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선대공비가 의도적인 침묵을 뒀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드윈의 정신 나간 짓에 동참했지?”
이제 디아나에게 입을 열라는 뜻이었다. 선대공비의 눈으로 볼 때 에드윈의 행동은 정신 나간 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디아나는 그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여전히 평범하게 사는 건 너무 어려웠다. 아무리 바라고 소원한대도 현실은 지금과 같았다.
“제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디아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게 그레이스를 분노하게 하더라도, 자신만은 에드윈의 진심을 지키고 싶었다.
“짐작하셨던 것처럼 전 처음부터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와 정을 나눈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모두 제가 바라고 원했던 일이었기에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 깊은 회한과 눈앞의 담담한 디아나를 향한 증오 비슷한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럼, 에드윈이 준다면 기꺼이 날 밀어내고 대공저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선대공비 전하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맹세코 없습니다.”
그레이스가 그 말을 순순히 믿을 리 없었다. 그녀는 체스터 대공가의 남자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추진력이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계속 디아나의 존재를 무시하는 걸 두고 볼 에드윈이 아니었다.
“제가 전하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을 지적하셨지요.”
“그래, 말재간은 네 특기가 아니냐.”
“저는 감히…… 전하의 상심을 반쯤은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차가운 실소를 뱉었다. 기울어진 눈썹으로 디아나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살기마저 느껴졌다.
“제가 미우시다는 것도 압니다. 전하께는 제가 나쁘다는 것도요. 그래서 어떤 말을 드려도 변명이 될 거라 여겼습니다.”
“허. 내가 널 미워한다고! 어처구니없는 소릴.”
그레이스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쾌함이 서렸다.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드디어 그레이스의 담담한 가면이 깨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디아나를 가리켰다. 디아나는 비난이 잔뜩 담긴 손끝을 애써 피하지 않았다.
“새로운 황제 폐하께선 아직 평정심이 없으시다. 게다가 전부터 은근히 에드윈에 대한 적의를 표하셨지. 그 상황에서 넌 구실을 준 거다. 여태 내가, 아버님이, 대공가가 지키던 도화선에 너라는 불씨가 붙은 거야!”
이것만큼은 디아나도 반박할 수 없었다.
“에드윈의 부인은 아무래도 좋다. 결혼 따위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어.”
처음부터 선대공비는 디아나를 대공가의 위협으로 정했다. 단지 아들의 여자 문제가 아닌 가문을 흔들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분노와 대공인 제 아들을 향한 배신감이 더 깊었다.
“하나만. 하나만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네게 더 할 말이 있느냐?”
“네, 있습니다. 꼭 드려야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황제 폐하께 일어난 이변에 관한 이야기이자 진짜 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 말재간으로 날 농락할 셈이구나.”
신뢰는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디아나는 기꺼이 선대공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들어 주기만 한다면 무릎 정도야 얼마든지 꿇을 수 있었다. 그런다고 닳아 없어질 긍지가 아니었다.
“맹세코…… 전부 사실입니다. 부디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선대공비가 침묵했다. 디아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의 유일한 측근인 트리샤 블랑이란 시녀가 있습니다. 모두 그 아이가 폐하를 홀려서 일어난 일입니다. 트리샤 블랑은 사악한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미약으로 사람을 매혹시키고 조종하고, 주술을 쓰는…… 마녀의 힘입니다.”
디아나가 숨도 쉬지 않고 뱉은 말에 그레이스가 겨우 시선을 줬다. 드디어 트리샤가 마녀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즉, 그 마녀를 없애면 해결된다?”
“네. 지금 백방으로 그 마녀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고 있…….”
“이제 보니 말재간도 형편없구나.”
그레이스의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리고 디아나의 이야기를 허황된 거짓으로 치부하는 게 틀림없었다.
공작인 디아나가 무릎까지 꿇고 간절히 고했지만, 마녀라는 단어 하나로 전부 형편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하, 이건 대공 전하도 직접 목격하신 일입니다. 트리샤 블랑을 제거해야 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직도 그레이스는 디아나의 말을 믿지 않는 채였다. 하지만 그런 상대라도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지 않아도, 반만 설득할 수 있어도,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리 간곡히 호소하니 기회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제 곧 증거가 수도로 도착하니 대항할 방법을 찾아서…….”
그레이스는 손을 내저었다. 그 방도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디아나도 분위기를 읽고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 오라.”
디아나는 그 명령에 조심스럽게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그레이스가 디아나의 어깨를 잡은 채 자신에게 가까이 당겼다.
