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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6화 (166/184)

166화

그 순간, 디아나는 이전의 생에서 기계적으로 자신을 탐하던 루카스의 손길을 떠올렸다. 그 불쾌함과 비참한 느낌도 몸서리칠 만큼 싫었지만, 지금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더 강했다.

“그만해요!”

에드윈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고 제 안에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 차이가 루카스의 손길을 더 역겹게 만들었다. 감히, 이런 더러운 자에게 제 몸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버둥대지 말고, 어디 다리를 더 벌려 봐. 어차피 내 황후가 될 텐데 내숭은 필요 없다.”

루카스가 한층 거칠게 완력으로 치맛자락을 들치고 디아나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이 순식간에 얼어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디아나의 머리에 루카스가 누구인지는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뒷일이 어떻게 될지도 전부 지워졌다. 지금은 그저 이 더러운 손길이 제 몸의 은밀한 곳에 닿을 수 없게 해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크윽……!”

문득, 루카스의 비명이 들렸다. 그때까지도 디아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확실한 건, 자신의 몸을 탐하던 루카스의 손길이 멎어서 다행이라는 것뿐이었다.

“감히…… 감히, 짐을…….”

원통한 목소리와 함께 루카스가 제 복부를 감싸는 게 보였다. 그제야 디아나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디아나의 손에는 루카스의 피가 묻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섰고, 본능이 늘 몸에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내 루카스를 찌른 것이다.

“역시…… 네년은 에드윈의 사주를 받고…….”

단검은 손바닥보다 작았지만, 그 칼날은 꽤 예리했다. 다만, 즉흥적인 공격이었고 단검의 크기가 워낙 작아서인지 루카스의 출혈이 크진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에겐 침소에서 여인에게 찔렸다는 것이 무척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하라고…… 말했잖아요.”

디아나도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끊은 적은 있지만, 누굴 해쳐 보는 건 처음이었다.

디아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루카스의 복부와 제 손에 들린 단검을 번갈아 봤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궁인들과 트리샤가 침소로 들이닥쳤다.

“세상에, 폐하께서 칼에 찔리셨다!”

트리샤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그러자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루카스를 살폈다. 기절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는데도 루카스는 디아나를 분으로 노려보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폐하의 처소로 모시고 당장 전의를 불러.”

그 말대로 궁인들이 루카스를 업고 나갔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찌른 것을 후회해야 할지, 죽지 않을 정도로 찌른 것을 후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람을 찌른 손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디아나는 황제에게 해를 가한 증거물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느다랗게 손을 떨고 있었다.

“결국, 저질렀구나.”

트리샤가 디아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트리샤가 원한 전개는 아니었지만, 이것대로 좋았다. 루카스는 이미 많은 세력을 쳐냈고 지금 당장 황후로 삼아서 카를 공작가를 흡수할 필요가 있으니 디아나는 황후가 되긴 할 것이다. 대관식에서 잠깐 모습을 보이고 유폐될 불행한 황후가.

“잘했어, 디아나.”

트리샤는 다른 궁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디아나의 귓가에만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네 각오라는 것도 겨우 그 정도인 거야.”

불과 오늘 저녁의 만찬 때 자신을 위협하던 디아나의 기세가 우스울 정도로 꺾였다. 디아나는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루카스는 이익을 위해 디아나를 황후에 앉히긴 하겠지만, 이번 일로 끝까지 디아나를 증오할 터였다. 그것도 크게 보면 트리샤가 그렸던 그림이었다.

“황후가 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고작 이런 것도 못 견뎌서…… 전부 허세였구나.”

트리샤였으면 이 정도는 참고도 남았다. 아니, 황제에게 몸을 바치는 것 정도는 고난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건 트리샤가 디아나의 처지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에드윈과 애정이 남았다고 해도 한 번 내준다고 닳는 몸도 아니거늘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디아나 네가 너무 순진하고 나약하다는 걸.”

트리샤가 코웃음을 쳤다. 디아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칼을 쥐고 있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네게 어떤 처분을 내리실까? 아까보다 더 내일 아침이 기대되네.”

“……아까보다?”

겨우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트리샤의 악의가 진하게 읽혔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루카스를 부추겨서 자신을 범하게끔 한 것은 트리샤의 작전이었다.

디아나는 그제야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디아나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트리샤의 악의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흐음, 난 궁금해졌어. 격노한 폐하가 네 이용 가치도 잊고 직접 널 참하실지…… 어떤 고문이라도 하시며 분을 푸실지…… 아니면 그 모든 걸 황후 책봉식 이후에 널 가둔 채로 평생 갚아 주실지.”

트리샤 싱긋 미소 지었다.

“물론 나는 마지막이 가장 좋지만. 뭐, 노력은 해 볼게.”

“어차피 답은 네가 정하는 거잖아.”

“들켰네? 난 네가 평생, 이 황실에 갇혀 있길 바라니까, 뭐. 하지만 네가 이렇게 빨리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 줄진 몰랐어. 고맙게 생각할게.”

