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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9화 (169/184)

169화

디아나는 기도한다는 명목으로 다니엘을 자주 만났다. 그렇게 바깥의 정보를 접하고 에드윈이 위험한 강을 건너지 않도록 매번 안부와 함께 당부를 전했다.

루카스가 이상해진 원인은 성유물이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현재 황실의 상태를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의 축복이 있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그 마녀가 냉대를 받을 수도…….”

“아니.”

다니엘의 긍정을 디아나가 단숨에 끊었다.

“폐하의 혼란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트리샤의 악의도 쉽게 사라질 만한 게 아니야.”

다니엘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달라진 건 없어.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

“제롬 경이 어서 돌아오길 바라야겠군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망설이던 질문을 꺼냈다.

“전하께선……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계시겠지?”

“당장 일으키진 않으실 거라고 오늘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를 모으신 건 사실이잖아. 그것도 전시 태세로.”

“그런 것 같습니다.”

디아나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디아나와 트리샤의 싸움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 하지만 에드윈과 루카스도 그랬을까.

이전의 생에서 에드윈과 루카스의 사이는 이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땐 디아나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드윈과 루카스의 충돌은 당사자의 패배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제와 대공이 부딪치면 그것은 곧 전쟁이 되기 때문이다.

“공작님, 소식을 전하려면 황실의 문이 닫히기 전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대공 전하께 따로 전할 말씀이라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디아나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믿었다. 그러니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면 디아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디아나가 제일 하고 싶은 말들은 남의 입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니엘이 처소를 나서자 곧 시녀장인 엠마가 들어왔다.

“공작님, 차를 가져왔어요.”

어릴 때부터 황실에 들어와서 일했던 엠마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트리샤의 행적을 일거수일투족 관찰하고 있었다. 본래 자신의 주인이 트리샤의 농간으로 궁에서 쫓겨났으니 자연스레 디아나와 그 목적이 일치한 것이었다.

“폐하께서 그 계집에게 자유롭게 침소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뺏으셨다고 합니다.”

엠마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또한, 그 계집이 간호를 자청했는데 몇 번이고 거절하셨다고 해요. 오전 내내 안달이 나서 시종장을 들볶더니 이제야 겨우 처소에 틀어박혔다는군요.”

엠마는 고소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 처소에서 혼자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하는 디아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건 확실하지?”

“네, 황실의 원칙이고…… 특별히 감시하는 눈을 늘렸어요.”

그러나 여태 트리샤는 누군가의 힘을 빌린 적이 없었다. 혼자서도 주술을 쓸 수 있다는 게 트리샤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했다.

“그보다, 방금 폐하께서 황태후 폐하께 찾아가셨대요.”

새로운 소식이었다. 루카스는 번민을 거듭하다가 제 손으로 연금했다던 어머니를 찾아간 것 같았다.

“그래? 그게 좋은 영향을 주길 바라야지.”

디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의 루카스는 주술에서 벗어난 데다가 혼란을 느끼곤 있지만, 과거의 생을 어느 정도 떠올린 상태였다. 루카스라는 한 사람으로서 결정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

황태후가 연금된 곳에 아무 소식 없이 나타난 황제는 궁인들을 물리고 조용히 처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태후가 평소 피우던 담배의 잔향이 이곳저곳에서 자욱하게 풍겼다. 화려했던 공간은 그 색을 잃은 채 몰락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루카스는 천천히 처소를 가로질러서 황태후가 틀어박힌 침소까지 들어섰다.

“누구냐.”

황태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루카스가 한 발을 더 내딛자 항상 화사하게 꾸미고 있던 제 어머니의 민낯이 보였다.

안색이 파리하고 신경질적인 여인은 루카스를 보자마자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루카스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없었던 장면이었다.

“하, 네 어미를 직접 죽이기라도 하려고 온 게냐?”

황태후에게선 술 냄새가 풍겼다. 게다가 그녀가 피우는 담배에서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루카스가 입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거센 비난이 느껴졌다.

“아니면 이 꼴이 된 나를 비웃으려고? 과연, 네 아비를 닮아 잔혹하고 비열한 성정이구나!”

아직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멋대로 말을 내뱉은 황태후는 루카스 앞에서 술을 들이켰다. 루카스는 낯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왔냐니까!”

앙칼진 목소리가 루카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무수한 기억이 쏟아진 후 혼란스럽고 또 혼란스러워서 디아나에게 찾아갔지만, 그녀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번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떠올랐다. 세상 모두가 루카스를 비난한다고 해도 아직 어머니가 있었다.

“어마마마, 전…….”

자랑스럽고 고귀한 황실의 핏줄을 이었다며 늘 루카스를 소중하게 여겨 줬던 어머니였다. 비록, 그 어머니가 황실이 아닌 외척의 편이고 매사에 냉혹한 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루카스에겐 그래도 어머니였다.

“날 어미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가둬 버리지도 않았겠지! 배은망덕한 것.”

황태후 스텔라가 분을 참지 못하고 술잔을 던져 버렸다. 루카스의 발 근처에 떨어진 술잔은 쨍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이 깨졌다.

