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디아나는 자신이 처한 잔혹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디아나는 자신이 예전의 생에서 황후로 살았던 곳과 똑같은 장소에서 여전히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에드윈이 방법을 찾아 줄 때까지 무사히 버티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트리샤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넌 거절할 수 없었겠지.”
트리샤는 루카스에게 지금보다 더 세뇌의 정도를 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가 싸움을 걸어온 순간 그 자존심과 한 번이라도 디아나를 이기고 싶다는 열등감이 솟아났을 것이다. 디아나는 일부러 트리샤가 전력을 다하는 시간을 미루기 위해 그 심리를 흔든 것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디아나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열등감을 자극당한 트리샤는 당분간 루카스를 두고 디아나와 신경전을 벌이며 그것을 즐길 것이다.
문제는 그 승부가 명확해진 다음이었다. 어느 쪽이든 결판이 났다고 생각하면 트리샤는 망설이지 않고 사악한 힘을 전부 쓸 테다. 그래도 상황을 생각하면 디아나는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멀쩡히 이 황실에서 지내며 공작저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
“공작님.”
노크가 울린 후 딱딱한 인상의 시녀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본래 비비안의 시녀였던 엠마였다. 황태자비의 시녀였으니 차기 황후의 시녀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도 저녁 만찬에 참여하시라는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래.”
디아나는 오늘 밤에도 트리샤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극심하게 피로한 일이었지만, 사실 피로보단 루카스의 비위를 맞추는 자신이 역겨운 게 더 힘들었다.
“공작님께선 갑작스러운 변화에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엠마가 뜻밖의 말을 뱉었다. 디아나는 잠시 엄격해 보이는 엠마를 향해 시선을 뒀다.
생각해 보면, 비비안의 시녀였던 엠마가 트리샤의 만행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당연히 감정이 좋지도 않을 것이다. 전등 밑이 어둡다더니, 디아나는 자신이 편이 될지도 모르는 엠마를 새삼 자세히 봤다.
“이름이 엠마라고 했지. 전의 황태자비를 모셨다고.”
“그렇습니다.”
엠마는 원칙주의자였다. 처음 비비안을 엄히 대한 것도 그래서였고, 초야를 치르고 진정한 황태자비가 되자 주인으로 생각하고 섬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전 황태자비는 어떤 분이었지?”
“그분의 됨됨이를 감히 평가하기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황태자비로는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디아나는 엠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살짝 망설이던 엠마는 말을 이었다.
“그분의 가장 큰 실수는 친구를 잘못 사귀신 거라고밖에.”
엠마의 본심이 나왔다. 디아나의 진짜 의중을 떠보는 거였다. 황실은 소문이 빨랐고 카를 공작인 디아나가 의식을 잃은 채로 내궁에 도착했다는 걸 들었다. 만일 디아나가 트리샤와 한패라면 굳이 억지로 정신을 잃게 해서 데려오는 게 이상했다.
“나도 같은 실수로 고통받고 있지.”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 엠마와 눈이 마주쳤다. 두 여자의 시선 사이로 어떤 동질감이 스쳤다.
“그리고 그걸 이겨 내려고 해. 난, 맞서 싸울 거야.”
디아나가 먼저 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자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공작님을 돕고 싶습니다.”
엠마가 비비안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최소한 엠마를 인간적으로 대해 줬다. 초야에 실패하고 무시 아닌 무시를 받았음에도 엠마의 처지를 이해해 준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걸 지켜본 엠마는 트리샤가 흑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의 모든 불행한 일은 트리샤가 시초였다. 그건 엠마가 평생을 배우고 믿었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트리샤 블랑을 주의하십시오. 뭔가…… 술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디아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은 엠마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독의 여부를 항상 감시했는데도, 들키지 않는 무슨 수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디, 만찬에서 주의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
엠마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마침 그녀의 뜻을 확인해 볼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엠마, 혹시 황실에 다니엘 쇼라는 자가 있나?”
제롬의 조수인 다니엘은 황실에 잠입해 있는 상태였다. 그와 접촉할 수 있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전 못 들어 봤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응. 하지만 남의 눈을 피해서 확인해 줬으면 해. 가능하다면 몰래 만날 수 있게 해 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엠마가 결연히 말하고는 예를 갖추고 방을 나섰다. 이제 디아나에겐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엠마가 다니엘을 데려오길, 한밤의 만찬에서 루카스를 두고 트리샤와 다투길, 내일이 오길, 그렇게 해서 언젠가는 에드윈이 자신을 데리러 오길……. 그런 소망들이 디아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
2시간쯤 지나서 노크가 울렸다. 디아나가 짧게 답하자 엠마가 먼저 처소로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엠마의 뒤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니엘 쇼였다. 그는 디아나의 예상과 달리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게 다니엘이 황실에 쉬이 잠입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두 분은 말씀을 나누십시오. 저는 공작님께서 사제님과 기도를 올리신다고 해 뒀습니다. 문 앞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엠마의 철두철미한 말에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엠마가 자리를 비우자 다니엘이 디아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만…… 의연히 버티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잠시 트리샤의 열등감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야.”
