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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3화 (173/184)

173화

디아나는 언제나 에드윈의 예상보다 의연하고 강했다. 그래서 항상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투정이라도 부려 주면 좋으련만, 디아나는 오히려 에드윈의 다급한 마음을 타일렀다. 끝까지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자세가 에드윈으로선 못내 안쓰러웠다.

“내 여인도 지키지 못하다니, 난 무능한 사내다.”

그 자책은 진심이었다. 에드윈은 평생 자신이 무능하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할 수만 있었다면 디아나를 제 그늘에 두고 지켜 주고 싶었다. 혼자 황실에 두고 싶지도 않았고, 한심하게 제 어머니에게 속아 디아나를 뺏기지도 않아야 했다.

“에드, 자책하지 말아요.”

“아니. 그대를 지켜 주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 대공저로 데려가서 결국 이렇게 되다니…… 할 말이 없어.”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어요. 결과적으론 황실에 들어와서 모든 게 나아졌잖아요.”

“혼자 위험에 처한 것도 사실이잖나.”

에드윈은 그 후로 편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전부 제 무능처럼 여겨졌고, 자신을 향한 한심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패배감이라는 것을 여실히 맛본 것이다.

“이건 제 싸움인걸요.”

디아나가 담담히 말했다. 에드윈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 디아나에게 더 살아갈 이유를 준 것이 바로 에드윈의 존재였다. 그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리고부터는 이 생에 무한한 집착이 생겼다.

“조금만 더 참아요. 분명, 곧 끝날 거예요.”

“……내가 또 한심한 모습을 보였군.”

에드윈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는 사람을 안정시키는 특유의 힘이 있었다. 그나마 이 얼굴을 직접 보고 안아 봤으니 최소한의 안심이 됐다.

“이대로 단둘이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대를 만나겠단 자가 있어.”

에드윈이 아쉬운 듯이 말을 꺼냈다. 디아나의 결심이 확고한 이상,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것만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디아나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에드윈이 시종장을 시켜 데클란을 데려왔다.

“저는 데클란 쇼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수도사의 몸입니다.”

데클란은 드물게 긴 머리를 한 신비로운 얼굴의 사내였다. 언뜻 봐도 평범한 인상은 아니었다.

“제롬 경과 다니엘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데클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아나가 다시 허락의 뜻을 표하자 데클란은 디아나에게 다가와 한참을 뚫어져라 디아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공작님은…… 참으로 특별한 영혼을 가지셨군요.”

제롬이 말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데클란은 소위 육감이 발달한 사람이었고 이성이 아닌 그의 특이한 본능으로 대상을 판단했다.

“마치, 겹겹의 빛이 차곡히 쌓인 것 같습니다. 닮은 빛이지만, 전혀 다른 빛들이…… 전, 이런 영혼을 가진 분을 처음 봅니다.”

데클란에게는 디아나가 반복해 왔던 회귀의 삶이 느껴지는 것일까. 디아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 어제 불길한 예지를 받았습니다. 거대하고 사악한 힘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꿈이었죠. 슬프게도 저의 불행한 예지는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작님을 뵙고 나니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다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듭니다.”

“그건 무슨.”

“공작님처럼 특별한 영혼을 가진 분이라면, 그 사악한 힘에 맞설 수 있을 겁니다.”

데클란은 끝내 불행에 대한 예상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가 그것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공작님께 감히 청하겠습니다.”

디아나가 눈으로 되물었다.

“아마 이른 시일 내에 제롬 경에게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부디, 대공 전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데클란이 절실한 눈으로 디아나를 바라봤다.

“그 얘긴 끝났을 텐데.”

에드윈이 낮게 잘랐다. 당장 디아나를 황궁에 두는 것도 불안한데 그녀를 두고 동쪽 땅으로 가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데클란은 각오했는지 디아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선 공작님을 걱정하셔서 수도를 떠나지 않으려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동쪽 땅에서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선 대공 전하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간청합니다.”

“그만둬라!”

에드윈이 불쾌한 듯 데클란을 향해 일갈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잠시 데클란과 에드윈을 번갈아 보다가 에드윈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 간청하는 건, 그대의 꿈 때문인가?”

데클란을 향한 질문이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

디아나의 관대한 대답에 데클란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 근원인 동쪽 땅에서도 이변이 있을 겁니다. 사악한 힘은 근원을 멸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저희를 길러 주신 그분도 시도하셨지만, 끝내 힘이 모자라 근원을 멸하지 못하셨기에 지금과 같은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제롬 경에게 들었다.”

