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니콜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확연히 흔들렸다. 다니엘의 귀띔으로 니콜라를 에드윈이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라 할 수 있었던 도발이다. 무엇보다 제롬의 조사 결과가 디아나에게 자신감을 줬다.
트리샤도 디아나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트리샤의 마력이 니콜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 그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불안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루카, 많이 취한 것 같아. 시간도 너무 늦었고.”
트리샤가 서두르고 있었다. 아직도 미소를 잃진 않았지만, 디아나의 눈엔 그 불안이 읽혔다.
“내일 예부 대신들과 대관식 이야기도 나눠야 하는데.”
이미 오늘의 할 말을 마친 디아나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술에 취한 루카스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그 비위를 맞추는 트리샤는 꽤 우스운 꼴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로는 복수가 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한대도 트리샤가 디아나에게 저질렀던 악행과 루카스의 파렴치한 행동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연회를 이만 마칠까요?”
“디아나 그대도 피곤할 테니. 뭐…… 그러지.”
굳이 디아나의 말에만 반응하는 루카스는 취기가 짙어 보였다. 트리샤는 사각사각 제 마음 어딘가에서 벌레가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벌레는 디아나가 심은 불안이란 이름의 벌레였다.
트리샤가 디아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거다. 우스운 일이었다. 과거엔 늘 디아나가 트리샤를 과소평가했는데, 이젠 그 실수를 트리샤가 하고 있었다.
***
연회가 파하고 트리샤는 아무도 없는 방에 숨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실수, 실수, 실수의 연속이 자꾸 떠올라 좀처럼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도대체 디아나는 어디까지 밝혀낸 걸까. 애초에 사라와 니콜라를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아니, 니콜라만이라도 어딘가 빼돌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땐 니콜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트리샤 인생의 걸림돌일 뿐인 모자란 아이라고.
“그 잘난 공작가의 딸이 비열하게 나오시겠다?”
아까 연회의 자리에서 신분이나 태생을 언급하던 디아나의 위선적인 미소가 생생했다. 그거로도 모자라서 일부러 니콜라의 이름을 말해서 트리샤를 더욱 위협했다.
“전력을 다하겠다더니…….”
트리샤가 분노로 짓씹듯이 혼잣말했다.
“그래 봐야 제게 반한 대공을 이용하는 거면서! 난…… 나는 달라. 신분도 남자도 없이 여기까지 혼자 올라왔다고. 이건 불공평해…… 처음부터 불공평했어!”
디아나에게 찔린 진실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사각거리는 벌레는 여전히 마음을 좀먹는 것 같았다. 니콜라의 이름을 말했다는 건, 필시 니콜라가 제 수중에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끝까지 내 걸림돌이 되는구나.”
니콜라가 죽으면 자신의 힘이 어떻게 되는지, 그것만은 사라에게 듣지 못했다. 다만 트리샤의 혈통이 일깨운 기억엔 남자 형제의 생명력을 빨아들여서 마력이 작동하는 주술이 일족 모두에게 걸려 있다는 것만 있었다. 그 대가로 남자아이들은 머리도 마음도 자라지 못하는 거고, 주술의 대가로 계속 생명력을 빼앗기는 원리였다.
“내게 빼앗기는 운명인데, 왜 발목을 잡느냐고!”
트리샤에게 니콜라는 온통 성가신 인상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막연히 깨달은 것은 제 어머니가 무력했던 이유였다.
아마 어머니는 어떤 이유에선지 생명력을 대신 바칠 남자 형제가 없어진 것이리라. 그래서 본인의 생명력을 쓰다 그렇게 쇠약해진 거다. 불행하고 비참한 여자. 트리샤는 죽으면 죽었지 그 꼴로 연명하고 싶진 않았다.
“잘 생각해, 트리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트리샤가 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래, 우선 대공과 연을 끊어 놔야 해. 그래야 공평하지.”
둘은 틀림없는 연인 관계였다. 그건 혈연과는 달라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서로를 향한 믿음과 애정이 강하다고 해도, 만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디아나가 정조를 저버린다면……. 처음엔 그 사실만을 원망하더라도, 언젠가는 디아나까지 원망하게 될 것이다. 트리샤가 아는 사내란 죄 그런 족속뿐이었다.
“멍청한 사내들은 정조에 집착하지.”
트리샤가 실소를 뱉다가 이내 새로운 사실을 떠올렸다. 트리샤의 추측대로면 디아나는 이미 정결을 잃었을 것이다.
루카스가 그 사실을 안다면? 디아나는 양쪽의 남자들에게 모두 버림받는 셈이었다. 그리고 허울뿐인 황후가 되는 거다.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후…… 역시 넌 내 수를 따라잡지 못해.”
루카스는 이미 디아나에게 이성적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 욕정을 부추기는 것은 단지 오일 한 방울로도 충분했다.
루카스와 디아나 모두 내궁에 있었다. 그 상황에서 색욕을 부추기면 루카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선했다. 게다가 그는 무소불위의 황제가 아닌가. 누구도 루카스를 막아설 수 없었다.
