁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됐다. 루카스는 즉시 황제의 침소로 옮겨졌고, 엠마는 트리샤를 궁인 사이에서 격리해 다시 가뒀다.
전언에 따르면 트리샤는 순순히 따랐다고 했다. 디아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루카스의 머리맡을 지켰다. 전의들은 심각한 얼굴로 진찰을 마친 후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외상도 없고, 병도 아닙니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황태후가 연금 상태였으니 황제가 쓰러진 지금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은 디아나였다. 그 덕분에 루카스의 머리맡을 지키고는 있지만, 과연 루카스가 다시 눈을 뜨는 게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필 에드윈이 동쪽 땅으로 향한 후였다.
얼마 후, 디아나가 한참 걱정에 잠겨 있는 사이 루카스가 눈을 떴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서 눈을 떴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언제부터 눈을 뜬 건지, 디아나가 발견했을 때 루카스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폐하, 정신이 드세요?”
루카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디아나는 알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루카스였지만, 그 내용물이 텅 빈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의 느낌이 났다.
“폐하……?”
디아나의 목소리가 불안에 떨렸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정면만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더니 스스로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나섰다.
“폐하! 잠시만요.”
디아나가 그런 루카스를 붙들었지만, 루카스는 마치 기계처럼 디아나를 밀어냈다. 그 힘이 너무 강해서 디아나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예전의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트리샤.”
루카스가 기어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디아나는 절망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나의 리샤는 어디에.”
루카스의 혼탁한 녹안과 딱딱한 어투는 누가 봐도 이상했지만, 그가 황제인 이상 명령을 따르는 것이 궁인들의 일이었다. 그렇게 루카스는 바닥에 쓰러진 디아나를 두고 나가 버렸다.
다시, 트리샤에게 가는 것이다.
***
루카스가 눈을 뜬 순간, 제국 곳곳에서 재앙의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클란이 예지했던 거대하고 사악한 힘이 제국을 삼키려고 더러운 입을 벌린 것이다. 당연히 이변을 가장 먼저 느낀 것도 데클란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드윈과 함께 전속력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이 여기서 발을 돌리면 그나마 유일한 희망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동쪽 숲에 가까워질수록 불쾌하고 음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데클란은 죄인이 될 각오를 한 채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시각, 셀린은 니콜라의 비명에 놀라서 달려갔다.
여태까지의 발작과는 전혀 달랐다. 니콜라는 고장 난 기계 인형처럼 작은 몸을 기괴하게 들썩거리더니 검붉은 피를 몇 번이고 토해 냈다.
“니콜라!”
짙은 죽음의 향기가 풍겼다. 아니, 죽음보다 더 사악한 무엇이었다. 그런데도 셀린은 물러서지 않고 니콜라의 몸을 껴안았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니콜라, 정신 차려! 누가 의원을 빨리…….”
니콜라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울컥, 토혈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니콜라는 무언가 쓰인 것처럼 눈을 똑바로 떴다.
“금단의 주술이…… 발동됐다.”
마치 아이의 몸을 통해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었다. 니콜라는 그 말을 끝으로 셀린의 품에서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디아나는 다시 일어섰다. 이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엠마, 잘 들어. 당장 다니엘 사제를 찾아서 떠나라고 해. 당장. ……트리샤가 해선 안 될 짓을 한 것 같아. 지금 네가 본 걸 전부 말하고 이 궁을 떠나라고 해. 곧 황궁의 문이 닫힐 테니까.”
“공작님은요?”
“당장, 다니엘에게 떠나라고 해! 그리고 반드시 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디아나의 서슬이 파랬다. 엠마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 나갔다. 아마 엠마가 본 루카스의 상태를 전해 들으면 다니엘도 이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어차피 일개 사제인 다니엘이 남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라도 떠나서 이 진실을 알려야 했다. 만일 디아나가 트리샤에게 패배한다고 해도, 무고한 목숨을 대량으로 희생할 수는 없었다.
창밖으로 무섭게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날씨였다. 사악하고 두려운 폭풍이 제국의 하늘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