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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0화 (160/184)

160화

트리샤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디아나의 몸을 씻기고 드레스를 입힐 것이다. 디아나의 취향이나 감정은 그들이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디아나는 시녀를 흘깃 보고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굳이 이런 상대에 힘을 빼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루카스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에 마음이 고요했다.

“아름다우십니다.”

한창의 채비를 마친 시녀장이 의례적인 말을 했다. 디아나는 거울 속의 무표정한 자신을 보다가 이내 화장대 앞에서 일어섰다.

시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디아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마 곧 루카스가 나타날 차례인 것 같았다.

“디아나. 다시 돌아왔군.”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등장이었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보고는 일어서 예를 갖췄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듯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지도 않은 것 같군.”

“네.”

디아나의 입가에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고운 미소가 떠올랐다. 루카스는 잠시 해야 할 말을 잊은 채 디아나를 바라봤다.

전부터 막연히 느꼈던 그리운 듯한 느낌과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가 주는 안정감에 꼭 눈앞의 안개가 개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원했던 일이니까요.”

“그대는 대공의 아내가 되겠다고 한 게 아니었나.”

루카스의 녹안에 의심과 증오가 배어났다. 디아나는 일부러 그 시선을 모르는 체,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절 되찾아 주셨잖아요.”

“그 말은…….”

루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트리샤의 말처럼 디아나는 원하지 않는데 에드윈이 멋대로 납치한 게 맞았다. 그 순간 숨길 수 없는 만족스러움이 그의 얼굴에 묻어났다. 그러자 디아나의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네, 저는 폐하께서 저를 찾아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디아나가 한 걸음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마음에 애써 묻으려던 에드윈이 떠올랐지만, 이곳은 전장이라는 사실을 억지로 되새기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날, 폐하와 단둘이 짧은 대화를 나눈 이후로…… 어째서인지 폐하를 잊을 수가 없었거든요.”

입가에 그려진 미소와 달리 가슴이 찌르는 듯이 아파 왔다. 불과 지난밤에 에드윈에게 입을 맞추던 입술로 이런 끔찍한 말을 해야 하는 게 너무 잔인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에드윈의 마음을 믿었다. 그라면 분명 디아나가 어떻게든 살아남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의 미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끔찍한 말도 할 수 있었다.

“나만 느낀 게 아니었군.”

루카스가 손을 뻗어 디아나의 뺨을 쓸어내렸다. 디아나는 급격히 굳어지려는 제 미소를 잃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럼, 대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사실인가?”

“아무 관계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어차피 둘이 왕래한 흔적은 조사했을 테다.

“공작이 되고 나서 너무 막막했거든요. 그때 마침 선대공비 전하께서 도움을 주신다고 하셔서…… 저는 바보같이 그 말씀을 따랐어요.”

디아나는 슬쩍 죄를 선대공비에게 떠넘겼다. 그녀가 이미 디아나를 적으로 간주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아니, 그대가 너무 순진했던 거다. 대공가는 원래 속이 시커멓고 음흉한 자들뿐이지. 하마터면 나도 그대를 의심할 뻔했다. 그 대공과 한통속이라고.”

“하지만, 저의 소중한 친구인 트리샤가 막아 줬겠죠?”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트리샤에겐 고마운 일이 너무 많아요. 지금 이렇게 또 폐하를 뵙게 해 줬으니까요.”

루카스의 입가에 흡족함이 고였다.

대공과 왕래가 있었던 이상 디아나는 의심을 완전히 벗을 수 없었다. 트리샤는 디아나가 속은 것뿐이라고 했지만, 만일 디아나가 여기서 반항했다면 정말 대공과 사통했다는 증거가 되니 바로 참할 생각이었다.

“그래, 하마터면 오해로 그대를 잃을 뻔했어.”

그게 아니라 루카스의 손으로 죽일 뻔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디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폐하, 한 가지 감히 여쭐 것이 있습니다.”

루카스는 제 기분이 좋을 때면 한없이 관대했다. 그 변덕이 하도 죽을 끓어 문제였지만, 다행히 지금은 무척이나 우쭐한 상태였다.

“뭐든 물어봐라.”

“폐하께서는 대공 전하를 언급하실 때 언짢으신 것 같았는데…… 어째서인지요. 물론, 저를 멋대로 데려가신 것은 맞지만 그건 전부 선대공비 전하가 사주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허, 그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지. 하지만 대공도 다르지 않다.”

디아나는 의아한 눈으로 루카스를 봤다. 한번 마음을 다지자 연기도 썩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참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공에겐 역모의 혐의가 있어. 아직 세간에 발표하진 않았지만…….”

“세상에.”

누구보다 에드윈의 결백을 아는 디아나였다. 그러니 불안할 필요는 없었다. 에드윈은 잘 해낼 테니, 자신도 여기서 잘 해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곧 혐의와 증거를 모아서 역모의 죄로 처단할 생각이다.”

여기서 에드윈의 편을 들면 상황은 악화할 뿐이었다.

“저어…….”

그나마 루카스의 성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됐다. 여태 한 번도 쓸모 있는 기억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뭐지?”