디아나는 다니엘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루카스를 둔 트리샤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도 함께.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른다는 게 단점이지만.”
“아뇨, 시간을 끄신 건 훌륭한 판단이었습니다.”
“바깥과의 연락은?”
무엇보다 에드윈이 걱정스러웠다. 그의 성정에 자신이 황실로 납치된 것을 알면 거병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트리샤가 손쓰지 않아도 대공가는 역모죄가 된다.
“공작저는 무사합니다. 대공 전하도 막무가내로 입궁하신다는 것을 제롬 경의 다른 조수가 가까스로 말렸습니다.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는 붉은 일족의 거처 근처에서 발견한 남자를 데려왔습니다. 여인에게 홀려서 아이를 낳고 버려진 모양인데, 교황청의 이단 심문 재판에서 증인으로 세우도록 노력 중입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좀처럼 꼬리를 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 느껴졌던 그들이 증거를 남긴 것도 신기했다.
“발견한 남자는 두 명, 제롬 경은 그중 하나를 대공가에 보내고 나머지 하나와 함께 그들의 촌락에 잠입하겠다고 서신을 남겼습니다. 자세한 건 이것을.”
다니엘이 작은 쪽지를 건넸다. 그곳엔 자신이 아는 모든 상황을 적어 뒀다. 아무리 사제라고 해도 오랜 시간 내궁에 머물 수 없기에 미리 준비한 것이다.
“반드시 읽고 불태우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제게 지시할 것이 있으십니까?”
“앞으로도 기도를 빙자해서 꾸준히 날 찾아 주길. 그리고…… 대공 전하께 내 안부를 전해 줘.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라는 당부도.”
“물론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디아나는 잠시 짧은 생각에 잠겼다.
“혹시 다른 외부와도 연락책이 있나?”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카를 영지의 현자 오웬 경에게 이 상황을 전해 줘.”
“전하기만 하면 됩니까?”
디아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 어거스트는 이미 디아나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카를의 주군을 섬기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실제로 디아나가 수도에 발이 묶였을 때도 오웬을 보내서 대리 통치를 시작했다. 즉, 그에게는 카를을 움직일 명분과 현자의 현명함이 모두 있었다. 상황을 전한다면, 그는 최선을 찾아서 움직일 것이다.
“공작저는…….”
“이미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니콜라는 대공 전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다행이군.”
디아나는 걱정을 조금 덜어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훌륭히 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 디아나도 자신의 역할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디아나는 다니엘이 물러간 이후에 엠마의 도움을 받아서 만찬을 위한 채비를 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지만, 이 또한 디아나 몫의 싸움이었다.
“폐하께서 꽃다발과 함께 드레스를 보내셨습니다.”
“……본래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겠지?”
엠마는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은 이 드레스를 보지도 못한 채 궁에서 쫓겨났다.
“입겠어. 입고, 본래의 주인 몫까지 해내야지.”
“예!”
드레스는 무척 화려했다. 그냥 볼 때도 그랬지만, 막상 디아나가 입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빛이 났다.
우연인지 디아나가 즐겨 입는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였다. 그건 루카스가 디아나의 공작 즉위식을 보고 괜한 대리만족으로 주문한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차라리 모르는 게 다행이었다.
“저, 공작님…… 이 단검은.”
엠마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디아나는 아주 가느다란 체인 끝에 손바닥에 올라갈 정도로 작은 은 단검을 지니고 있었다.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았지만, 본래 황실의 법도에 황제를 가까이서 알현하는 자는 어떠한 날붙이도 허용될 수 없었다.
“내 보물이다. 어머니의 유품이지.”
“황실의 법도에는…….”
디아나도 알고 있었다. 이전의 생에서도 그 단검에 대해서 쓴소리를 많이 들었고, 때론 억지로 손에서 떼 놔야 할 때도 있었다. 여태 황실에서 단검을 썼을 때는 작정을 하고 미리 숨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상황이 비상사태라 차마 떼 놓기가 불안했다.
“아닙니다. 그것이 공작님께 힘이 된다면 저는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마워.”
엠마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만찬이 매일같이 이어졌지만, 언젠가는 디아나가 트리샤를 찔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더 잘 드는 나이프를 지니시는 건…….”
무심코 엠마가 제 생각을 뱉었다. 그제야 디아나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아니, 누굴 찌르는 게 목적이 아니야. 내 마음을 지켜 주는 거지.”
“제가 실언했습니다.”
엠마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만찬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디아나는 엠마에게 트리샤의 일을 전부 공유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니엘을 데려와 준 것은 물론, 방금 나이프를 권하는 것에서 확신을 느낀 것이다.
“엠마,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있는데…… 상식을 버리고 들어 줘. 트리샤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진실이야.”
“……예.”
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디아나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