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소란이 잦아들고, 겨우 진정한 데클란이 에드윈의 처소로 불려왔다. 데클란은 에드윈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평소 늘 침착하고 고요한 인상인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전하, 예지를 받았습니다.”
에드윈이 그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마녀에 이어서 이번에는 예지인가.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몇 번이고 큰 위기 앞에서 꿈으로 예지를 받았습니다.”
“마녀가 있는 판국에 의심할 생각은 없다.”
“제롬 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곧 무척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겁니다.”
데클란의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루카스는 겨우 트리샤의 그늘에서 벗어났고 대공가와의 갈등도 해결 직전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이때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거대하고 사악한 것이 곧 이 수도를 덮칠 겁니다.”
“트리샤는 이미 루카스의 눈 밖에 났다. 나머지는 제롬 경과 그대들이 해결하면 되잖나.”
“예지는 어떤 근거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 주십시오. 어떤 방식으로든 저의 불길한 예지는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슬프게도 말입니다.”
데클란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불길한 예지를 받은 이상, 그것이 바뀐 적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비하고 노력해도, 악몽은 항상 현실이 되곤 했으니까요.”
에드윈은 순간 이게 예지인지 저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 불행이라니 그걸 들어서 무얼 하라는 건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가? 모든 일은 순조롭다.”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부추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리 부정적이지?”
에드윈이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항상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데클란이 씁쓸하게 답했다. 데클란 자신도 이 예지력을 타고난 것을 저주했다. 그가 예지하는 것은 늘 불행뿐이었고, 그것은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었다.
“불쾌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전 그래서 부모에게도 버려졌으니까요.”
그러니 실제로는 예지가 아니라 저주인 셈이었다. 어렸던 데클란은 불길한 아이로 여겨져 버림받았고, 수도사가 그를 거둬 아들처럼 길러 줬다. 제롬과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실제로 한 아버지를 둔 형제와 같았다.
“하지만 저희를 거둬 주신 수도사께선…… 반드시 이유가 있는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요하고 영악하다던 소매치기 소년이었던 제롬 경에게도, 아버지 손에 팔릴 뻔했던 다니엘에게도. 사람의 생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고 하셨죠.”
데클란이 투명한 눈동자를 들었다.
“전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형제 모두의 이유는 그 붉은 힘을 멸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너무도 진지한 그의 얼굴에 에드윈은 혼란을 느꼈다.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상황은 나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수도사의 악몽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제롬 경의 일이 걱정됩니다. 전하, 부디 제롬 경을 찾아서 함께 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리다. 나는 황실에 가서 화해 조약을 맺고 디아나를 데려올 생각이야.”
데클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에드윈의 말은 옳아서 반박하기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이 본능적인 위협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럼, 적어도 공작님을 뵈러 가는 자리에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건 어째서지?”
“제롬 경은 카를 공작님께 신비롭고 강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전, 그 사악한 것과 대항하는 공작님을 직접 뵙고…… 답을 찾고 싶습니다.”
당장 동쪽으로 가는 것보단 현실적인 요구였다.
“전하, 우리 수도원의 형제들은 전부 그 붉은 힘을 멸하는 데 목숨을 걸 각오입니다.”
“그대들은 신의 이름을 따르는 자이니 이해한다.”
“아뇨, 저희는……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신 아버지를 위해서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 수도사를 말하는 건가?”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혈연도 아니었고, 그들을 길렀던 때는 이미 초로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롬과 다니엘 그리고 데클란에게 유일한 아버지였다.
“우리 중 가장 연상이었던 제롬 경이 수도원을 떠났을 때도 저는 꿈에서 예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동쪽 숲에서 홀로 이단 재판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제롬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눈엔 광기 어린 학살이었겠죠.”
“그도 트리샤 블랑의 일족을 본 건가?”
“적어도 우리 형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그분은 교황청에서 제명을 당하셨고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요.”
데클란은 아버지와 같았던 수도사의 죽음을 지켜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분도 사악한 힘의 근원을 파괴할 수 없었다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게 우리의 이유이자, 사명입니다. 그분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한 명의 정의로운 사제로서 기억되게 하는 것. 그걸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각각 이유는 달랐다. 디아나는 트리샤와의 악연으로,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와의 인연으로, 그들은 그들만의 유지를 위해서, 붉은 힘을 멸하기 위해서 모였다.
“난 황실에 화해를 주선할 카를 공작을 직접 만나 보겠다고 전했다. 내일이면 답이 오겠지. 아마 사제 하나쯤 데려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거다.”
