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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4화 (174/184)

174화

아쉬움을 안고 출궁하는 마차 안에서 데클란이 불안한 얼굴로 에드윈을 봤다. 에드윈은 그 눈치를 느끼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동쪽 땅엔 갈 거다. 난 디나와 한 약속을 어기지 않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데클란이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황궁에선 마녀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길을 잃은 척 돌아다녀도 봤는데, 수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트리샤 블랑은 연금된 거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게다가 외부와 왕래도 할 수 없다. 그대도 들었을 텐데?”

모든 정보는 다니엘이 꼬박꼬박 보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데클란의 말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지금 수세에 몰린 건 자신이 잘 알 터. 니콜라도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요?”

“루카스에게 접근할 수 없으면 일개 시녀에 불과해.”

“그래도 마녀입니다.”

데클란의 불안은 타당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너무 수세에 몰아넣은 건 아닐까요.”

“그대로 활개를 치게 두는 게 나았단 뜻인가?”

“……실언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번 일엔 걱정이 앞서서.”

에드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트리샤 블랑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불안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경우엔, 니콜라가 있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몰라도 에드윈은 니콜라를 죽일 수 있었다. 그게 디아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죄 없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생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디아나를 잃는 것보단 나았다.

“제롬 경은 그 아이가 열쇠라고 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열쇠는 반드시 문을 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야.”

“그 말씀은…….”

“열쇠의 본래 용도는 무언가를 잠그기 위해서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여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력의 근원인 남자 형제가 사라지면 마녀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에드윈은 니콜라를 죽여서라도 트리샤의 폭주를 막을 각오였다.

“저는…….”

“그대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 이건, 내 결정이자 내가 짊어질 죄다.”

수도사인 데클란은 어느 쪽도 찬성할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에드윈이 빠른 결론을 냈다. 최악의 경우가 오면 니콜라를 죽이고 트리샤를 살해한다. 에드윈만이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실제로 에드윈은 딜런에게 시켜 암살에 최적화된 정예를 엄선해 뒀다. 그들은 에드윈이 명령했던 때가 오면 바로 칼을 휘두를 것이다.

에드윈은 일종의 보험을 들어 두고 동쪽 땅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

밤이 깊어졌다. 디아나는 에드윈의 체온을 느꼈던 손을 소중하게 껴안은 채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드윈이 동쪽 땅으로 떠나는 것은 믿음직스러운 일이자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큰 그림을 떠올리면 그가 가는 것이 옳았지만, 아내로서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정말 곧 끝나는 걸까…….”

그토록 바랐던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샤는 전에 없이 잠잠했고 모든 조건은 디아나에게 유리했다. 드디어 결정적일 때 트리샤보다 먼저 고지를 밟은 것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단검이었을지도.”

디아나가 성유물을 꼭 쥐었다. 돌아보면 이 책을 이끌어 가는 가장 큰 힘은 이 작은 단검에서 나왔다. 그 주인이 죽음을 맞는 순간의 피를 머금으면 다시 회귀하는 힘.

그러나 그 힘은 전부 되돌려 주는 게 아니었다. 매번 회귀할 때마다 1년의 세월이 줄어들고, 아무도 이전의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디아나가 깨어나기 전의 일은 모두 요양으로 치부되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허탈하고 허망한 일이었다.

“이번엔 정말 끝내 주는 거니.”

대답할 리 없는 단검을 향해 디아나가 낮게 속삭였다. 루카스는 이 단검으로 피를 보고 주술에서 풀려났다. 그와 동시에 극히 일부인 기억도 찾았다.

아마 트리샤처럼 단 한 번의 과거 생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그게 헤아릴 수도 없이 반복됐다는 건 디아나만이 알고 있었다.

“난 이제 돌아가지 않아. ……그로 인해 내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해도.”

언제부턴가 확연한 결심이 떠올랐다. 디아나는 혼자서만 생을 반복하는 것에 지쳤다. 아무리 무한하게 회귀할 수 있다고 해도 끝은 오기 마련이고, 지금의 생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디아나는 사라지더라도 에드윈의 아내로서 끝내고 싶었다. 그게 아닌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드에게 아무런 일도 없기를.”

상념의 끝은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도였다.

에드윈은 그저 디아나의 운명에 말려들어 사악한 힘을 상대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만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다.

“공작님!”

뚝, 상념이 끊겼다. 다급한 엠마의 목소리였다.

“일어나셔야 해요! 공작님?”

“난 깨어 있어. 무슨 일이길래…….”

디아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엠마는 다급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밖의 소란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디아나를 스치고 갔다.

“내궁에 불이 났어요! 곧 대피해야 할지도 몰라요.”

“트리샤, 트리샤가 있는 곳은?”

디아나가 황급히 묻자 엠마는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의 처소는…… 불길이 미친 곳이라…… 이미 모두 대피했어요.”

순간 디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여태 막연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트리샤는?”