“어마마마라고 부르지도 마라, 끔찍한 네 아비의 위선을 보는 것 같아 속이 뒤집히니까.”

“그 무슨…….”

스텔라의 눈동자에선 분노를 넘어선 광기마저 느껴졌다. 오로지 황실의 후계자를 낳아서 자신의 권세를 확보하려고 했던 인생 전부가 부정당하자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거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 광기를 부추긴 건 트리샤가 몰래 무언가를 섞어 둔 스텔라의 담배에 있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드는 일종의 마약이었다.

“하, 다 필요 없다……. 내 인생은, 뭐였지? 고작 너처럼 나약한 것을 낳아 기르려고 내 인생을 희생하다니, 그런 회한은 다시없어…….”

“어마마마, 저는…… 그러니까, 어마마마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루카스의 녹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의 조각이 흘러들어 오면서 자신이 얼마나 최악의 인간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찾은 것이었다.

이 세상 모두가 황제라는 이유로 루카스를 참아 냈다 해도, 적어도 어머니만큼은 한 사람으로서 루카스를 봐 줄 거라고 믿어서였다.

“아아, 널 기른 건 실수였어…… 그때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너도 네 아비처럼 약으로 절여서 침전에 처박아 뒀어야 했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황은, 제 아바마마는 병으로…….”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침전의 베일 너머로 잠든 아버지를 당연히 여기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선황을 대신하여 권세를 휘두르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왜 내가 그리 나약하고 한심한 아이를 낳아야 했던 거야? 왜, 그레이스 언니의 아이처럼 강하지 못한 거야? 내가 언니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

루카스는 제 어머니가 무언가에 취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동시에, 그것이 그녀의 숨겨 왔던 본심이자 진심이라는 것도.

“그래도 난 하나뿐인 자식인데…… 그래도 조금은 사랑했으니 나를 기른 거라고…….”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 끝을 맺지 못했다. 스텔라는 그런 제 아들을 혐오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하! 그래, 너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해 버린 거야. 하필, 네 아비가 우리 가문을 건드리려고 해서 빨리 손을 쓸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만 아니었어도 더 건강하고 제대로 된 아이를 낳았을 수도 있는데!”

타인의 눈초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이 아직도 루카스의 곁에 있는 이유가 오로지 머리에 쓴 황제의 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루카스의 인생은 전부 그런 식이었다. 황태자였기에, 유일한 황위의 계승자니까, 그리고 이제 진짜 황제가 됐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거다.

“내가…… 있는데도 말입니까.”

루카스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을 던졌다. 스텔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대로 된 아이를 낳았으면, 너 따위는 필요 없었어. 어차피 나약한 것, 모른 체하면 죽었을 테지.”

루카스의 녹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스텔라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루카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랑한 적 없는 자식이라고 해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악한이라도 그런 말을 들어선 안 됐다.

“하.”

루카스의 입에서 헛된 소리가 나왔다.

“하하…… 그 기억은…… 환상이 아니었어.”

기억의 조각에서 황태후는 항상 권력을 독점하고 반 테스 가문을 위해서 제국을 휘둘러 댔다. 그 외엔 황제인 루카스의 존재에 단 한 번도 관심을 준 기억이 없었다.

스텔라는 언제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 기억에서도, 현실에서도.

“너도 정신이 나간 게냐? 하긴, 너 따위가 그렇겠지. 넌 날 때부터 늘 모자라고 나약했으니.”

“……아니, 난 지금 완벽하게 제정신이야. 뭔가에 취한 당신과는 달리.”

루카스가 낮게 말했다. 이제 스텔라의 독설에 마비가 된 것처럼 더는 가슴이 조여들지 않았다.

“맞아, 난 어리석은 자야. 그러니 당신 같은 여자한테 기대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겠지. 당장이라도 연금을 풀고 내 잘못을 사죄하려고.”

그 순간 스텔라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러고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루카스에게 다가왔다.

“루카스? ……그래, 내 아들이 당연히 이 어미를 버릴 리가 없지. 나는 네가 뭔가에 홀렸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래, 그래서 일부러 독한 소리를 한 게야. 네가 정신을 차렸으면 해서.”

스텔라는 취기를 못 이기고 루카스 근처에서 풀썩 쓰러졌지만, 이내 무릎으로 기어서 제 아들의 발목을 붙들고 위를 올려다봤다.

“루카스, 하나뿐인 내 소중한 아들…….”

지금 스텔라가 붙드는 것은 루카스 본인일까, 권력을 향한 도구일까. 이미 답은 알아 버린 후였다. 우습게도 그 사실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제 어머니의 본심만은 평생 모르는 게 나았으련만.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 없었던 존재겠지.”

루카스가 차갑게 스텔라의 손길을 걷어찼다.

“루카스, 왜 그러니? 우리 아들…… 너는 내 유일한 아이란다.”

스텔라의 말에 루카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인생은 처음부터 잘못돼 있었다. 루카스는 제 어미에게조차 그저 황실의 후계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생명이었다.

“그래, 날 낳아서 기른 건 당신의 실수였어.”

루카스의 녹안 안에서 무언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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