에드윈이 허락의 뜻을 비치자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그대의 능력이 아닌, 단순한 악몽이었다는 게 증명되면 좋겠군.”
“예.”
데클란은 대답과 달리 슬픈 눈동자를 했다. 에드윈은 애써 그 얼굴을 외면했다. 그들의 이유도 절실했지만, 에드윈에겐 당장 디아나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각오는 단순했다. 전력과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
루카스는 예상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디아나는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쪽의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아직 트리샤가 이 황실에 살아 있다는 게 큰 부담이었다. 트리샤는 몇 번이고 마지막에 판을 뒤집곤 했다.
“오늘도 별 소식은 없습니다. 여전히 제 처소에서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에요. 외부 접촉은 금지됐고요.”
엠마가 디아나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트리샤는 근신과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루카스는 디아나가 원한다면 트리샤를 궁에서 내보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트리샤가 자취를 감추는 게 더 두려운 일이었다.
제롬이 완전히 끝낼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차라리 나았다.
“감시를 늦추지 않도록 해.”
“예, 공작님.”
트리샤의 주술에는 재료가 필요했다. 한 번 디아나를 죽였던 극독을 만든 약초나, 루카스를 홀릴 때 쓰는 미약의 재료 같은 것 말이다.
주술에도 대가가 있을 것이다. 트리샤가 지금 얌전히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지금 트리샤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으리라.
“그보다, 대공 전하는 입궁하셨어?”
“네, 안 그래도 방금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엠마는 처음으로 디아나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숨기기 어려운 기쁨이 싱그러운 미소에 고스란히 맺혀 있었다.
“공작님께서 준비를 마치시면 응접실로 안내하라는…….”
“지금 가겠어.”
엠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아나가 벌컥 몸을 일으켰다. 엠마는 다급하게 디아나의 옷을 정리해 준 후에 안내를 시작했다. 그조차 디아나의 걸음이 워낙 빨라서 쫓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카를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이 고했을 땐, 디아나가 제 손으로 응접실 문을 열어젖힌 뒤였다.
창가에 뚜렷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자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 맺혔다.
엠마는 눈치껏 시종장과 함께 문을 닫고 나왔다. 정작 디아나는 그런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오직 한 곳만 보고 있었다.
너무 간절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지금이 그랬다. 눈앞에서 에드윈이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같은 마음이라는 건,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그리던 순간이었는데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쿵쿵, 심장이 뛰었고 바싹 입술이 탔다. 어째서인지 이렇게 반갑고 기쁜데도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에드윈이 성큼 디아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백 마디 말보다 더 진심을 담은 팔로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디아나는 에드윈이 이곳에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의 체온, 그의 체취,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에드…….”
겨우 말이 나왔다. 끝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에 에드윈이 끌어안은 팔에 꼭 힘을 줬다.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는데, 정작 만나자 아무런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저 서로를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디나, 내가 그대를…… 이제야 데리러 왔다.”
서로의 체온에 안긴 지금,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에드윈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리자 디아나는 그간 두려웠던 모든 게 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눈물이 흘렀다.
“내가 너무 늦었나.”
이내 에드윈이 디아나를 어렵게 품에서 떼어 내고 그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가까운 곳에서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뇨.”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디아나가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냈던 만큼, 에드윈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거다. 그 증거로 에드윈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그대가 없어서 그렇다.”
에드윈이 솔직하게 말하자 그제야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괜찮아지겠지. 난 오늘 그대를 데리고 황궁을 나설 생각이니까.”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건 예정에 없었다.
“루카스…… 아니, 폐하가 정신을 차리셨다면 그대를 더 속박해 둘 명분은 없어.”
에드윈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그대는 오늘 나와 함께 출궁하고, 정식으로 중재하는 자리에 카를의 공작으로 참석하면 된다. 여기 하루라도 더 머물 필요가 없어.”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다소 높은 그의 체온은 여전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렸다. 디아나도 이 달콤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이곳을 떠나 그와 둘이서 잠을 청하고 싶었다.
“아직은…… 그럴 수 없어요.”
디아나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 디아나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에드,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슬픔이 살짝 어렸다. 안타까운 빛이기도 했다.
“지금의 상황이 계속된단 보장은 없어요. 난 여기서 트리샤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지켜봐야 해요.”
에드윈도 내심 예상하던 답이었다. 그러나 씁쓸한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