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0화 (170/184)

170화

황태후의 처소를 나선 루카스의 걸음이 휘청거리며 갈 곳을 잃었다. 이 넓고 화려한 황실 어디에도 그가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도 존재를 부정당한 루카스였다.

그는 여태 외면했던 차가운 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가슴에 칼이 꽂힌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방황했을까. 결국, 루카스가 도착한 곳은 디아나가 있는 처소였다.

처소를 지키던 엠마는 루카스의 텅 비어 버린 녹안을 보고 자리를 비켰다. 디아나도 루카스의 눈을 보고 같은 걸 읽었다.

루카스는 디아나가 앉은 자리의 바로 곁에서 몸이 무너지듯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를 보자 전신의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마마마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루카스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처음부터 필요 없는 자식이었다고 하더군. 난, 황실의 후계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었던 거다. 제 어미에게조차…….”

언뜻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에선 처절한 절망이 묻어났다. 디아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스텔라나 드노아가 루카스를 철저한 도구로만 생각한다는 것도, 루카스의 난폭한 성정은 사실 외로움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그대도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겠지. 아니, 모두가 그럴 거다. 난 그런 인간이었어.”

루카스에게 쏟아진 기억의 조각들은 모두 참혹했다. 그중에서도 디아나와 함께였던 장면이 유독 심했다. 아름다웠던 황태자비가 시들어 생기를 전부 잃어 갈 때까지, 자신이 트리샤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정확한 기억까진 없어도 짐작은 갔다.

“이 세상 누구도 루카스 파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직면한 루카스는 조금씩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쩌면 여태까지 애써 외면해 온 진실이었다. 인간으로서 루카스 파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참혹한 진실.

“난, 일생…… 아무것도 갖지 못한 거나 다름없어. 그걸 잊고 싶었는데.”

루카스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디아나에게 매달리는 듯이 보였다. 디아나에게선 고아한 빛이 느껴졌다. 지금 루카스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하게 인간적인 온기였다.

루카스는 지금 제 영혼이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디아나의 빛에 끌렸다.

“어릴 때부터 아무도 날 봐 주지 않았다. 난 황태자였을 뿐, 아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조차 주지 않았어. 내 어머니조차 그랬지. 부황은 내가 말을 배웠을 무렵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나는,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루카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 넓은 황실에서 내내 혼자였다. 궁인들은 그를 황태자로만 인식했고, 고귀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다. 모후는 루카스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가둔 채 후계자로만 길렀다.

“난,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면 모두 반응해 주니까……. 내가 못난 짓을 하고 난폭한 짓을 해 댈 때마다 모두 내게 엎드리고 모후는 날 타일렀어.”

루카스는 새장에 가둬 둔 독사처럼 다뤄졌다. 그 존재는 필요하지만, 누구도 접촉하길 꺼리는 존재였다. 그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결핍이었다. 모든 것이 넘쳐 나는 황실이었기에 그의 결핍은 더 시리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내 어머니는 틀렸다. 나도 틀렸어.”

디아나는 침묵을 지켰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에게 애원하듯 자꾸만 말을 이었다.

“그 환상은 아마 사실이었을 거다……. 난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니까. 내가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놀랍지 않아.”

루카스의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났다. 디아나는 그제야 루카스를 향해 푸른 눈동자를 돌렸다. 지금 디아나의 눈앞에서 망연하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는 루카스는 황제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도 난 여기 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나를 한 인간으로 봐 주는 것은 디아나 그대뿐이었어. 디아나 그대가 아니라면 황제가 아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핍으로 세상을 배웠던 소년이 아직도 루카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루카스도 피해자였다. 비틀린 권력욕으로 태어나서 길러졌고, 후엔 트리샤에게 의식을 지배당한,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도 되지 못했던 소년.

“한 번만……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줄 수는 없나?”

루카스의 녹안엔 후회가 묻어났다. 디아나는 그의 운명에 일말의 동정을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피해자였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동정은 해도 용서를 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 속의 그대에게도, 지금의 그대에게도 내가 속죄할 기회를 준다면……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

루카스의 애원에도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날 원망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대에게도 내가 필요치 않은 한심한 존재라서?”

루카스가 절박하게 되물었다. 떨리는 그의 손이 디아나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 내고 시선을 맞췄다.

“그건 정답이 될 수 없어요.”

디아나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폐하는 폐하 자신의 답을 찾아야 해요. 폐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에요.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보다 나은 미래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죠.”

“하지만, 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져서…… 그러니 그대가 내 곁에서 알려 줬으면 한다.”