“그때도 이렇게 네 귓가에 직접 경고했었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장에서 제 아들에게 티끌조차 되지 말라고 말했던 그레이스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때 선대공비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살기를 담아 속삭였다.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았다. 디아나는 순간 오한이 일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제 네게 해 줄 경고는 없다. 다만, 네가 그리 원하니 직접 트리샤 블랑을 제거하든지 해라.”
“전하……?”
그 순간, 그레이스가 강한 힘으로 디아나의 어깨를 떠밀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뒤로 넘어진 디아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스를 봤지만, 담담하고 서늘한 표정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와라.”
그레이스의 명령에 커튼 뒤에 숨어있던 황실 근위병들이 뛰쳐나와 디아나를 구속했다.
“전하! 실수하시는 겁니다. 대공 전하께서…….”
“에드윈은 아버님에게 갔다. 내가 직접 아버님께 에드윈을 불러들이라고 청했지.”
디아나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첫판은 졌지만, 이젠 져 주지 않겠다고 했거늘.”
디아나가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근위병이 뭔가를 적신 천으로 디아나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디아나는 바로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황태후께 확실히 고해라. 이번엔 내게 빚을 지신 거라고.”
“예.”
“이걸로 황실에 대한 대공가의 충심은 증명한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레이스가 칙령이 적힌 서신을 향해 시선을 줬다. 디아나가 조금만 주의가 깊었다면 황실의 문장을 봤을 텐데, 감정으로 호소하려고 한 게 패인이었다.
에드윈에게 그런 칙령을 보낸 황제가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진작 디아나를 넘기면 대공가의 충성을 인정하겠다는 칙서를 이른 아침에 받은 터였다.
“오늘은 예외였다. 다신 근위병이 대공저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근위병들이 일제히 선대공비에게 예를 갖추고 기절한 디아나를 들쳐 엎은 채로 물러났다. 그레이스는 자리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곧 돌아올 에드윈이 얼마나 반발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누군가는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했지만, 그레이스는 달랐다.
“네가 먼저 배신한 거다.”
그레이스가 허공을 보며 에드윈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너를 배신할 수 있지.”
그건 그레이스가 어릴 때부터 드노아 경에게 닳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레이스 본인도 부모를 이기는 자식이 될 수 없었고, 에드윈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전하! 방금…… 그, 황실 근위병들이 공작님을…….”
하프먼이 뒤늦게 달려와서 소리쳤지만, 그레이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내저었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본래의 고요한 대공가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
디아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황실 특유의 문장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입을 막았던 천에 무엇을 묻혔는지 아직도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이곳이 황실이라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는…….”
한참을 잊고 살았던 공간이지만, 동시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디아나가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 황실의 내궁이었다.
그저 악몽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본능이 이 공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카스의 황후로 살면서 끝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황후의 처소였다.
그 순간 디아나는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조여 와서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보다 큰 절망이 온몸을 엄습했다.
절대로 이곳만은 돌아오지 않으리라 수도 없이 결심하고 살아왔는데 운명은 너무도 쉽게 디아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놨다.
디아나는 억지로 숨을 쉬기 위해서 제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독한 기침과 함께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디아나 카를은 결국 여기로 돌아오는 운명인 거야…….”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책이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보지 못했던 나머지 페이지에 적힌 이야기가 다시 디아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어떤 것은 바꿀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책이 지금 일부러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국의 황후 디아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아름다웠지만, 체온이 없는 인형처럼 그 정교한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게 디아나의 본래 운명이었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황후는 그 심장조차 차가워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잊혔다.’
활자로 규정된 디아나 카를의 비참하고 서러웠던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가장 불행한 사실은 디아나 카를에게도 세차게 뛰는 심장과 따스한 숨결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는 황실의 독기에 서서히 시들어 가는 가련한 존재로 변했다.’
디아나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책의 내용도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의 변덕으로 무심하게 덮어 버린 책의 나머지 장에서 디아나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 아무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야.”
아직 결말은 정해지지 않았다. 적어도 디아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 여기서 절망하면 소중한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디아나는 그걸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었다. 그건 에드윈도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디아나가 사랑한 남자도 이 정도의 시련에 굴복할 리가 없다고.
“내 싸움의 장소가 바뀐 것뿐.”
디아나가 자신을 향해서 속삭였다.
“난…… 더는 이 공간이 두렵지 않아.”
한때 이곳은 디아나의 새장이자 아름다운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생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의 디아나는 고작 이런 감옥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