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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7화 (167/184)

167화

루카스의 상태가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누가 그걸 지적할 사이도 없이 루카스가 벌컥 몸을 일으켰다.

본래 상처는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성큼성큼 주위의 사람을 헤치며 어딘가로 급히 향하는 발걸음이 트리샤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루카, 어디로 가는 거야? 상처부터 살펴야 해!”

트리샤가 다급하게 루카스에게 따라붙으며 말했지만, 루카스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녹안으로 잠시 트리샤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우선 상처부터 봐!”

트리샤가 루카스의 앞을 막아섰다. 루카스의 녹안에는 의아함과 황당함이 서려 있었다. 트리샤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루카스에게 주술의 영향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샤, 주제넘은 짓을 삼가라.”

루카스가 낮게 일갈한 후에 걸음을 옮겼다. 트리샤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그 뒤를 쫓았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루카스가 찾은 것은 디아나의 침소였다. 황제인 루카스가 나서자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디나?”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루카스는 침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손이 뒤로 묶인 디아나를 보고 잠깐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감히 누가 이런 짓을!”

가장 당혹스러운 건 트리샤였다. 주술은 꾸준히 유지했는데도 한순간에 기운이 사라졌고 루카스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보고서 몇 살이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가장 불길한 것은 ‘디나’라는 호칭이었다. 루카스는 단 한 번도 디나라는 호칭을 입에 담은 적 없었다. 그건 과거의 기억에만 있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모르는, 영원히 몰라야 하는 셋의 진짜 이야기에만.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거야? 디아나가 루카를 단검으로 찔렀어. 지금 배에 난 상처 말이야. 그러고 루카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가 지금 깨어난 거야.”

트리샤가 다급하게 변명하듯 말했다.

“디나가 날 찔렀을 리 없다.”

“아니, 그건 분명히…….”

“여기서 그 광경을 목격한 자가 있나?”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루카스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디아나에게 다가가 손목의 결박을 풀었다.

“전부 나가라.”

“하지만…….”

“당장!”

날이 선 위세는 주술을 사용한 후부턴 볼 수 없던 것이었다. 트리샤는 어쩔 도리 없이 궁인들과 문을 나서야 했다.

단둘이 남자 디아나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루카스를 바라봤다. 그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트리샤에게도 묘하게 냉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확신이 부족했다.

“디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번에는 디아나도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디나라는 호칭은 과거의 루카스만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그조차 디아나가 입지를 잃어 가며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호칭이다.

하지만 분명 결혼 초기엔 즐겨 부르던 이름이었다. 아직 루카스가 변하기 전, 서로가 어색한 신혼부부였을 때다.

“이상해, 모든 게 너무 이상하다.”

루카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척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그게 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루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붙들었다.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디아나가 자꾸 신기루처럼 흔들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푸른 눈동자만은 선명했다. 루카스가 좋아했던, 그리고 동경했던 호수처럼 고요하고 신비로운 눈동자였다. 그런 디아나조차 루카스의 뒤섞인 기억 속 모습과 사뭇 달랐다.

“아니야, 나이가 달라진 게 아니야…….”

루카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읊조렸다. 트리샤에게서 느낀 이질감은 나이 때문이 아니었다. 디아나의 모습을 보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셋은 동갑이었고 디아나는 여전히 루카스의 기억처럼 아름다웠다.

“디나. 왜 한마디도 안 하는 거야?”

기나긴 꿈은 너무도 슬프고 가슴을 꽉 메어 왔다. 루카스는 혼돈으로 가득한 머릿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에였다.

“아니면, 이것도 꿈인가?”

트리샤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긴 꿈을 꾸는 동안 일생이 주르륵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장면은 멈춘 그림 같았고, 어떤 그림은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건 단순한 꿈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그립고 서글픈 마음…… 그건 가짜일 수 없었다.

“나를…… 원망하는 건가.”

스쳐 지나가던 꿈의 장면에서 디아나는 점차 생기를 잃고 웃음이 사라졌다. 그걸 떠올린 순간, 루카스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앉아 있는 디아나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윽, 머리가…….”

루카스의 숨이 헐떡거리는 게 극심한 통증으로 보였다. 디아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했지만, 그보다 루카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더 놀랐다.

‘리샤에게 후작령을 내리려고 해.’

머릿속에서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눈이라도 뜨지 그래? 꼭 인형이랑 하는 것 같다고.’

마치, 석고상처럼 굳은 디아나의 얼굴도 떠올랐다. 왜 그때는 몰랐던 것인가. 디아나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울면서 루카스를 보고 있었다.

‘그게…… 제게 하실 말입니까.’

‘물론, 그대는 황후이자 리샤의 좋은 친구잖아.’

