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만찬은 여느 무도회만큼이나 화려하게 꾸며졌지만, 정작 참가자는 셋뿐이었다. 트리샤가 즐기는 바로 그 삼각 구도였다.
하지만 지금 트리샤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었다. 분명 루카스에겐 자신에게만 미혹을 느끼는 약을 쓰고 있었고 주술도 발동시킨 상태인데 막상 눈앞에 디아나가 있자 모든 게 무색해졌다.
“그대의 푸른 눈동자는 너무 신비로워. 그 드레스가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았군.”
“영광입니다, 폐하.”
루카스의 홀린 듯한 눈동자는 디아나를 향하고만 있었다. 아무런 술수도 부리지 않은 디아나에게 쏟아지는 루카스의 찬사가 트리샤의 가슴을 꾹 파고들었다.
“역시 우리는 운명이었다. 리샤가 모든 걸 바로잡아 줘서 망정이지, 애초에 짐에게 샤리즈 후작가의 여식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어.”
디아나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트리샤가 아무리 새처럼 지저귀며 말을 걸어도 그 미소 하나를 당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마구잡이로 부쉈다.
“대관식 준비가 오래 걸린다는 게 안타깝군.”
루카스의 녹안이 즐거운 듯이 반짝였다. 대관식을 치르며 디아나를 황후로 책봉할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이전의 생에서 그의 아내로 사는 것이 싫어서 자결까지 했던 디아나로선 소름이 끼치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폐하의 권위에 맞는 대관식이 되어야겠죠.”
“흠, 역시 카를 공작가의 여식이라 그런지 고귀함을 잘 이해하는군.”
“과찬이십니다.”
디아나는 미소와 함께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는 자신의 한미한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다. 디아나는 지금 이를 악물고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는 트리샤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불쌍한 노릇이었다. 트리샤가 적절한 선을 알았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트리샤는 정도를 몰랐고, 콤플렉스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의 아이를 낳아서 디아나의 신분으로 기르려고 한 것이리라. 제 신분을 스스로 탓하며 비열한 방법만 마련하는 트리샤의 한계였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카를가의 자손이라고 해도, 폐하의 고귀함에 비교할 수는 없죠.”
이 대목에서 디아나는 트리샤를 보면서 웃었다.
“타고난 신분이 다른걸요. 태생부터 다른 거지요.”
확실히 트리샤를 저격한 거였다. 테이블 아래에서 꾹 쥔 트리샤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안 그래, 트리샤?”
“……으응.”
디아나는 트리샤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속셈이었다.
“대답이 왜 그래? 잘 안 들려.”
싱긋, 디아나가 미소 지었다. 타인의 약점을 잡고 후벼 파는 짓은 디아나가 가장 경멸하는 짓이었지만, 상대가 트리샤라면 달랐다.
“폐하께선 타고난 혈통이 너무도 고귀하시잖아.”
“응, 그래. 당연하지.”
“고귀함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거야. ……폐하를 보니 너무 실감이 나요.”
트리샤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루카스는 그것도 모르고 기고만장해선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폐하께선 고귀하신 만큼 정말 관대하세요.”
“그런가? 자주 듣긴 하지만.”
“사실, 전 항상 트리샤가 걱정스러웠거든요.”
이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저 자신의 적과 전력으로 싸우는 것이다.
“리샤 정도면 똑똑한 편인데, 어찌.”
“그러니까요……. 하긴,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건 트리샤의 잘못이 아니죠. 폐하께서 그걸 알아주시고 편견 없이 대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디아나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자, 루카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는 본능적으로 루카스의 시선에 담긴 게 도덕적 우월감과 소유물을 향한 애정이란 걸 눈치챘다. 마치, 자신의 사냥개들을 보는 것과 같은 눈이었다.
“정말 영광이지, 폐하의 관대함엔 나도 평생 감사할 거야.”
트리샤가 악착같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루카? 우린 정말 신기할 정도로 통하는 게 많아서 너무 신기해.”
“그래, 내 개들도 나 외엔 리샤 너만 따르니까.”
트리샤가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그 안에서 일말의 초조함을 읽었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변화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트리샤가 아는 디아나는 루카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고 늘 세 명 사이에서 소외되는 역할이었다. 애초에 싸움의 상대가 될 수도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의 디아나는 트리샤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 폐하의 개들은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그래. 루카, 지금 개들을 보러 가는 건 어때?”
“흐음, 좋지.”
트리샤의 기억엔 개들과 함께 뛰어노는 루카스와 자신의 모습이 가득했다. 디아나는 늘 그 사이에서 끼어들지 못한 채로 시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재현하면 디아나도 제 주제를 알 거라고 여긴 것이다.
“저어, 폐하.”
“뭐지?”
“전, 사실…… 개들이 무서워요. 어릴 때 물릴 뻔한 적이 있거든요.”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디아나, 그대처럼 연약한 숙녀에겐 내 개들이 좀 거칠 거다.”
트리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폐하는 관대하세요.”
“그야 그대는 내 황후가 될 사람이니. 부부의 정은 이렇게 쌓는 게 아닐까.”
“전 정말 행복한 여인이네요. 정말 고마워, 트리샤.”
“친구로서…… 당연한 거지…….”
도대체 몇 번이나 트리샤에게 살해당했던가. 그건 자신의 영혼이 디아나가 되기 전에도 계속 반복되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트리샤가 디아나의 자식조차 살해했다는 것이다. 원작 디아나의 영혼에선 그 고통이 절절히 느껴졌다. 회귀하는 성유물을 가졌는데도 시간을 온전히 되돌릴 수 없어서 영원히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
그 고통을 지금의 디아나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여기서 패배해서 성유물로 회귀한다면 여태 사랑을 속삭였던 에드윈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맞아,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네.”