파르르 손이 떨렸다. 엠마는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화재는 황궁에서 가장 위급한 일로 여겨졌다. 시녀들은 모두 화재 시 대처 요령을 배웠고 엠마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순위는 당연히 웃전의 대피였고, 궁인들은 알아서 미리 정해 둔 대피 통로로 몸을 피했다.

“우선, 제가 상황을 알아보라고 시녀를 보냈어요.”

엠마는 재빠르게 정신을 다잡았다. 디아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대피를 할 경우를 대비해 외투를 걸쳤다. 얼마 후, 시녀가 달음질해서 엠마의 귀에 뭐라 속삭이고 갔다.

“다행이에요, 불길은 여기까지 오지 않을 거래요. 궁인들의 처소 일부에만 불이 난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트리샤는 어떻게 됐어!”

디아나가 다급함에 언성을 높였다.

“트리샤의 처소가 있는 곳에서 불이 난 바람에…… 모두 대피했다고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트리샤가 있는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그걸 우연으로 치부해도 될까.

“그럼, 트리샤가 어디로 간지 모르는 거야?”

“대피한 궁인들을 확인하고 있다고 해요. 제가 직접 확인해 볼까요?”

디아나는 냉정하게 트리샤를 떠올렸다.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트리샤가 머무는 처소에서 불이 났다면…… 과연 트리샤는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여느 건물이 그렇듯 자재는 전부 목재였다. 그건 트리샤를 가둔 문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고비에서 여러 번 살아난 트리샤가 고작 불에 목숨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소란을 틈타 탈출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대피한 궁인들의 집합에 순순히 모일 리는 없었다.

“……소용없어. 이미 도망쳤을 거야.”

디아나는 빠르게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트리샤가 향할 곳은 너무 자명했다.

“폐하는. 폐하는 어디 계시지?”

“폐하의 처소는 화재의 영향이 없어요. 이 시각이면 침전에 계실 텐데요…….”

“직접 가 봐야겠어. 당장!”

디아나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 불길은 고작 궁을 태우려는 수작이 아닐 것이다. 지금 판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건 루카스의 존재였다. 트리샤는 그걸 손에 넣으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필 오늘 에드윈을 동쪽 땅으로 떠나보낸 디아나에겐 목숨의 위협과도 같았다.

“공작님, 폐하께오선…….”

숨이 턱까지 찬 디아나를 시종장이 막아섰다. 디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루카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화재 소식을 들으시고는 개들을 살피러 가셨습니다.”

“……뭐?”

디아나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염려 마십시오, 공작님. 개들이 있는 곳은 불길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트리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불을 낸 것은 루카스가 개들을 살피러 올 경우까지 계산한 노림수였다.

“공작님?”

털썩, 힘을 잃고 주저앉은 디아나를 보고 놀란 엠마가 서둘러 디아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좀처럼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디아나는 망연히 비어 있는 루카스의 침소를 보며 절망을 느꼈다.

“늦었어.”

트리샤는 혼자서 때를 기다려 왔다.

“내가 또 늦은 거야.”

디아나가 방심하는 그 순간을 노린 것이다. 무엇보다 트리샤는 루카스에 대해 디아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 나면 개들의 동요를 걱정할 루카스를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 생각을 하자 숨이 막혀 왔다.

후회는 왜 이리 해도 해도 부족한 것인지. 얼마나 치열히 싸웠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불길한 예지가 맞았어.”

허탈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작님, 이러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폐하를 보러 가요, 네?”

엠마는 모른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불길이 일어난 순간 모두 늦어 버렸다는 것을. 디아나는 문득 데클란이 말했던 거대하고 사악한 힘이란 말을 떠올렸다. 다시 일어서고 싶었지만,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희망이 있었는데 한 걸음을 딛자 다시 그 절망의 구덩이였다.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 댔다. 주인인 루카스가 도착했는데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을 정도였다.

궁인들의 처소에 작은 불이 난 것뿐인데, 다들 소란을 떨어 대니 예민한 사냥개들이 날뛰는 것이다. 루카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곤 개들을 쓰다듬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자 개들이 루카스의 손을 마구 핥아 댔다.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제법 기특한 모습에 루카스는 오랜만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트리샤도 마찬가지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트리샤의 계산대로였다. 이 승부는 결국, 트리샤의 승리였다. 이제 한 발짝이 남았을 뿐이다. 물론, 디아나처럼 시간을 끌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작 저 정도의 불길이 너희를 해칠 리 없대도.”

루카스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개들을 끌어안았다. 디아나가 있어서 잠시 잊었던 외로움이지만, 본래는 이 개들이 루카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켜 줄 테니.”

루카스는 그렇게 말하며 개들을 더욱 세게 끌어안고 안심시켜 줬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말? 지켜 줄 거야?’

멀리서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약속……한 거야. 이제부터 루카는 리샤를 지켜 줘야 해.’

그 순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까마득한 무의 공간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나머지는 전부 잊어. 넌, 이제 내 인형이야.’

어둠이 루카스의 의식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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