트리샤가 디아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궁인들이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모였다.

“디아나 카를은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한 중죄인이다. 당장 무기를 빼앗아 보관하고 행여나 자해하지 못하도록 손을 뒤로 묶어 밤새 이곳에서 감시해라.”

“잠깐! 날 묶어서 가두는 것으로 충분하잖아. 이건…… 내 어머니의 유품이야.”

디아나가 단검을 꾹 쥐었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트리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여태, 성유물인 이 단검을 지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모든 생, 모든 기억에서 그랬다. 디아나는 혹시라도 트리샤가 이 단검의 비밀을 알아내거나, 이 단검을 지니지 못해서 운명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

“응? 그러니까 더 수상해지는데. 디아나 넌 원래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잖아. 그 단검에 뭐라도 있는 거야? 혹시 날 죽이기 위한 극독이라도?”

“그런 건 없어, 아무리 나라도 어머니의 유품은 소중해.”

후, 트리샤가 코웃음을 쳤다. 디아나가 소중히 여길수록 트리샤는 더욱 그걸 뺏고 싶어졌다. 그 단순한 심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디아나가 자신을 이길 리가 없었다.

그래, 연회에서 디아나가 말했듯이 태생부터 모든 게 다른 것이다. 땅에서 구르고 진창에서 발을 담그고 살았던 트리샤의 마음 따위, 디아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께 가 봐야겠어.”

디아나가 경계의 눈초리로 트리샤를 봤다.

“근위병은 당장 저 단검을 빼앗아서 조사해라.”

“예.”

꾹, 디아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태 잘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견뎌 냈는데, 또 이렇게 트리샤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게 미칠 듯이 괴로웠다.

“포박도 잊지 말고, 감시를 엄중히 하도록.”

“예!”

트리샤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디아나를 봤다.

“그럼, 내일 봐. 그때까지 네 머리가 몸에 붙어 있다면 말이야.”

한순간에 디아나 카를은 차기 황후에서 황제 시해자가 됐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역모와 같은 대역죄였다. 루카스가 디아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게 제국의 황제라는 지위였다.

혼자 남겨진 디아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포박을 받아들이고 잠자코 등을 벽에 기댄 채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루카스에게 범해지느니 그를 찔렀을 것이다. 그러니 후회는 없었다. 트리샤는 그런 자신을 나약하다고 말했지만, 그건 트리샤가 정말로 소중한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두렵진 않아.”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매번 생이 끝나 갈 때 풍기는 죽음의 냄새가 아직 와닿지 않았다. 막연히 내일이 오고 그다음 날이 밝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어떤 책도 이런 식으로 끝나선 안 돼.”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정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게도 기적이 일어날지 모르지.”

디아나는 제 손에 루카스의 뜨거운 피가 묻었을 때의 감촉을 떠올렸다. 불쾌하고 끔찍했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감각도 존재했다.

은빛 단검의 날에 묻은 루카스의 피는 어째서인지 잠깐 반짝인 것 같았다. 그게 눈의 착각이었는지, 정말 성유물의 다른 힘인지는 이 밤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성유물이 내게 주어진 이유가 있을 거야.”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원작의 디아나는 반복되는 회귀가 절망적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여기가 디아나의 마지막 장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날이 밝았는데도 루카스는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밤새 그 곁을 지키던 트리샤는 잔뜩 곤두선 신경으로 전의를 노려봤다.

“폐하께서 어찌 깨어나지 못하시는 거냐? 분명 가벼운 상처라고 했잖아.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전의 모두를 참하겠다!”

트리샤의 권한을 넘어선 일이었지만, 최근엔 너무 당연해진 황실의 분위기라 전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는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 측근인 트리샤가 황실을 통제한 지도 꽤 됐다.

“왜 대답이 없어!”

“폐하께서 입으신 상처는 얕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정도 상처 때문에 정신을 잃으시는 것은…… 의학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째서 폐하께서 깨지 않으시는 거지?”

트리샤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전의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저마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누가, 이리 시끄럽게…….”

아주 작았지만, 분명 루카스의 목소리였다. 트리샤는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루카, 정신이 들어?”

루카스의 녹안이 잠시 트리샤를 봤다. 그 순간 트리샤는 작은 이질감을 느꼈다. 뭔지 모를 불안과 닮은 감정이었다.

“너는…… 리샤냐?”

루카스가 혼란스러운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루카, 날 잊은 거야? 어디가 아파? 전의들이 있어, 안심해.”

“넌, 더 어렸을 텐데…… 뭐지, 그 모습은.”

“루카, 나는 곧 열아홉이 되잖아. 그건 루카도 마찬가지고.”

트리샤가 당황한 시선으로 전의를 찾았다. 전의는 조심스럽게 루카스를 진찰하고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트리샤의 눈에는 루카스가 절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나의 디나는 어디에 있지?”

루카스의 태연한 질문에 트리샤의 심장이 쿵,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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