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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1화 (171/184)

171화

당장 서로 칼을 들이댈 것 같았던 황실과 대공가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적어도 루카스는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디아나에겐 손수 단검을 돌려줬고, 트리샤의 알현을 거절하며 상황을 직시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에드윈과 손을 잡은 드노아 경이 황실과 대공가의 중재를 자청하고 나섰다.

“짐이 잘하는 건가?”

루카스는 디아나를 찾아와서 여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봤다. 여태 자립하지 못했던 루카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옳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디아나는 그런 루카스를 보며 전에 없던 낯선 감정을 느꼈다. 만일 루카스가 제대로 된 모후 아래에서 자랐다면, 트리샤처럼 미혹하는 이가 없었다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제가 판단할 몫이 아니에요.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계신다는 건 알 수 있어요.”

그 한마디에 루카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디아나는 그런 루카스에게 조금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지만, 과거의 회한이 전부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 여전히 그가 불편했다.

“아직 드노아 경의 제안은 허락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그분을 좋아했던 적이 없어.”

루카스에겐 외조부가 되는 드노아는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에드윈과 비교를 일삼으며 루카스의 자존감을 짓밟아 뒀다.

그건 아마 고의였을 것이다. 차기 황제도 제 꼭두각시로 삼기 위해서 처음부터 계획한 큰 그림이었다. 참 구역질이 나는 짓이었다.

“드노아 경은 내 모후와 손잡고 제국의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겠지.”

루카스는 이미 제 모후의 진심을 들은 후였다. 일말의 애정이 거부당하는 순간이었다.

“의회에선 불안한 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공가와 화해를 보여 주길 원한다. 그리고 그걸 주선할 수 있는 사람은…… 반 테스 공작가의 드노아 경밖에 없다는 거지.”

디아나는 드노아 경의 이름에 잠시 침묵했다. 에드윈도 늘 드노아 경을 경계했다. 제 외조부이자 에드윈을 그리 총애했음에도 말이다. 디아나도 드노아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레이스의 행동을 통해 똑똑히 알았다.

“저는 어떤가요.”

디아나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루카스는 의아한 녹안으로 그런 디아나를 봤다.

“그 중재자…… 카를의 공작인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 주겠나?”

“네, 화해의 자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나서겠어요.”

그건 디아나가 생각하는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루카스로선 디아나가 자신을 위해 도움을 준다는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여태 즐겼던 싸구려 쾌락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훌륭한 황제가 된다면…… 그런다면, 내 곁에서 이렇게 도와줄 수 있겠지?”

루카스의 녹안에 작은 기대가 서렸다. 그는 이미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그럴수록 디아나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빛과 안정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디아나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기억의 조각에서처럼 그녀를 불행하게 하는 일도 결코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공작이 황제 폐하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러나 디아나는 선을 그었다. 루카스의 녹안에 실망감이 스쳤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은 채였다.

이렇게 잘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디아나도 마음을 돌려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그녀가 자신을 돕는 것만 해도 꽤 큰 발전이었다.

“그대의 조언대로 날 현혹하는 것들을 멀리하기로 했다. 그대는 트리샤 블랑이 친구였던 적이 없다고 했지. 난 그대가 누군가를 공연히 헐뜯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아.”

루카스가 트리샤의 알현을 거절했던 이유였다.

“황제의 소명을 다하려면 한낱 시녀와 놀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지.”

루카스의 말에 디아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루카스가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데 몇 번의 생이 걸렸던가. 감격인지 회한인지 모를 뭉클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의 말처럼,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제대로 되돌리고 싶다.”

드디어 루카스 본인이 눈을 떴다. 그토록 증오했고, 그토록 자주 마주쳤던 루카스는 이제 없었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보며 마치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느꼈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를 갖추고 지난날을 반성하는 루카스는 실제로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게 흘러들어 온 기억 속 그대에게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그건 디아나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원작 디아나는 영원한 상실감을 떠안고 절망으로 침묵했다. 누구도 그것을 보상할 수는 없었고,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군.”

루카스는 디아나의 표정을 읽고 서둘러 제 말을 거뒀다.

“오늘 내로 대공가에 서신을 전달하겠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와 에드윈 사이의 충돌을 막을 수 있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중재자로 나설 수 있었다.

“그…… 중재를 마칠 때까지는 황실에 남아 줘야 할 것 같은데…….”

루카스가 어려운 말을 꺼냈다. 당장 디아나가 황실을 떠난다고 선언하는 게 두려워서 여태 비슷한 화제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지금은 중재라는 구실로 디아나를 붙들고 싶은 거였다.

