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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9화 (159/184)

159화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들렸다. 콩콩,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쳐진 베일 너머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쯤 되면 디아나는 트리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 디아나 깨어났어?”

베일을 제친 트리샤가 대뜸 침대에 앉았다. 디아나는 상체를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디아나를 두고도 환한 미소가 흘러넘치는 트리샤가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뭐야, 조금은 놀랐을 줄 알았는데.”

트리샤는 대놓고 실망한 태도를 보였다. 디아나는 그런 트리샤에게서 변화를 읽었다.

이전의 트리샤는 영악한 아이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비뚤어져 있었다. 욕심이 많았으며 피해의식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의 트리샤에게선 본래의 성정을 넘어선 비틀림이 느껴졌다.

아마 사라의 죽음과 동시에 힘을 온전히 얻으며 생긴 변화 같았다. 그리 사악한 힘이니 소유자에게도 영향이 가는 게 타당했다.

“머리 아프지 않아? 그런 무식한 약은 쓰지 말랬는데, 루카가 절대 네 몸이 다쳐서는 안 된다면서……. 정말 자상하지 않니?”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전보다 한층 앳되게 들렸다. 말투만 들으면 꼭 소꿉놀이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트리샤는 이미 인간의 선을 넘은 것이다.

“자, 차를 가져 왔어. 두통이 조금 나아질 거야.”

트리샤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잔을 건넸다. 디아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여 마른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트리샤는 기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가져온 차를 아무런 의심 없이 마셔 주는 거야?”

디아나는 답하는 대신 갈증을 축였다.

그때, 퍼즐 놀이를 운운하던 루카스와 트리샤의 모습을 관찰했을 때 고작 차에 뭘 타는 얕은 수작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디아나에겐 트리샤의 주술이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원작의 설정이자 트리샤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사실이었다. 디아나는 그걸 아는 트리샤가 굳이 수작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긴, 너는 워낙 똑똑하니까 이미 내 목적을 눈치챈 거지?”

디아나가 트리샤를 완벽히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트리샤는 디아나가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길 바랐다.

“아직 말하기 힘들 테니, 계속 들어 줘. 어차피 넌 말수가 적어서 항상 떠드는 건 내 쪽이었으니까 익숙해.”

싱긋, 트리샤가 미소를 지었다. 뺨에는 예쁜 홍조가 번졌고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트리샤는 지금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나는 말이지…… 예전부터 이 순간을 꿈꿔 왔어. 사실, 이게 맞는 거잖아. 너도 이전의 기억을 봤지?”

트리샤는 그보다 빛나는 순간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루카스와 디아나가 동시에 있어야만 가능했다.

“당연히 루카도 널 원하고 있어. 루카는 기억을 못 하지만, 그게 맞는 걸 본능이 아는 거야.”

디아나는 싸늘한 눈초리로 트리샤를 주시했다.

“물론, 내가 비비안을 일찌감치 쫓아 버린 건 너도 알고 있지? 지금쯤 대공 전하도 내 과거를 열심히 캐고 있을 테고, 뭐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 증거로 널 되찾았잖아.”

트리샤의 입에서 에드윈이 나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울분을 느끼게 했다. 에드윈은 감히 트리샤 따위가 더러운 입에 담아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네 뜻대로 되진 않아.”

디아나가 침묵을 깼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우리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진 거야. 그걸 깨트리려고 했던 네가 나쁜 거고.”

무엇도 트리샤의 잘못된 믿음을 깰 수는 없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너무도 바란 나머지 비틀린 욕망을 품은 트리샤는 셋의 기묘한 관계만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왜 내게 집착하지? 내가 없으면 루카스를 독점할 수 있을 텐데.”

바보 같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물었다. 한 번쯤은 꼭 묻고 싶었다. 왜 트리샤의 빛나는 순간에 반드시 디아나가 있어야만 하는 건지.

“디아나 넌 똑똑하잖아. 이미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물어보는 거야?”

트리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디아나를 응시했다. 디아나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그러나 전혀 달라진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트리샤는 철저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야, 우리는 원래 셋이었으니까. 그리고 역시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내겐 너의 그 사악한 주술이 통하지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 모두가 내 꼭두각시라면 아무 재미가 없잖아.”

순수한 욕망에 충실한 답이었다.

“괜찮아. 루카의 아이는 내가 낳을 거니까. 그리고 네 고귀한 신분으로 당당하게 키워 낼 거야. 그 아이가 언젠가 제국의 황제가 되는 거지. 가장 이상적인 결말 아니야?”

지극히 트리샤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트리샤는 이미 황후인 디아나를 제치고 주목받는 쾌감을 떠올리고 말았다.

항상 디아나보다 못했던 자신이 루카스의 다정함을 누리며 위에 서는 순간에야 겨우 트리샤의 욕망이 채워졌다.

“넌, 비틀렸어.”

“나만큼 순수한 사람도 없을걸?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잖아. 디아나, 네 모든 것을 전부 빼앗고 싶다고.”

“그런다고 해서 내가 될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순식간에 트리샤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건 내가 결정해.”