에드윈이 나서서 말을 끊으려 했지만, 디아나는 다가온 에드윈의 손을 잡았다. 완곡한 저지였다. 에드윈의 타는 속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밖에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해하실 겁니다. 그 근원을 멸하는 데는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제롬 경 혼자서는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디아나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제롬에게 모든 걸 떠맡길 생각은 없었고, 더욱 확실한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디아나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은 에드윈이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에드윈이었다.

“동쪽 땅까지 다녀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최대한 속도를 낸다면 일주일 안이면 됩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에드윈을 봤다.

“에드, 어차피 황실과 평화 협정을 새로 맺으려면 준비하는 데만 그 정도 시간은 걸려요.”

“하지만.”

“나도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두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디아나가 처음으로 에드윈에게 두려움을 비췄다. 늘 의연한 모습만 보여 주던 디아나였기에 지금 얼마나 진심인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은 에드, 당신이에요.”

디아나가 에드윈의 손을 꼭 쥐었다.

“이 악몽을 끝내 줘요.”

두 사람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였다. 사악한 힘의 근원을 없애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몇 번이고 생을 반복했던 디아나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이게 이기적인 말이라는 것도.”

“아니, 아니다.”

에드윈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나마 약한 마음을 먹었지만, 눈앞의 디아나는 이토록 의연했다.

디아나가 제 여인이라는 이유로 막연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 또한 그의 이기심이었다. 디아나는 이미 충분히 강한 사람이었고, 에드윈에겐 그의 역할이 있었다.

“데클란, 그대가 이겼다. 이만 물러가라.”

데클란이 예를 표하고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에드윈은 도로 디아나를 품에 안았다. 한시가 아깝고 잠깐의 접촉이 안타까웠다.

“루카스 그 빌어먹을 자식이 딱 이만큼의 시간만 내주겠다더군.”

에드윈이 분한 듯이 말했다. 그것도 에드윈이 강력하게 요청해서 따로 만날 수 있게 한 것이다. 수도사와 동석한다고 핑계를 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그 수도사가 눈치껏 둘의 시간을 내어 주긴 했지만 말이다.

“잠시라도, 내 아내를 뺏어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자식을 후려갈기고 싶다.”

에드윈답지 않은 험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내라는 말이 다정하게 울렸다.

“오늘은 참으세요. 우리가 이미 부부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디아나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버려진 예배당에서의 언약이나 둘만의 청혼이 떠올랐다. 그 순간 모두가 진심이었고, 진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엮은 부부라는 인연의 끈을 느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갚아 줄 작정이다.”

“그건 안 말릴게요.”

디아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에드윈은 야속한 시계를 보고는 디아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제 루카스가 나타날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한 시각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장이 황제의 도착을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에드윈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으며 디아나에게서 떨어졌다.

“방금 수도사가 나가는 걸 봤다. 공작의 소망대로 기도는 했나?”

루카스는 에드윈을 보지 않고 바로 디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폐하의 자비 덕분에.”

그 말을 들은 루카스가 기쁜 듯한 표정을 짓는 게 에드윈의 눈에 그렇게 거슬렸다. 폭주하는 루카스도 문제였지만, 디아나의 환심을 얻으려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 같은 꼴도 끔찍했다.

“그리고 대공 전하께 앞으로 황실과의 백 년 평화를 말씀드렸어요.”

“새삼스럽지만, 세간에서 황실과 대공가를 불안하게 바라보니 새로운 평화 협정이 필요하지.”

루카스가 에드윈을 의식하며 괜한 허세를 부렸다.

“예, 참으로 새삼스러운 일입니다.”

에드윈이 루카스 앞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황실이 대공가에 역모 혐의를 씌우려고 했는데 루카스가 저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웠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까지 온 것도 전부 루카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카를의 공작으로서 이런 중대한 일을 맡게 돼서 영광입니다.”

디아나가 둘의 살벌한 분위기를 최대한 무마했다.

“역사에 남을 큰일을 맡았으니 저는 당분간 황실에 머물며 공무를 도울까 하는데,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시나요?”

순간, 에드윈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루카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

에드윈은 그 순간 제 손이 폭력을 행사하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디아나가 언제 출궁한다고 할지 몰라 불안했던 루카스로선 지금 말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에드윈의 존재 따위는 바로 잊힐 정도였다.

“황실은 당연히 공작을 환영한다. 공무를 위해서니…… 언제까지나 머물러도 좋다.”

서늘한 에드윈의 눈동자가 살기를 품고 루카스를 봤다. 다행히 루카스는 제 뒤통수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디아나를 보고만 있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있으니, 정식 평화 협정은 다음 주가 어떨까요?”

디아나가 최대한 부드럽게 제안했다.

“난 공작의 뜻에 따르겠다.”

“대공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남자가 서로 질세라 동시에 답을 뱉었다. 그러고는 서로 마주 보고는 똑같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는 둘이 혈연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 순간만큼은, 두 남자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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