그건 일부 진심이었다. 시간은 회귀할 때마다 줄어드니 돌아간 시점에서 에드윈이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는 본래 원작에서 원정을 떠났다가 죽는 역할이었다. 또한, 에드윈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는 지금 디아나와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가 아닐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그러면, 음…… 우리 정원 산책할까? 루카는 정원을 좋아하잖아.”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디아나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 황실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정원을 멋대로 허물고 차지한 것도 트리샤였다. 디아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그런데 어쩌죠. 저는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트리샤와 둘이 다녀오세요.”
“아니, 됐다. 정원이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트리샤는 미약을 더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루카스에 대한 자신의 호감은 여전히 붙어 있었지만, 관심까지 따라오진 못했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땐 와인이 좋지. 자, 한 잔 더 할까.”
피처럼 붉은 와인 잔이 살짝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울렸다. 디아나가 몇 모금을 머금을 때 루카스는 거의 와인을 들이붓고 있었다. 최근 트리샤가 유도한 습관이었다. 우습게도 그런 트리샤 본인조차 홧김에 평소보다 더 와인을 들이켰다.
“재상의 보고를 받았는데 그 대공가가 쥐새끼처럼 조용해졌다지.”
“분명 폐하의 위엄에 떨고 있을 거예요.”
디아나가 내키지 않는 말을 했다. 하긴, 이 자리에서 내키는 말이 뭐 있겠냐마는.
“그래, 에드윈은 고작 그런 놈이다.”
열등감의 주박에 사로잡힌 사람은 또 있었다.
“대관식을 치르고 나서 꼭 벌하세요.”
“디아나 그대도 내 뜻에 따라 주니 솔직히 기쁘다. 난…… 사실 그대를 의심했을 때도 있었으니.”
취기가 오른 루카스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디아나는 루카스의 편을 드는 척하며 의도적으로 대공가의 탄압을 뒤로 미루고 있었지만, 그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아둔함이었다.
“폐하의 탓이 아니에요. 저도…… 폐하를 두려운 분이라고 경계했으니까요.”
“그것도 다 에드윈의 짓이다. 짐이 난폭하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게지.”
아니, 에드윈은 루카스에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여태 묵묵히 참아 준 제 사촌의 덕도 모르는 루카스가 잘난 듯이 떠들자 절로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제 가신들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것도 폐하의 은총이죠.”
“아니다, 황후가 될 그대의 근심은 내가 덜어 줘야지.”
디아나가 푸른 눈동자로 루카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루카스는 그 신비로운 푸른빛에 이끌려 눈을 떼지 못했다.
디아나의 눈동자는 신비로운 수면과도 같았다. 고요하면서도 강한 힘이 있어서 자꾸만 보게 됐다. 그런 디아나의 눈동자에 문득 수심이 서리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슬픈 눈을 하지?”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잊어 주세요.”
“아니, 말해 봐라. 난 꼭 들어야겠다. 공작으로 살지 못하는 게 아쉬운 건가? 아니면…….”
아니면, 에드윈과 함께하고 싶었던 건지. 의심은 지워도 지워도 흔적이 남았다. 루카스보다 체격도 건장하고 사내다운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가신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떠올랐어요.”
“고해라. 뭐든 내가 들어주겠다.”
“그게…… 너무 놀라운 이야기라서요.”
그 말을 하는 디아나는 트리샤를 잠깐 응시했다. 트리샤는 본능적인 불안을 느꼈지만, 지금은 디아나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하문하셨으니 솔직히 고하겠습니다. 부디 저를 어리석다고 탓하지만 말아 주세요.”
“허락하마.”
트리샤는 디아나의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다음 말을 막아야 했다.
“잠깐, 와인이 부족한 것 같은데…….”
트리샤가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디아나는 틈을 주지 않았다.
“제가 입궁하기 전에 학대받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어요.”
“그대의 품성답군.”
트리샤는 초조해질수록 수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단순한 학대가 아니었어요. 모두 남자아이인데 몸이 자라도 정신연령이 서너 살이었죠. 그래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봤는데, 어떤 수상한…… 이교도의 집단에서 무슨 짓을 한 모양이에요.”
툭, 트리샤가 냅킨을 떨어트렸지만, 루카스는 미처 보지 못했다.
“이교도라는 게 존재하긴 하나?”
“그래, 디아나. 그런 건 없어.”
“이교도인지, 반란 집단인지…….”
디아나가 슬쩍 방향을 틀었다. 어느 쪽이든 루카스가 적대적으로 인식하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그 수상한 집단에서 남자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심지어 그 아이들은 제국이 뭔지, 황제 폐하가 누군지도 모른답니다.”
그건 반역이었다. 루카스의 녹안에 어둠이 담겼다.
“그냥 어릴 때 병을 앓아서 모자란 거지. 빈민가에 그런 아이들은 많아.”
“트리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돌보던 한 아이가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 아이를 의원에게 보였는데 병의 흔적이 없었어.”
“그럼, 정신만 모자라는 거냐? 하지만 리샤의 말도 옳아. 안타까운 백성이 많다.”
“그런가요? 괜한 기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디아나가 한 수 물러났다. 아직은 트리샤가 건재하단 뜻이었다. 그러나 트리샤가 승리의 미소를 짓기도 전에 디아나가 강수를 뒀다.
“제가 돌보던 니콜라가 가엾어서 저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졌네요.”
마지막 말은 트리샤의 눈을 똑바로 보고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