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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8화 (168/184)

168화

대공저의 알현실엔 루모스 기사단원을 비롯한 주요 가신들이 모여 있었다. 에드윈은 그들을 내려다보는 의자에 앉아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현재를 분석한 보고를 듣는 동안에도 그의 흑안엔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지금의 폐하는 즉위한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폭정을 일삼고 있습니다. 역사에 없는 행보입니다. ……명분은 체스터 대공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간 반역자가 됩니다.”

“폭군에게서 제국을 구하는 거라면 명분이 있소.”

“어쨌든 전쟁이 될 겁니다. 수도가 전화에 불타는 걸 보고 싶은 겁니까?”

루카스의 즉위 후 폭풍같이 변하는 정세에 대공령에 있던 가신까지 죄 올라와 의견을 성토하고 있었다.

특히나 체스터 대공가는 대대로 무력에 큰 자신을 가진 가문이었다. 지금의 대공가는 수도에 머물러 있었지만, 영지에서 직접 올라온 자들은 여전히 호전적이었다.

“그만.”

에드윈이 낮게 말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말을 멈췄다. 과연, 사람들을 내려 보는 자리에 앉는 자는 한 마디만으로도 힘이 있었다.

“군사는 일으키지 않는다. ……당장은.”

디아나가 루카스의 손에 있었다. 그런 약점을 안은 채로 전쟁을 섣불리 시작할 수는 없었다.

또한, 개인적 이유를 떠나서 수도를 전란에 휩싸이게 하는 건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에드윈은 곧 돌아온다는 제롬을 아직 믿고 있었다. 루카스를 현혹하는 마녀를 처단하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였다.

“하오나, 전하!”

“내가 그리 정했다. 다만, 언제라도 전시를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허락한다.”

“……따르겠습니다.”

아무리 호전적인 체스터가의 가신들도 그 주인인 에드윈 본인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강한 피를 이어받은 에드윈이었다. 여태 대공가의 명맥이 황실에 준할 정도로 길었던 건 역대 대공들이 모두 강하고 올곧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럼, 회의는 이만 파한다. 저녁에 다시 모이도록.”

“예, 전하.”

에드윈은 빠른 걸음으로 알현실을 나섰다. 딜런은 그런 에드윈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피며 바짝 그를 쫓았다.

아마 지금 가장 군사를 일으키고 싶은 사람은 에드윈 자신일 것이다. 다행히도 딜런의 주군은 격정에 휘말려서 그른 판단을 내릴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 수도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

에드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긴 머리카락에 묘하게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클란은 에드윈을 보고 부드럽게 예를 올렸다.

“보다시피 나는 무척 바쁘다.”

본론만 간단히 하라는 뜻이었다. 에드윈은 당장이라도 황실로 쳐들어가서 디아나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길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곧 충돌할 만한 시국이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에드윈의 신경이 곤두선 게 보였다.

“너무 큰 염려는 거두십시오. 다니엘이 황실에서 사제의 신분으로 카를 공작님을 매일 뵙고 안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에드윈을 붙들어 두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에드윈이 무슨 짓을 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공작님께선 무척 의연한 태도를 보이셨다고 합니다. 늘 전하께 안부를 전하신다고 합니다.”

이 순간 가장 힘든 처지에 처한 디아나가 견뎌 내고 있는데 에드윈이 모든 것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강한 분입니다. 아마 공작님은 그곳에서 나름의 전쟁을 하고 계신 거겠죠.”

“그래, 강한 사람이다.”

그 사실이 에드윈을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주위에선 모두 디아나의 의연함을 다행스럽게 여겼지만, 에드윈의 마음은 달랐다.

디아나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건 에드윈이 가장 잘 알았다. 의연하다는 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런 디아나를 떠올리면 에드윈은 가슴이 에이고 또 에였다.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황실의 감시 때문에 다니엘의 전달이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간밤의 일입니다.”

“뭐지? 더 심한 일이 남아 있나?”

에드윈이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데클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궁에서 사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밀이라 다니엘도 내막은 모르지만…… 황제 폐하께서 복부에 작은 자상을 입었고, 그게 아마도 카를 공작님이 하신 거라는 추정이 있습니다.”

“디아나가 루카스를 찔렀다고?”

에드윈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디아나가 왜, 어떻게 루카스를 찔렀단 말인가. 황제는 평소에도 호위가 많았고 자객의 위협을 대비하고 있어서 대공인 에드윈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지위였다.

“설마…….”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 루카스와 디아나가 단둘이 남았다는 가정이었다. 호위도 궁인도 물리는 곳이라면 침소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드윈의 눈동자가 분노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의연한 디아나라도 자신을 범하려 들었다면 반격했을 거다. 그러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저도 같은 추론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상합니다.”

