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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7화 (157/184)

157화

다음 날, 황실에서 보낸 정식 항의서가 대공저에 도착했다. 명분은 고위 귀족이자 카를의 공작위를 계승한 디아나 카를을 예법에 어긋난 형태로 데려간 것에 대한 규탄이었다.

즉, 에드윈의 결혼 선언은 법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며 조속히 원래 상태로 복구하라는 명령이었다.

“모든 게 너무 급하군.”

에드윈이 칙서를 구겼다. 지금 루카스는 전혀 제어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설령 이 결혼에 대한 칙령의 말이 옳다고 쳐도 굳이 황실이 이렇게까지 개입하는 모양은 좋지 않았다.

“아마 트리샤의 영향일 거예요.”

디아나가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이전의 생에서 루카스가 폭군이 되는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하지만 트리샤가 루카스를 붙들고 있던 미약한 이성을 끊어 버렸다.

“내가 이따위 칙서를 따를 것 같았으면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어리석어.”

“이건 어떤 구실이 아닐까요? 대공가에 트집을 잡기 위한 구실을 모으는 거죠.”

트리샤의 비열한 성격에 잘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루카스는 성정이 난폭하지만, 영악하진 않았어. 하지만 트리샤 블랑의 영향이라면 설명할 수 있겠군.”

“네. 트리샤는 아주 영악하니까요. 그리고 무척 성격이 급하죠.”

루카스와 트리샤의 조합은 최악이었다. 서로의 나쁜 점이 만나서 극한의 결론을 끌어내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걸 상대해야 하는 디아나로선 버거운 사실이었다.

“아까 제롬의 조수에게 비밀 서신을 받았다.”

“그…… 다니엘이라고 했던가요. 언제 받으셨어요?”

“그대가 곤히 자고 있을 때.”

에드윈의 말에 디아나는 괜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시선을 피했다. 장소가 달라지자 모든 게 낯설고 처음 같았다.

“선황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한 황태후는 거의 유폐된 상태고, 드노아 경의 입궁도 금지됐어. 모든 건 황제의 명령이었고 트리샤 블랑만이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든다는군. 루카스는 제 편마저 내친 거야.”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디아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스텔라와 드노아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들은 오랜 세월 지켜 온 견고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황제라면 가능해. 문제는 외척 세력에서 루카스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거야. 그들은 외부의 적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내부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았어.”

“하긴…… 예전의 폐하가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겠죠. 이건, 트리샤가 벌인 일이니까요.”

에드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황제는 절대권력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그동안 선황이 병석에 있느라 존재감이 없어서 외척 세력에서 간과한 사실이었다.

“잠깐. 그러면 드노아 경도 더는 황제 폐하의 편이 아니라는 거네요?”

“그래. 정확히는 내쳐진 거지. 그걸 깨닫자마자 날 반 테스 공작저로 불렀어.”

드노아 반 테스. 그는 외척 세력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순서가 바뀌었다.

반 테스 가문은 대대로 막후에서 정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왔고 정치를 조종했다. 그 결과로 외척 가문이 될 수 있었다. 즉, 드노아는 아직 모든 힘을 잃은 게 아니었다.

“우리 편이 될 수 있을까요?”

“드노아 경은 누구의 편도 아니야. 하지만 같은 적을 둔 처지라면 잠시 동맹이 될 수는 있겠지. 내게 당장 저택으로 오라는 것도 그런 뜻일 거야.”

에드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 외조부인 드노아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이었다. 반 테스 가문이 여태까지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쉬이 황제를 바꾸려 들진 않을 것이다.

“트리샤 블랑의 존재를 알리면, 그걸 제거하는 데까진 힘을 합쳐 줄 거라고 본다.”

지금 황제의 폭주가 트리샤 블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면 반 테스가의 전력을 다해서 발칙한 마녀를 죽이려고 들 테다. 드노아는 황실 안에도 첩자가 무수히 많았기에 에드윈으로선 이익이었다.

“마녀라는 걸, 믿어 주실까요?”

항상 그게 문제였다. 트리샤의 힘이 너무도 상식을 초월했다는 것. 그건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힘든 일이었다.

“믿지 않아도 돼. 지금 루카스의 눈과 귀를 가리는 존재라고 알리기만 해도 드노아 경은 움직인다.”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가차 없는 드노아의 성정을 보고 자랐다. 그가 무슨 일을 계획할 때 방해가 되는 자를 죽여 없애는 것은 살인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어차피 상대는 일개 시녀였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드노아는 움직일 것이다.

“다만, 내가 직접 가서 고해야 효과가 있을 거야.”

에드윈의 기억에 드노아가 살가운 외조부였던 적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드노아가 에드윈에게 한결 후한 태도인 것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문제로 전갈을 보내면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어서.”

그 생각은 아까 했지만, 잠든 디아나를 두고 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에드윈이 떠나면 이 성에는 디아나와 선대공비만 남았다. 상상만으로도 답답해지는 조합이었다.

“전 괜찮아요.”

“딜런을 두고 가고 싶지만…… 그의 형이 드노아 경의 측근이야. 이번 자리엔 꼭 필요하지.”