“저는…… 어찌 되는 걸까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마침 황후의 자리가 비었으니 그대를 책봉하려고 한다.”

“하오나, 저는…….”

루카스가 손을 내저으며 디아나의 말을 막았다.

“그대가 부적합하다는 것은 늙은이들이 둘러댄 궤변이다. 그대만큼 완벽한 황후는 없어.”

완벽한 황후. 그 말은 항상 수도 없는 칼날이 되어 디아나를 무수히 찔러댔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루카스는 디아나의 슬픈 눈동자에 빠져들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의 공작저와 가신들, 그리고 발루아 기사단. 그들 전부 선대공비 전하의 술수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워낙 악독한 여인이다.”

“네. 그러니까…… 역모를 벌하시기 전까지만,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가장해 주시면 안 될까요?”

루카스는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당장 대공가에 압박을 가해도 시원치 않을 심정인데 장난감을 놓친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디아나가 서글픈 눈동자를 하는 걸 보니 또 마음이 흔들렸다. 그야말로, 변덕이었다.

“대공가가 눈치채면, 제 가신들을 해칠까 두려워요. 그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폐하, 부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모든 증거를 모아서 단번에 벌해 주세요.”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에드윈이 트리샤가 마녀라는 증거와 그 힘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아 디아나를 이 사슬에서 구해 줄 테니까.

“그들이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을 더 참으란 말인가.”

“고귀하신 폐하께서 고작 그런 이들을 상대하실 수는 없어요. 모든 증거를 모아서 한 번에 처분하시면 온 제국이 폐하의 영광을 축복하겠죠.”

“흐음…… 뭐, 선대공비 따위에게 관심을 줄 가치는 없지.”

“네, 저는…… 폐하의 신성함이 더럽혀질까 두려워요.”

미약을 쓰지 않아도 루카스는 충분히 귀가 얇았다. 특히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에 약했다. 그러니 미약을 쓴 트리샤의 말은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지 예상하고도 남았다. 루카스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폭군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대는 현명하군. 가신을 아끼는 마음도 알겠다.”

“그러면…….”

“그래, 당분간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가장하겠다. 짐승처럼 도망치지 못하게 한 번에 궁지로 몰아넣겠어.”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황실 근위대와 대공가가 무력으로 충돌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황후 책봉은 내 대관식과 함께하면 되겠군.”

루카스가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디아나의 손을 쥐었다. 다행히 황실 예법에 따라 디아나가 긴 장갑을 끼고 있어서 맨살이 닿진 않았다.

솔직히 루카스와 이 이상의 접촉을 하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각오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새겨진 비참했던 그와의 결혼 생활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네, 감히 역모를 꾀한 자들을 처단하고 대관식에 오르시는 폐하의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빛이 비치는 것 같아요.”

디아나는 은근히 대관식과 황후 책봉을 거사 후로 미루고 있었다. 어차피 루카스는 그리 세심하게 생각한 게 아닐 것이다. 본래 이런 식으로 슬쩍 귓가에 속삭여서 루카스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가장하는 건 트리샤의 특기였지만, 디아나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흐음.”

“그런 폐하의 곁에 설 수 있다니, 카를가의 영광이에요.”

디아나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기려고 했던 루카스가 픽, 웃어 버렸다.

애초에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전의 생에서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루카스는 항상 폭군이 되곤 했다.

디아나는 여태 내심 두려워했던 루카스의 너무나도 심약하고 얄팍한 성정을 들여다보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남자 따위, 뭐가 그리 두려워서 침묵하며 살았던 걸까. 황제의 관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은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사실이었다.

“나도 그대를 황후로 맞게 돼서 다행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어. 샤리즈가의 여식은 뭐 하나 뛰어난 것이 없어서 황후의 자질이 못 된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여인을 저리 쉽게 버리는 게 루카스다웠다.

“처음부터 디아나 너와 결혼했어야 했어.”

“이제라도 바로잡으면 되지요.”

디아나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루카스가 디아나의 손을 한층 강하게 쥐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루카스와 자신 사이에 놓인 장갑의 존재가 감사했다.

“폐하.”

루카스가 녹안으로 대답했다.

“오늘 밤은 소중한 인연을 이어 준 트리샤와 함께 재회를 축하하면 어떨까요.”

선전포고는 마쳤으니 전진할 때였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래. 리샤는 정말 좋은 친구지.”

“이제 저까지 우리 셋은 친구……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루카스의 녹안이 만족감으로 가득 찼다.

“그래. 우리 셋의 재회와 앞으로의 우정을 축복해야지. 거기, 시종장. 당장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라 일러라!”

그 틈을 타서 디아나가 살짝 루카스의 손을 놓았다.

“성대한 연회를 여신다고 하니, 저도 준비를 해야겠어요. 황실의 연회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디아나가 시선을 피하는 게 쑥스러워서라고 생각하는 루카스는 이미 답이 없었다.

“그대는 지금도 완벽히 아름답다.”

사랑의 속삭임은 에드윈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디아나의 이야기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코 루카스가 될 수 없었다. 무수한 생을 반복하더라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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