데클란은 에드윈의 표정 변화를 본 것만으로도 그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공작님께는 아무런 처분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동이 더 자유로워지셔서 다니엘을 직접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외적으로도 공식적으로도 상해 사건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그건, 폐하의 뜻이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루카스는 그런 걸 용서할 인물이 아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안 그래도 폐하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문제의 트리샤 양을 멀리하고 무척 혼란스러운 모양으로…… 잘은 모르겠지만, 칼에 찔렸을 때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이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아마, 일시적인 일이겠지만요.”

에드윈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루카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인 것은 이해했지만, 여러 가지로 의문이 많았다. 하긴, 제정신이었으면 디아나가 살아남았을 리 없었다.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씁쓸함이 남았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거군.”

에드윈이 아는 디아나는 누군가를 쉽게 찌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루카스라고 해도 디아나가 그런 상황까지 몰아붙여졌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 왔다.

지켜 주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대공가로 데려왔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해서 분노가 일었다.

“제롬 경에게 전해라. 이젠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에드윈은 알현실에서 내렸던 명령에 후회가 일었다.

“전하.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합니다.”

“디아나가 직접 칼로 누군가를 찔렀는데, 어떻게 해야 이보다 심각한 상황이 되지? 난 내 여인이 위험에 처한 걸 지켜보고만 있을 정도로 무능하지 않다.”

지금 에드윈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정세의 불안이나 황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디아나를 혼자 위험한 곳에 내버려 뒀다는 자책감이 매초 그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니콜라를 돌보는 하녀가 말하길, 최근 며칠 니콜라에게 열도 발진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리샤가 마력을 사용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데클란의 맑은 눈동자가 에드윈을 향했다. 그는 수도사로서 이단이자 사악한 붉은 일족의 힘을 경계하고 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에드윈과는 그 처지가 약간 다른 것이다.

“그대들은 모른다. 두려운 건 사악한 마법만이 아닌, 인간 그 자체다.”

에드윈이 굳은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 황실의 깃발이 보였다.

“권력과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그 바닥이 없는 법이니.”

루카스도 그런 인간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루카스 자신이 권력과 욕망에 치여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라지 못한 것인데 결론이 최악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는 제롬 경과 달리 속세에서 떨어져 살아온 자라 잘 모르겠군요. 저희 의형제들은 모두 수도원 출신이나…… 제롬 경만 세상에 나갔으니까요.”

“수도사들은 이단을 멸하는 게 목적이겠지만, 난 다르다. 디아나를 지키고 이 제국의 혼란을 막을 의무가 있어.”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롬 경을 포함한 저희도 대공 전하 못지않은 각오와 목숨을 걸 생각으로 이 일에 임하고 있으니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에드윈은 선뜻 답을 주지 않았다.

“동쪽 땅엔 이미 내 병력을 보냈다. 제롬 경이 정말 나만큼 절실하다면, 현장은 그들에게 맡기고 당장 여기로 와서 협력이 되라고 전해라.”

“예. 감히 말씀드리건대, 제롬 경만큼 이번 일에 절실한 자도 없을 겁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과거 아버지가 되어 주셨던 분의 정의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종교에 대한 광기로 미쳐서 학살한 게 아니었다는…… 진실을 보고 싶은 겁니다.”

에드윈은 그런 데클란을 흑안으로 또렷이 주시했다.

“그 또한 소명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나의 정의는 현실에 존재한다.”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줬던 수도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하지만 에드윈에겐 아직 기회가 있었다. 디아나가 죽기 전에, 과거에 갇히기 전에, 그녀를 구할 시간이 있다.

“난, 그대들처럼 회한을 남길 수 없다.”

에드윈은 결심을 굳힌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봤다.

***

잠시 후, 데클란이 집무실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딜런이 한 남자를 데려왔다. 딜런의 친형이자 드노아의 측근인 알렉이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드노아 경은 결정을 내리셨나?”

에드윈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애초에 드노아가 선대공비의 청으로 에드윈을 불러들인 탓에 틈을 내줬고, 그 사이에 디아나를 황실에 빼앗겼으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드노아 경께서는 우선 이 서신을 전하고, 대공 전하께서 부디 근본적인 도리를 지키시길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알렉이 공손히 건네는 서신을 받은 에드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서신을 바로 벽난로에 넣어서 불태웠다. 알렉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런 에드윈을 주시했다.

“이게 내 답이다.”

에드윈의 목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드노아는 이미 황실에 영향력을 잃었고, 선대공비의 실각으로 세력의 근원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드윈은 그걸 이용할 작정이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라지.”

드노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친 에드윈이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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