“루모스 기사단엔 딜런 경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제야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대공비 전하께서 저를 원망하신대도 그 손으로 절 해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 어머니는 권모술수엔 능해도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진 않으시지.”

제 어머니를 두고 하는 평가치고는 좀 이상했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에드윈의 등을 떠밀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그보다 드노아 경을 설득하는 데 더 신경을 써 주세요.”

에드윈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디아나는 창밖으로 에드윈을 태운 말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항상 자신의 저택에서 에드윈을 만났는데 하루아침에 대공저에서 눈을 뜨고 그를 배웅한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조금 신혼의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늦었지만…….”

디아나가 혼잣말했다.

“역시,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어.”

중간에 책을 덮은 것은 실수였다. 만일 그때 책을 끝까지 읽었더라면 이후 트리샤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극복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처음, 루카스의 앞에서 자결하던 디아나는 이제 없었다. 지금은 주위의 소중한 것 모두를 지키고 싶어졌다.

“하긴, 후회해도 늦었지.”

디아나는 다시 기운을 내서 앞을 봤다.

“이젠 내가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어.”

어차피 책의 이야기가 크게 비틀렸다. 그렇다면 결말도 바뀔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디아나는 자신이 여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디아나는 그 증거인 단검을 꾹 쥐며 결심했다. 두 번 다시는 이 검을 이용해서 회귀하지 않겠다고. 이젠 트리샤를 두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저…… 공작님.”

상념에 빠져 노크를 듣지 못한 디아나 앞에 집사장 하프먼이 나타났다.

사실 그는 디아나를 향한 호칭을 고심하고 있었다. 대공비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아직 예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공작이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선대공비가 버젓이 있는 이상 대공비라고 칭할 자신은 아직 없었다.

“무슨 일이지?”

“선대공비 전하께서 처소로 오시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다만?”

하프먼은 무척 곤란한 처지였다. 에드윈은 몇 번이고 디아나와 어머니가 마주치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했고, 처소 입구에도 기사들을 잔뜩 배치했다. 그렇다고 집사장인 하프먼이 선대공비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대공 전하의 뜻은 다릅니다. 일개 집사장인 저로서는 아무 권한이 없기에 사실을 전해 드렸습니다.”

“알현실이 아니라 처소로 오라 하셨다고?”

그건 보다 가까운 대화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디아나는 짧은 고민을 마쳤다. 에드윈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반대로 선대공비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을 바쳐 키워 온 아들에게 배신을 당한 참이었다. 그 원인은 디아나였으나 상상처럼 디아나를 상대로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았다. 에드윈의 선택이자 잘못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물론, 선대공비는 디아나를 적으로 규정했지만 그 정도면 오히려 많이 참았다고 할 수 있었다.

“선대공비 전하의 처소로 안내해 줘.”

“대공 전하께서…… 아니, 굳이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하프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머뭇거렸다.

“내 결정이야.”

고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막연히 아름답고 여린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목소리엔 강인함이 묻어났다. 하프먼은 그제야 에드윈이 막무가내로 디아나를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니 아무도, 대공 전하라고 해도 그대의 잘못을 묻지 않으실 거야.”

디아나는 하프먼의 곤란한 처지도 이해했다. 하프먼은 더 말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후에 선대공비의 처소로 디아나를 안내했다.

대공저 여기저기에 있는 기다란 회랑을 지나자 우아한 분위기가 감도는 선대공비의 처소가 나타났다. 자매라고 들었는데, 황후에게서 느꼈던 지나치게 화려하고 지독한 향기와는 전혀 달랐다.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저를…… 찾으셨다지요.”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예를 갖췄다. 선대공비는 잠시 그런 디아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들라는 손짓을 했다.

디아나는 하루 새에 무척 야윈 선대공비의 얼굴을 보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증오한다고 해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 말재간이 뛰어나더니, 왜 조용한 것이냐.”

선대공비가 담담하고 싸늘한 말투로 하문했다.

“내 허락할 테니, 어디 한번 무슨 생각인지 말해 봐라.”

이번 사태엔 디아나의 동의가 필요했다. 물론 에드윈이 밀어붙였겠지만, 어느 정도 디아나도 공범이라는 거였다. 무엇보다 디아나는 제 아들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던 무도회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에드윈과 몰래 정을 통했다.

“난 처음부터 네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단지 영명한 걸 떠나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 내가 봐 왔던 어느 사람과도 달랐고,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멀리하고 싶었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디아나를 주시했다. 그녀가 느꼈던 건 전부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레이스가 현명했던 거다. 그녀의 실수는 제 아들을 너무 믿었던 것뿐이다. 그것만은 스텔라와 똑같았다.

“결국, 내 예감이 옳았다. 넌 단지 나의 적이 아니라 반 테스 가문의 적이 됐다. 그 피를 이어받은 아이 둘이 전부 네게 집착하고 너를 원하니까.”

에드윈과 루카스를 이르는 말이었다. 디아나는 부정하지 못하고 잠자코 선대공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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