“너무 쉽네.”
다시 제 안색을 찾은 트리샤가 후련하게 웃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루카스가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샤의 예상대로 루카스는 잠을 청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과음한 날이면 오히려 잠에 쉽게 들지 못해서 고생했다.
“루카, 아직도 잠이 안 와?”
“그래.”
“내가 손을 문질러 줄게. 그러면 혈액순환이 잘 돼서 금방 잠들 거야. 항상 그랬잖아.”
물론, 항상 수면 향을 함께 썼기 때문이었다.
트리샤가 루카스의 침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건 그 효과를 몇 번 본 후였다. 트리샤는 익숙하게 루카스의 손을 문질렀다. 트리샤는 루카스의 손을 꾹꾹 지압하면서 색욕을 부추기는 약이 스며들기를 기대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루카스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트리샤가 슬쩍 하반신을 훔쳐보자 발기한 페니스가 옷섶 사이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제 남은 일은 간단했다.
“오늘 디아나 정말 예뻤지.”
쉬운 암시였다. 루카스의 기억을 토대로 불러내는 성적 대상을 되새기는 것이다.
“어서 두 사람이 합궁해서 후계자를 낳으면 좋겠어.”
루카스가 몽롱한 상태로 제 입술을 핥았다. 약효가 돌았다는 뜻이었다.
“그거 알아? 디아나의 살결은 눈처럼 하얗고 실크보다 부드러워.”
트리샤는 살며시 속삭이고는 멍한 루카스의 녹안에 불이 붙는 것을 확인했다. 곧, 루카스는 벌컥 몸을 일으켰다. 트리샤는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루카스에게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다. 트리샤는 잔뜩 기대를 안고 잠자리에 들면 됐다.
“벌써 내일 아침이 기대되네.”
트리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루카스의 뒷모습을 좇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디아나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엠마의 시중을 받아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전의 생을 반복해서 떠올리면 내궁의 이 처소야말로 디아나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덕분에 이 장소가 낯설지 않았고, 침대에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피로와는 달리 정신이 너무 곤두서서 좀처럼 잠이 들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디아나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에드에게 편지라도 전할 수 있다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강제로 떨어지니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단 하룻밤, 대공저에서 에드윈과 보냈던 시간이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운명이 이렇게 가혹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행복이었을 텐데, 그 사실이 유난히 서글펐다.
‘아니, 에드를 믿어야 해.’
그는 가혹한 운명을 알면서도 디아나를 택했다. 디아나는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반복되는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에드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 책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린 같은 밤하늘 아래 있으니까…….’
디아나는 속으로만 에드윈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디아나가 얕은 잠에 빠져들 무렵, 처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디아나의 처소 문을 저리 난폭하게 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황제인 루카스였다.
“폐하……? 어찌 이곳에.”
디아나가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나 어둠 속의 루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성큼성큼 디아나가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폐하, 이러시면 곤란해요.”
루카스가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루카스에게 범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전신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 끔찍한 일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여긴 황실이고, 루카스는 황제였으니까.
“그만! 더 오지 마세요!”
디아나의 외침이 무색하게 루카스가 거칠게 디아나의 어깨를 쥐었다. 루카스에게선 묘한 냄새가 풍겼고, 그의 녹안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내 황후가 될 거 아닌가.”
루카스가 그대로 디아나의 어깨에 힘을 줘서 강제로 눕힌 후에 그 위에 올라탔다. 에드윈이 아닌 사내가 이런 접촉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그 상대가 하필 루카스라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짐을 막을 사람은 오지 않아.”
루카스가 제 입술을 핥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디아나를 내려다봤다.
“사실, 난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범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리 아름다운지, 그 알몸은 어떤지, 구멍까지도 예쁜지, 알고 싶었거든.”
섬뜩한 목소리였다. 루카스의 집착을 알고는 있었지만, 전신에 비늘이 돋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루카스가 사내인 이상 그 완력을 이길 수 없었다.
“폐하, 이렇게 강제로 범하지 말아 주세요. 대관식이 끝나고 제가 황후가 되면 그때 정식으로…….”
디아나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이치엔 맞는 일이었지만, 루카스에겐 전해지지 않을 말이었다.
이내 루카스의 거친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디아나는 제 허벅지를 누르는 단단한 페니스의 감촉을 견디기 어려웠다. 루카스는 급한 손으로 디아나의 가슴을 쥐더니, 만족스럽고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이건 겁탈입니다! 그만 멈추세요! 아니면…….”
“아니면, 어쩔 거지? 뭐, 계속 떠들어 봐라. 난 여인의 신음을 듣는 게 좋거든. ……게다가 줄곧 궁금했었다. 정말로 그대가 에드윈과 정을 통했는지 아닌지, 그것도 곧 알 수 있겠군.”
루카스의 거친 손길이 디아나의 치맛자락을 들쳤다. 배려라고는 한 자락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겁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