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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5화 (155/184)

155화

루카스의 광분은 트리샤조차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황실의 모든 곳이 살얼음을 걷는 듯이 불안했다.

황태후는 거의 처소에서 유폐당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루카스를 달랠 수 있는 건 트리샤뿐이었다.

“그 자식은 날 보며 비웃고 있었던 거야. 언제나 그랬지! 음흉하게 뒤에서 저만 잘났다는 듯이 위선적인 눈초리로.”

에드윈을 향한 루카스의 열등감은 하루 이틀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항상 루카스보다 몇 발짝 앞서서는 태연한 얼굴을 하던 에드윈이 얼마나 증오스러웠던가. 그건 루카스만이 아는 에드윈의 비열한 면모였다.

세상은, 아니 당장 자신의 어머니와 외조부조차도 그런 에드윈이 대견한 것이며 루카스가 부족하다고 꾸짖었다.

“리샤, 그 더러운 것들은 진작 정을 통하면서 날 비웃고 있었던 거다.”

루카스는 디아나까지 싸잡아서 적대하고 있었다. 그간 연기처럼 묘했던 몇 가지 의심도 지금 결론을 보면 다 이해가 됐다. 그리고 루카스의 추측은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트리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니야, 루카.”

트리샤는 이미 처소에 미약을 피워 두고 있었다. 광분한 루카스가 자신을 찾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연기에 실린 미약의 효과가 점점 나타나면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한층 차분해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어. 그건 친구인 내가 가장 잘 알아.”

트리샤의 목소리는 주문처럼 루카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쁜 사람은 따로 있잖아. 오늘도…… 디아나가 원해서 갔다는 소린 없었어.”

“리샤, 네 말은 에드윈이 강제로 디아나를…….”

“아무도 대공 전하가 그렇게 비열한 사람이라는 걸 몰라. 나도 루카의 말을 듣기 전엔 몰랐으니까. ……디아나도 속고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디아나를 지켜 줘야 하는 거라고.”

트리샤의 달콤한 목소리가 서서히 루카스의 정신을 지배해 갔다. 루카스는 초점을 잃은 녹안으로 트리샤의 말을 되새겼다.

“그래…… 디아나를 지켜 줘야지.”

“맞아! 디아나를 구해서 황후로 삼자. 그나마 루카에게 어울리는 황후는 디아나 정도야.”

미약과 함께 속삭이는 트리샤의 목소리는 루카스의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욕망을 끌어냈다.

디아나의 새하얀 살결과 고아한 푸른빛의 눈동자를 봤을 때 루카스가 느꼈던 감정은 욕망 그 자체였다. 본래 제 것이 돼야 했을 여인이었고, 당장 그 가느다란 허리를 낚아채서 범하고 싶었다.

“그걸 눈치챈 대공 전하가 또 루카의 것을 빼앗다니, 너무해.”

트리샤는 그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황실을 기만하려고 하는 걸까?”

걱정스레 루카스를 보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야욕이 담겼다.

“정말, 대공 전하가 반역을 꾀하는 걸까 봐 두려워.”

가증스러운 트리샤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뻗어 트리샤의 작은 어깨를 안았다.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본능 같았다.

“리샤, 네가 두려워할 일은 없어.”

“정말……?”

“나는 황제다. 제국의 반역자를 처벌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지.”

루카스의 품에 안긴 트리샤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제 과거와 붉은 힘의 흔적을 쫓는 에드윈을 제거하고 디아나를 황실에 데려와서 허울뿐인 황후의 관을 씌워 주면 트리샤가 꿈꾸는 완벽한 인생의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꼭 잡은 채, 대공저에 들어섰다. 전에 남의 눈을 피해 몰래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기나긴 회랑은 압도적이었고 그만큼 긴장을 고조시켰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손에 배어나는 땀을 느꼈는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디나.”

다정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에드윈도 버거워하는 선대공비를 상대로 디아나가 긴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상황이 디아나를 조여 오고 있었다. 그 부담을 에드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전 괜찮아요. 어서 가요.”

디아나가 태연하게 말했지만, 에드윈은 좀처럼 걸음을 다시 떼지 않았다.

“잊은 것이 있다.”

“네?”

에드윈이 디아나의 한 손을 잡은 채로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디아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란 표정으로 에드윈을 봤다.

에드윈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품에서 작고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청혼이었다.

“디아나 카를.”

세상에서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으나, 디아나까지 황실에 반발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아 비밀스럽게 프러포즈를 하게 됐다.

“나와…… 결혼해 줘.”

에드윈을 닮아 짧고도 따스한 청혼이었다. 디아나는 울컥 여러 감정이 솟구쳤다. 지금 손을 잡은 에드윈의 온기나 눈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이 새삼 둘의 오랜 인연을 떠올리게 했다.

한때는 스쳐 가는 조연이었던 남자, 처음엔 그저 그의 마음을 이용해서 황태자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자신, 그러다 이내 연인으로 만난 이번의 생애.

“네.”

어떤 결말이 둘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 순간의 대답엔 후회가 없었다.

“결혼해요, 우리.”