트리샤의 욕망은 복잡하고 기괴했다. 그건 아마 트리샤 자신조차 모르는 본성일 것이다.

디아나의 모든 걸 빼앗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디아나를 놓지 못하는 건 비뚤어진 집착 때문이었다. 트리샤는 언제나 디아나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트리샤가 빛나는 순간에는 반드시 생기를 잃은 디아나가 필요했다.

“넌 그저 태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다 가졌잖아. 그보단 시궁창에서 기어 올라온 내가 대단한 거 아니야? 게다가 내겐 힘이 있지. 네게만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온 세상을 미혹시킬 수 있는데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어?”

생글거리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트리샤가 격하게 분노를 쏟아 냈다. 그건 본래 세상을 향해야 했을 분노였다.

한때는 트리샤의 괴물 같은 면이 두려웠지만, 이렇게 민낯을 드러내자 오히려 디아나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디아나에 대한 열등감과 세상을 향한 울분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가 트리샤 안에 살아 있었다.

“확인해 볼래?”

디아나가 반문했다.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그게 무슨 뜻이야? 넌 이미 황실에 갇혔어. 현실 파악이 안 돼?”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트리샤를 봤다. 신비롭고 곧은 시선이 닿자 트리샤는 제 손을 움찔했다. 사악한 힘을 손에 넣고도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방증하듯이.

“난 갇힌 게 아니야. 내 의지로 여기 있겠다고 정한 거지.”

“정신 승리 해도 소용없어.”

“그건 너잖아, 트리샤.”

디아나는 침착하게 트리샤의 역린을 건드리고 있었다.

“확신할 수 있어? 주술 없이도 네가 날 제치고 루카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 내가 걸었던 건 미미한 주술이야. 루카의 진심이 날 택한 거고.”

“그러니까…… 그걸 확신할 수 있냐고.”

트리샤가 잠시 멈칫했다. 디아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데도, 루카스가 널 택할지…… 확인하고 싶지 않아?”

침착한 도발이었다. 트리샤도 머리로는 알았지만, 디아나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엔 오기가 서렸다.

트리샤가 기억하는 이전의 생에서 디아나는 루카스를 사랑한 적 없었다. 그 무심한 태도에 루카스가 먼저 질렸고 트리샤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디아나는 그 가정을 뒤엎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식으로 날 도발해서 시간을 끌어 보려는 거지.”

“그래.”

디아나는 피하지 않았다.

“……좋아, 이번엔 속아 줄게. 한 번쯤 확실히 해 두고 싶었어.”

트리샤도 피하지 않았다.

“그럼, 승부는 성립된 거야.”

트리샤가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도저히 디아나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디아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이 황실이 디아나의 전장이었다. 디아나는 최대한 루카스의 폭주를 막고 트리샤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에드윈이 트리샤를 막을 방법을 찾아올 거라고 굳게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트리샤.”

디아나가 차분히 이름을 부르자 트리샤가 디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디아나는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자취를 봤지만,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아니,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넌 평생 여기 갇혀서 나랑 루카 사이에서 살아야 해.”

“네가 이긴다면…… 말이지.”

하, 트리샤가 코웃음을 쳤다. 항상 저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가 부럽고 미웠다. 다른 사람을 한없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고고한 디아나가 나쁜 거다.

“설마 이 정도 장난이 내 전력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난, 아직 내가 가진 힘의 반도 쓰지 않았어.”

“그래.”

트리샤의 사악한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직 인간적인 면은 약했다. 그러니 트리샤가 디아나의 꿰뚫어 보는 시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전력을 쓸 거야.”

디아나가 담담히 말했다. 긴 악연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마침표를 찍겠어.”

트리샤는 현재에 집착했지만, 디아나에겐 또 다른 미래가 있었다. 트리샤로선 평생을 되풀이한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자기 자신으로서 지키고 싶은 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아니, 디아나 네가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겠지.”

디아나는 그런 트리샤를 동정하지 않았다. 한 인간으로서 불우한 생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트리샤가 저지른 죄의 면죄부는 될 수 없었다.

“우린 친구니까, 조언 하나 해 줄게. 루카는 꽤 난폭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어. 맞추려면 힘들 거야.”

트리샤의 구역질 나는 친구란 소리도 이젠 디아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네가 직접 경험해 보고 충고하는 거니?”

트리샤도 디아나의 변화를 느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루카와 나도 아직 친구야. 우정부터 시작해야 더 즐겁잖아.”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트리샤가 한껏 웃어 보였다.

“다만, 네겐 곧 닥칠 일이니까 생각해서 말해 준 거야. ……그래, 루카는 한때 시침 시녀들을 셋이나 데리고 범한 적도 있어. 거의 겁탈이었지. 그녀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아?”

그래 봐야 싸구려 허세였다.

“응.”

디아나는 그 천박한 놀음에 어울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네가 두렵지 않아, 루카스도 마찬가지야.”

희미한 미소가 디아나의 입가에 떠올랐다.

“트리샤, 너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감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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