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에드윈은 분노가 너무 깊으면 오히려 마음이 무섭도록 고요해진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심장부터 얼어붙은 것처럼 분노 이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목소리는 섬뜩하리만큼 낮게 나왔다.
“어머니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겁니다.”
“네가 시작한 일이다.”
에드윈은 굳은 얼굴과 눈동자로 제 어머니를 응시했다.
“네가 먼저 선을 넘었고, 내게 허락도 없이 디아나 카를을 데려왔다. 그리고 난 분명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느니.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존재를 대공저에서 지운 것뿐이다. 또한, 칙령을 따른 것이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변명은 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디아나가 선대공비의 손에 의해 황실로 강제 송환당해서 루카스와 트리샤의 수중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레이스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이런 위험한 시기에 황실에 반항하는 게 대공으로서 옳은 일이냐?”
에드윈은 실소조차 뱉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한 짓이 대공가를 위한 정의라고 믿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넘긴 디아나가 어떻게 될지는 그레이스의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디아나가 미웠어도 같은 사람이었고 같은 여자였다. 그 또한 그레이스에겐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에드윈은 제 어머니의 얼굴에서 냉정한 드노아의 얼굴을 봤다.
“대공가를 위해서?”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레이스를 향했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근본이 너무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공이 여기 버젓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레이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어차피 어머니인 자신에게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감행한 일이었다. 원망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테다.
“항상 대공가를 위해, 대공가를 지키려고 하셨죠. 그 마음, 이제는 제가 품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오한이 들었다.
“체스터 대공가를 섬기는 가신과 루모스 기사단은 들어라.”
그레이스의 모든 권한은 대공가에서 나왔다. 그걸 지키는 게 그녀의 사명이기도 했다. 어차피 어머니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녀가 제시한 논리를 그대로 돌려주면 됐다.
“나, 체스터 대공가의 주인인 대공이 명한다.”
에드윈은 감정 한 조각 담지 않은 흑안으로 제 어머니를 응시했다.
“선대공비의 결정은 대공인 나를 무시한 월권이었다. 아무리 나의 모친이라고 해도 이는 대공가의 기강을 흐리고 근본을 어지럽히는 일.”
“에드윈, 네가 설마.”
그레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에드윈은 잠시 여인에게 미쳐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이상 그가 손 쓸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늘 혼자 된 어머니를 위하는 다정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즉, 그레이스는 에드윈이 절대로 자신을 내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난 네 어머니다. 널 대신해서 판단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이었고…….”
“그건 언제의 일입니까. 내가 아직도 대리가 필요한 소년으로 보이십니까.”
그레이스가 뭔가 말하려고 하자 에드윈이 한 손을 들었다. 어느새 너무 장성해 버린 아들에게서 죽은 남편의 위압감이 풍겼다. 순간적이었지만, 너무 생생해서 말문이 막힌 것이다.
“들어라, 나는 대공으로서 대공가를 어지럽힌 선대공비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기어이 그 말이 나왔다. 그레이스는 제 귀를 믿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예우 차원에서 별채에 처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생활의 부족함이 없게 하라. 허나 처소 밖을 나갈 수 없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보초를 세워라. 이건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 누구도 번복할 수 없다.”
“대공 전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루모스 기사단장인 딜런이 먼저 무릎을 꿇자 나머지 기사단원과 대공가의 사람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단지 그레이스의 시녀만이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제 주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당장, 명령을 이행하라.”
에드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기어이 대공가에도 이치를 거스른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딜런은 착잡한 얼굴로 묵묵히 지시를 내렸다. 에드윈이 사실상 유폐를 명령한 별채는 본채에서도 꽤 떨어진 곳으로 무척 황량한 곳이었다.
“놔라, 난 선대공비야!”
“그래도 대공 전하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모두 에드윈의 명령에 토를 달 수 없었던 것은 그 원칙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이스와 스텔라는 각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됐다.
***
에드윈은 숨을 돌릴 틈조차 가질 수 없었다. 당장 디아나의 안위를 알 수도 없었고, 그럴싸한 방법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칙령을 피하려고 대공저로 데려왔다가 선대공비의 손에 넘겨지게 됐다니, 전혀 상상치 못했던 진행이었다. 모두 에드윈의 계획이었으니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건 당연했다.
“이건 내 탓이야.”
어쩌면 에드윈은 제 어머니의 민낯을 보는 걸 피해 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냉철한 드노아의 딸이며 성미가 불같은 황후 스텔라의 자매인데 왜 제 어머니만은 다를 거라고 여겼는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정세가 너무 불안합니다.”
제 역할을 마치고 온 딜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더러 내 보신이나 하라는 거냐?”