디아나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곤 그 분홍빛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축복하는 관객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둘이면 된다. 그렇게 지켜 온 인연이었고 사랑이었다. 에드윈은 감격을 담아 디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 잔혹한 상황에서도 결혼이라는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또한, 그 사랑의 증거는 앞길에 대한 불안을 거둬 줬다.

“내 마음속에서 디나 그대는 이미 아내였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이 길의 끝을 걱정하지 마. 그건, 남편인 내 몫이다.”

제 어머니인 선대공비의 반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뭐라고 하시든 난 돌파할 작정이야. 그대는 한마디도 할 필요 없다.”

디아나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돌려줬다. 그러고는 디아나가 먼저 에드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이 회랑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둘에게 남은 몇 가지 장벽 중의 하나였다.

곧 알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드윈은 노크도 하지 않고서 디아나의 손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선대공비는 모든 소식을 듣고서 높은 의자에 앉아 둘을 싸늘한 눈길로 내려 봤다. 이미 수많은 고뇌가 스쳐 간 표정이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디아나 카를을 제 신부로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에드윈이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선대공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런 아들을 남처럼 주시했다.

“제 마음이 급해서 절차를 생략하고 신부를 납치해 왔으니 이는 무를 수 없는 혼인입니다.”

선대공비도 바보는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루카스의 태도 변화와 칙령, 여태 수상했던 에드윈이 다급하게 체면도 버리고서 데려온 신부 디아나까지.

“곧,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대공비로 삼겠습니다.”

그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에 더 큰 배신감이 몰려왔다. 지금, 제 아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감히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제 연심이 깊어 미리 상의 드리지 못한 점, 송구합니다.”

에드윈이 저런 단어를 입에 올릴 줄도 안다니 참 기가 막혔다. 선대공비의 눈동자는 공허했고 쓸쓸함과 상처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분노보다 제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탓이다.

그런데 정작 제 아들은 그런 어미는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이 데려온 여자를 감싸기 급급했다.

“에드윈.”

선대공비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서늘하고 냉랭한 목소리였다.

“너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선을 넘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

그레이스는 분노를 퍼붓는 대신 철저하게 싸늘해졌다. 배신에 돌려줄 말은 이것뿐이라는 태도였다.

“너는 나를, 그리고 대공가를 배신했다.”

“어머니, 저는.”

“이 혼란한 시국에 너는 하필이면 황제 폐하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다. 네 개인의 감정으로 대공가를 위험에 빠트린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아들이라는 사실마저도 지워 버렸다.”

에드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레이스의 말은 거의 옳았다. 비록 모든 것을 무릅쓰고 디아나를 택했지만, 그것까지 부정할 염치는 없었다.

“순서를 흐트러트린 것은 맞지만, 어차피 황실은 대공가를 공격할 심산입니다.”

에드윈이 그나마 분명한 사실을 찾았다.

“그리고 네가 그걸 앞당겼다.”

선대공비의 말도 옳았다.

“지금의 폐하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물증이 곧 도착할 겁니다. 모든 이야기를 어머니께 먼저 드리기엔 시간이 없었습니다. 디나, 아니 디아나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결혼에 문제가 있는 몸이…….”

“그만.”

작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에드윈의 말을 멎게 할 만큼 큰 위력이 있었다. 이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선대공비가 여태 침묵을 지키던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래, 그대는 그럴 수 있다. 그러니 내게 변명할 필요 없어.”

선대공비는 그 한마디로 디아나와의 관계를 잘랐다.

“난 인정하지 않겠다.”

그게 선대공비의 결론이었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대공비란 있을 수도 없었고, 그러니 디아나가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몸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어머니, 이야기라도 들어 주십시오.”

“그러는 넌, 내 이야기를 들었느냐?”

답은 이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다른 이는 그럴 수 있어도, 내 아들은 그래선 안 됐다. 적어도 이 어미에게 그럴 수는 없었어.”

에드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대공비를 미리 설득할 길도 없었다. 어차피 허락을 얻지 못할 거라면 이른 시일 내에 디아나를 데려오는 것이 나았다. 그러다 디아나를 황실에 빼앗기면 정말로 도리가 없어졌다.

“너는 고집을 꺾지 않겠지.”

선대공비는 제 아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피차 그럴 것 없다. 나도 고집을 꺾지 않을 테니.”

에드윈이 예상했던 것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결말이었다. 선대공비는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서 걸었다.

“난 이제 너를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겠다.”

먼저 자신을 배신한 건 에드윈이었다. 그 배신은 뼈가 시릴 정도로 아팠다.

“너는 대공으로, 나는 선대공비로 각각 고집을 부리다 보면 결말이 나오겠지.”

마지막으로 선대공비는 디아나를 흘깃 바라봤다. 이렇게 제 앞에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면 무슨 수라도 썼을 텐데, 아무래도 자신이 디아나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선대공비 전하, 지금 대공 전하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곧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대공가를 위해서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후, 선대공비가 실소를 뱉었다.

“첫판은 내가 졌다. 허나, 이젠 물러서지 않아.”

“저는 선대공비 전하께 대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디 기회를 주세요.”

에드윈이 그런 디아나의 손을 잡아끌어 제 뒤로 숨겼다. 순간, 선대공비의 눈동자에 적의가 서렸다.

“잊지 마라. 난 네 남편의 어미가 아니라 네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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