그때 디아나의 심장은 쪼개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인형도 아니었고 초목도 아니었으며 무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푸른 눈동자는 항상 루카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짓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조차도.

“내가…… 디나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제 머리를 감싸 쥔 루카스가 젖은 녹안으로 디아나를 바라봤다. 루카스의 진짜 본심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서툴렀던 루카스가 아닌, 트리샤의 주술에 홀린 루카스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루카스였다.

“그건 꿈이 아니었어.”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전부, 루카스가 직접 겪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대체 그건 뭐였지? 지금의 나는?”

루카스의 녹안이 디아나를 간절히 바라봤다. 자신을 원망한대도 좋았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알 수 없는 과거인지 답을 얻고 싶었다.

“부탁이다. 그게 뭐였는지, 무엇이 현실인지 알려 줘.”

처음으로 루카스가 디아나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루카스는 늘 타인을 대하는 것에 서툴렀고, 좋은 감정도 좋게 전달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상대가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그것에 실망해서 화를 내곤 했다. 루카스는 그저 어리석고 그릇이 작은 사내였기에.

“기억이 드문드문해. 부황의 죽음, 내가 황제가 된 것…… 어마마마는 어떻게 됐지?”

루카스의 안색이 창백했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기억이 너무 많아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디아나는 여러 가지 심경이 교차하는 채로 그런 루카스를 바라봤다. 자신은 진작 수도 없이 겪었던 혼란과 고통이었다. 고작 이 한 번으로 루카스가 대가를 치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디나 그대는…… 그대만은 언제나 내게 진실을 말해 줬잖아.”

주술이 풀린 루카스의 본심은 디아나를 택했다. 그 얄팍한 우정보단 디아나의 곧은 마음에 믿음이 가는 것이다. 디아나는 눈물을 흘리다 제 머리를 쥐다가 괴로움이 가득한 녹안으로 자신을 보는 루카스를 보며 가느다란 숨을 뱉었다.

“그건,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기억인 거지……? 꿈이 아닌 거지……?”

루카스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게 바로 자신이라고.

“네.”

디아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나 원리는 몰라요. 하지만, 그건 분명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에요.”

루카스가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사실을 디아나의 입으로 들으니 전신의 힘이 빠졌다.

“지금은…… 지금 우리는 뭐지?”

“현재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디아나가 말해 줘서는 의미가 없었다. 진실은 루카스가 직접 확인하고 깨달아야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아마 이 변화는 성유물에 피를 묻혔기 때문일 것이다. 루카스는 목숨을 잃지 않았기에 회귀하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기억이 흘러 들어간 것 같았다.

성유물로 몇 번이나 회귀한 디아나에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루카스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기를, 오랜 시간 동안 바라고 있었다.

“만일, 계속 이렇게 혼란스러우면…… 난 뭘 믿어야 하지? 디나, 그대는 내 황후이니 계속 곁에 있어 주는 거지?”

“전 폐하의 황후가 아니에요.”

루카스의 기억은 엉망으로 꼬여 있었다. 아마 일시적인 부작용일 것이다.

“황태후 폐하는 얼마 전 폐하가 직접 연금하셨죠.”

“내가……?”

기억에 없는 행동을 뒤늦게 알았을 때 소름이 돋는 기분은 끔찍했다.

“비비안 샤리즈를 기억해 주세요.”

디아나는 자신과 비슷한 희생을 겪은 비비안을 떠올렸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루카스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주술에 의한 행동이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틈을 준 건 제국의 황제로서 그의 그릇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디나, 그대의 진실은 뭐지? 날 원망하나? 혹시 내가 아직 떠올리지 못한…… 더 심한 짓을 했나?”

루카스가 어디까지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어디까지 깨달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디아나의 마음이 괴로웠던 일, 고요히 울음을 삼켰던 일…… 전부 말하자면 아무리 긴 시간이 있어도 부족할 것이다. 디아나는 다시 과거의 어둠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남은 것은 루카스의 몫이지, 디아나의 책임이 아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진실은 하나.”

디아나가 제 무릎에 가련하게 의지하고 있는 루카스를 단호하게 떼어 냈다. 루카스는 불안에 휩싸인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봤다. 마치 어미에게 버림받는 새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루카스가 어디까지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게 될지는 디아나도 알 수 없었다.

“트리샤 블랑은 단 한 순간도 제 친구였던 적이 없습니다.”

루카스의 녹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폐하 스스로 찾아야 해요.”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향했다. 루카스는 그 등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부디 마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을 직시하세요.”

고요한 한마디 이후로 디아나는 입을 닫았다. 이제 여길 떠나서 자신의 진실을 찾으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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