물론, 아직도 디아나의 아름다움과 여인으로서의 향기에 끌리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지금 디아나가 없으면 루카스는 온전히 혼자가 될 것이다. 루카스는 생애 처음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다만, 공작저와 제 가신들은 자유롭게 풀어 주세요. 대공가에서도 어쩌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이다.”

떠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루카스의 답이 밝았다.

곧, 루카스는 아쉬움을 남기고서 디아나의 처소를 떠났다. 디아나를 하루라도 더 오래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황제로서 옳은 일을 해야 했다.

동기부여의 방향은 조금 달랐지만, 결론적으로 디아나의 바람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

그 소식은 대공저에도 빠르게 도착했다. 에드윈은 서신을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 묘한 한숨을 흘렸다. 디아나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루카스의 폭주를 막았다는 다행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의아한 딜런에게 대답 대신 서신을 건네준 에드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디아나와 황실의 소식을 전해 주는 다니엘은 루카스가 완전히 트리샤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황태후의 연금은 지속했다. 또한, 현재도 노골적으로 드노아 경의 간섭을 거부하고 있었다.

“루카스와 내게 공통점이란 게 있었군.”

드노아 경은 두 손자에게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 에드윈은 드노아의 혜택을 누린 쪽이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애정이 아니었다.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그 비뚤어진 애정이 불편했다.

“그것만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건가.”

게다가 더 불편한 건 제 어머니에게도 그 모습이 묻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에드윈은 이번에 멋대로 디아나를 황실의 손에 넘긴 그레이스에게 분노보다 실망을 더 크게 느꼈다. 결국, 어머니도 드노아나 황태후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에드윈이 이토록 강건하게 자라지 않았다면, 루카스처럼 휘두르려고 했을 것이다.

“입궁하실 겁니까? 함정일 수도 있잖습니까.”

“디나가 중재를 맡았다면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딜런이 말끝을 흐렸다. 루카스의 말이지 확인된 사실이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순순히 응할 생각은 아니야.”

에드윈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선 중재자인 카를 공작을 만나 보겠다는 건 좋은 핑계가 될 것이다.

에드윈에게 가장 다급한 일은 디아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안부를 전해 들어도 직접 눈으로 바라보고 품에 안기 전까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오늘 내로 황실에 답신을 보내겠다.”

조금씩 길이 트이고 있었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사태를 마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대로 루카스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제롬이 트리샤를 처단할 방법을 가져오면 다급한 상황만 마무리하고 둘이서 북쪽 영지로 떠나도 된다.

디아나와 함께라면 장소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둘이 그리던 행복까지 이제 몇 발짝 남지 않았다.

“그럼, 기사단에 내리신 명령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현재 에드윈과 디아나의 모든 병력은 전시를 대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지금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유지한다.”

에드윈은 망설임 없이 뱉었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어.”

에드윈이 깊은 흑안으로 정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완전한 끝을 보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는 특유의 신중함이었다. 딜런은 그런 주군의 모습을 보며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노아 경에게도 서신을 보내야겠다.”

“그분은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 하지만 드노아 경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앞으로도 그래야 할 거다.”

에드윈은 드노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배제된 걸 알면 드노아가 술수를 쓸 것은 자명했고,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에드윈은 끝까지 드노아를 화해의 중개인으로 내세우겠다고 속인 후에 재빠르게 디아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슬프게도, 혈연이기에 그들의 생각을 뻔히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처소에도 그렇게 알려 둬라.”

드노아와 손을 잡는다는 걸 알면 선대공비도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드노아와 한배를 타면 에드윈이 자신을 복권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내가 무정해 보이나.”

딜런의 복잡한 눈빛에 에드윈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예.”

딜런은 정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압니다. 전하께서 먼저 속이지 않으면, 전하를 속이려 할 분들이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디나의 전언에서 루카스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있다고 했어. 루카스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난 외척 세력의 악습을 끊어 낼 거다.”

반 테스 가문이 황실과 대공가 모두에 영향을 끼치며 권세를 쥐는 것은 선대를 마지막으로 해야 했다. 제국의 정세가 크게 흔들리겠지만, 그게 본래 주인의 권리를 찾는 거였다.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딜런은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운 주군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곧 대공가에도 밤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가 대공가에 퍼졌다. 에드윈도 모처럼 쉽게 잠들 수 있었다. 드물게 평화로운 밤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곧 별실에 머물던 사제 데클란의 비명으로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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