“폐하, 자신이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될 수 없어요.”

디아나는 트리샤와 달랐다. 루카스를 뜻대로 조종하는 건 디아나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여태까지의 일은 바꿀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부터의 일은 다르죠. 그건 폐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디아나는 나머지 말을 삼켰다. 지금이라면 루카스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아나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건 트리샤의 조종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건 디아나가 마음 깊이 루카스를 동정했기 때문이었다. 루카스가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찾을 유일한 기회를 뺏지 않으려는 것이다.

“누가 폐하를 현혹하는지 깨달으세요. 어느 길이 옳은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세요.”

디아나가 담담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같은 군주로서의 힘이 실린 말이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지는 아무도 결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제 자리의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죠. 황제로 즉위한 이상, 폐하에겐 큰 책임이 있어요. 그것을 외면하신다면 그거야말로 폐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예요. 아니면, 폐하 자신조차 폐하의 존재를 저버리실 건가요?”

그 어떤 호통보다 강력한 말이었다. 디아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루카스도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있었고, 그 증거로 지금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서 방황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쉽게 그를 조종하는 방법 대신, 방향을 일러 주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난 두려워. 여태 잘못된 선택만 반복했던 내가 제대로 된 길을 어떻게 판단하지? 무엇이 현혹이고 무엇이 조언인지는…….”

“사람은 누구나 욕망과 분노를 품고 살아요. 그게 옳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만, 의지가 있는 사람은 옳은 것을 구분할 수 있기에 그 욕망을 억누르고 사는 거죠. 그리고 그 욕망을 부추기고 본능만을 따르게 하는 것이 현혹입니다.”

트리샤의 현혹도 그랬다. 트리샤의 주술은 루카스의 잠재의식에서 열등감과 폭력성을 끌어내고 디아나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으로 힘을 얻었다.

즉, 주술이 잠재의식을 현실로 데려왔을 뿐,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건 아니었다.

“내 밑바닥이었나…….”

루카스가 낮게 읊조렸다.

“그대를 원한 것도 내 저열한 욕망이었고? 그래서 내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 거야?”

“그건 별개의 문제예요. 폐하와 제게 부부의 연이 없는 거죠.”

“만일 내가 모든 걸 제대로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루카스가 간절히 되물었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카스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성급한 질문이었다. 제대로 되돌리고 나서 물어야 했는데.”

디아나의 뜻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없었다. 디아나는 변화한 루카스의 모습에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도대체 내가 즉위하고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려 줄 수 있겠지. 솔직히, 디아나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진실을 말할지 믿을 수 없어.”

디아나는 그런 루카스의 모습에서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주술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트리샤는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루카스의 관심을 독점했었다.

그러나 단검에 찔린 후로 루카스의 본능이 깨어난 건지, 트리샤의 존재가 잘려 나간 것 같았다. 그게 언제까지 지속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지만.

“폐하는 즉위 후, 외척 세력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셨어요. 그리고 대공가에 큰 적의와 역모의 혐의를 두셨습니다. 지금 황실과 의회에는 폐하를 두려워하는 이들만 남았고, 조만간 명분을 만들어 대공가를 역모로 처분하실 계획을 세우셨어요.”

“……대공가가 역모를?”

당사자가 이리 되물으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고 곧 루카스는 기억을 전부 찾을 것이다. 잠깐 과거의 기억을 엿본 충격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일 테다.

“폐하가 그러길 원하셨습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애초에 역모인데 명분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루카스 멋대로 죄를 씌운다는 뜻이었다.

“내가 에드윈을 질시한 건 사실이다. 아니, 난 그가 미웠다. 나보다 3년 먼저 태어나서 모두의 관심을 독점하고, 늘 나보다 뛰어난 기준을 남겨서 나를 한심하고 나약한 자로 만든 그를 저주했어.”

어린 루카스도 알았다. 실은, 모두가 에드윈 같은 황태자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왜 그 기억의 조각에선 그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던 걸까.”

루카스는 소년 무렵부터 황태자 처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 낯선 광경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무척 그리운 감정이 드는 광경이었다. 과연, 그 기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뭔가…… 어디서부터인지.”

루카스는 처음 디아나를 찾아왔을 때보다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것도 내가 현재를 바로잡으면 알게 되는 걸까.”

“아마 그럴 거예요.”

루카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선…… 대공가에 지운 역모의 혐의를 벗기겠다. 무익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어. ……그렇겠지?”

루카스는 제 의견을 내고도 마지막에 디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대답 대신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겨우 방향을 찾은 루카스를 향한 작은 격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