“전하가 당하시면, 아무도 지금 국면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충직한 직언이었다. 루카스의 폭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공인 에드윈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무엇보다 딜런에겐 디아나보다 주군인 에드윈이 더 소중하기도 했다.
“입궁하겠다. 지금 당장.”
에드윈이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적어도 제 눈으로 디아나가 무사하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루카스가 과연 어느 정도로 정신을 놓았는지도 알고 싶었다. 내막은 복잡했지만, 대외적으로 대공인 에드윈이 입궁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안 됩니다.”
딜런이 재차 에드윈을 말렸다.
“황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미 대공 전하를 적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루카스가 가장 먼저 없애고 싶은 건 나겠지.”
“그런데 어찌 적의 소굴에 홀로 가십니까. 저는 못 보냅니다.”
딜런이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카를 공작님께서 황실로 넘겨진 이후에도 공작저가 무사합니다. 분명…… 공작님께서 고군분투하며 얻어 내셨을 겁니다. 발루아 기사단을 그대로 두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디나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나도 내 역할을 하며 싸워야 한다.”
“황실에 전하의 무력을 대동할 수도 없고, 너무 위험합니다.”
딜런이 간절하게 에드윈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는 주군을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전하의 역할은 황실에 혼자 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닙니다. 카를 공작님이 황실에 묶여 있으니 밖에서 자유로운 전하께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잖습니까.”
그 말에 에드윈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디나가 죽으면 소용없다.”
하긴, 딜런과 에드윈은 처지가 달랐다. 에드윈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디아나였고, 딜런은 대공가를 섬기는 기사단장이다.
“전하!”
에드윈이 힘으로 딜런을 밀쳐 냈다. 이제 에드윈에게 디아나가 없는 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게 됐다. 대공가를 지키고 루카스를 저지한다 해도 디아나가 죽은 후라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대공 전하, 손님이 왔습니다.”
집사장 하프먼이 급하게 외치더니 딜런이 에드윈의 발목을 붙든 꼴을 보고 속으로 경악했다. 좋지 않은 타이밍인 건 분명했다. 하프먼이 눈치를 보며 물러서려고 하자 딜런이 눈짓으로 강하게 재촉했다. 뭔진 몰라도 딜런의 간절한 눈짓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제롬 하이든이 보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척 급하게 전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만…….”
제롬의 이름에 에드윈이 뚝 멈췄다. 딜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롬의 사람이라면 당장 에드윈이 입궁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어디 있지?”
“응접실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행이 있는데.”
“내가 직접 보겠다.”
에드윈이 급하게 말하고는 그제야 제 발목을 붙든 딜런에게 손을 뻗어 일으켰다.
“네 충심은 안다, 딜런.”
“……알아주시면 됐습니다.”
참으로 묘한 주종 관계였다. 딜런은 삐죽이며 대답했지만, 그 충의는 에드윈도 잘 알았다.
“딜런, 나는…….”
“전하와는 거의 일생을 함께했습니다. 굳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어서 제롬 경이 보낸 사람을 만나러 가죠.”
딜런이 호쾌하게 말하고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에드윈은 그런 그에게 감사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응접실에는 하프먼의 말처럼 묘한 일행이 있었다. 한 명은 수도사의 복장을 한 수려한 미남자였고, 한 명은 길에서 거지를 주워 온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밧줄로 손목을 묶인 채였지만, 딱히 학대를 당하는 것 같진 않았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수도사의 차림을 한 남자가 예를 갖췄다. 무척 우아했고, 남자로선 드물게 기다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제 이름은 데클란 쇼, 제롬 경과 뜻을 함께하는 자이며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예는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해라.”
데클란은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롬 경과 함께 동쪽 땅을 조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증거가 바로 이자입니다.”
데클란이 눈짓으로 함께 데리고 온 거지꼴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지저분한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고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동쪽 땅의 숲에서 붉은 일족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마찬가지로 숲을 헤매는 이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인지 능력이 무척 떨어진 상태였는데, 매일 약을 먹고 있으니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합니다만, 본인이 자청해서 밧줄로 손목을 묶고 다닙니다.”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지저분한 차림의 남자를 향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숙인 같았지만, 그 시선 처리나 표정이 얼마 전 고통스러운 체험을 했단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자의 신원은?”
“이자는 아직 자신의 이름이나 고향조차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데클란이 곁의 남자에게 눈치를 주자 그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이 당한 일을 고하면 됩니다. 이분이 그들을 없애 주실 거예요.”
데클란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이자 남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에게 속아서 그 산으로 따라갔습니다. 그곳에 그녀의 가족이 있다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자고…… 그 말을 믿었는데.”
최초의 증언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