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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4화 (154/184)

154화

그레이가 디아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대공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에드윈이 채비를 마친 후였다.

대공가는 피해 갔지만, 칙령의 존재를 안 순간 디아나의 처지를 염려하고 제일 나은 방법을 찾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뜻은 같았다.

“그레이 경은 집사복보다 갑옷이 어울리는군.”

“전하의 예복도 멋집니다.”

두 남자에게 긴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디나가 결심을 굳혔나?”

“예.”

사실 에드윈은 디아나가 반대하더라도 오늘 청혼을 할 작정이었다. 디아나의 원망을 듣더라도 지금 당장 황실에 디아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에드윈의 명령에 따라 루모스 기사단의 최측근들도 대공가의 깃발을 들고 행차할 차비를 끝냈다.

“하지만 전하의 모습을 보니 굳이 제가 올 필요도 없었던 것 같군요.”

그레이가 오지 않았어도 곧 일행이 출발할 기세였다. 그레이는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디아나를 가질 사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눈에 찼다.

“자고로 청혼은 사내의 몫이 아닌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모처럼 예복까지 차려입은 에드윈의 모습엔 굳은 결의가 보였다. 그는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말에 올라타서 기사단을 이끌며 위풍당당하게 대공저를 나섰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한발 앞서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갔다. 비록 급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공작저에서도 이 청혼 행렬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했다.

곧, 그레이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전하께서 이미 오고 계시다고?”

“예, 제가 갔을 때 이미 채비를 마치고 출발하시려던 찰나였습니다.”

아마 에드윈은 디아나의 결정이 어느 쪽이더라도 청혼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의 성정을 생각하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루카스와 트리샤가 있는 황실에 디아나 홀로 보낼 에드윈이 아니었다.

“발루아 기사단도 나름의 예를 갖추고 맞이할 겁니다. 그…… 청혼 행렬이니까요.”

“세상에. 공작님도 옷을 갈아입으셔야.”

오히려 두 사람이 디아나보다 더 조급한 것 같았다.

“아니, 다들 진정해.”

디아나가 차분히 손짓했다. 본래 청혼 행렬은 이런 식으로 급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세간에 정혼을 발표하지도 않았으니 큰 사건이 될 터였다.

무엇보다 칙령이 반포된 상황에서 대공가가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었다.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이 일은 최대한 조용히 치러야 해. 지금은 긴급 상황이잖아.”

디아나의 옳은 말에 샬롯이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마. 모든 게 안정되면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면 됐지, 샬롯?”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발루아 기사단도 지금 그대로 좋아. 이 상황에서 굳이 뭔가를 했다가 나중에 죄가 될 수도 있으니.”

디아나는 자신의 결정으로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걸 원치 않았다. 그게 디아나가 불러들인 발루아 기사단원이라면 더 죄책감이 들 터였다.

“그럼, 이 모양새는 결국, 도둑 결혼이 되는군요.”

“도둑 결혼?”

샬롯의 혼잣말에 디아나가 되물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지요. 가령, 마음을 통한 연인이 있는데 가문의 반대가 있다거나 할 때…… 남자 쪽의 신분이 높다면 이런 식으로 들이닥쳐서 부모에게 청혼을 통보하고 신부를 데려가는 일이요.”

“부모님이 안 계신 걸 제외하면 비슷한데?”

“고위 귀족에겐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겠어요. 정식 혼인 절차를 밟으려면 몇 달은 걸리니까요. 아마 대공 전하의 생각도 같으실 거예요.”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에드윈은 후대의 평가를 무시하고, 이번 일을 감행하는 것이다. 디아나는 누구보다 그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느꼈다.

에드윈은 사랑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쉽게 포기했다. 아마 이번 일은 선대공비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 후폭풍까지도 전부 에드윈의 짐이었다.

“그럼, 도둑맞는 신부로서 얌전히 기다려야겠네.”

죄책감은 버리기로 했다. 그의 이유가 사랑이라면 디아나의 이유도 사랑이었다. 아직 함께할 날은 많았기에 지금은 그에게 기대기로 한 것이다.

곧, 에드윈의 행차가 공작저에 당도했다. 이미 눈에 띄는 행렬을 이끌고 수도를 가로질러 왔으니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에드윈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루모스 기사단을 세워 두고 몸소 말에서 내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디아나 카를.”

“네.”

청아한 디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에드윈 체스터는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모조리 빼앗긴 바, 디아나 카를을 나의 신부로 요구한다. 카를가에서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 나서고,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라.”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조용히 디아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그 마음을 읽고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대공과 공작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의식이었지만, 둘은 이미 버려진 예배당에서 언약을 맺은 사이였다. 새삼 예법은 중요치 않았다. 이곳에 둘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신부는 내가 데려간다.”

에드윈은 무릎을 꿇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대신, 디아나를 번쩍 들어서 뒤돌아섰다. 누군가 이 일을 문제 삼게 되면, 디아나는 수락하지 않았고 에드윈의 독단이었다고 하려는 배려였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디아나 카를은 나 에드윈 체스터의 아내다.”

에드윈 인생 최대의 모험이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진 카를가와 발루아 기사단은 공작저에 머물되 나, 에드윈 체스터의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라.”

억지스러운 칙령에는 억지스러운 일로 대항하자는 작정인지, 에드윈은 대담하게 공언했다.

카를 공작저를 내어 줄 생각도 없었고, 칙령을 따르지 않을 빌미를 마련해 준 것이다. 대공이었기에 가능한 상식 밖의 행보였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루카스였으니 에드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레이와 샬롯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감사를 담아 에드윈에게 예를 갖췄다.

그렇게 에드윈은 당당하게 신부를 탈취해서 화려한 행렬과 함께 다시 수도를 가로질렀다. 이제 소문은 날개를 단 듯이 제국 전체에 퍼질 것이다.

“서둘러 대공저로 돌아간다.”

에드윈이 기사단을 채근했다. 황실의 근위병이 오기 전에 대공저에 들어가야 이 막무가내의 결혼이 성립될 것이다. 그의 뜻을 읽은 기사단은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디아나가 탄 마차를 몰았다.

“전하, 드디어 신부를 탈취하신 걸 축하드릴까요?”

딜런이 에드윈 가까이에 말을 붙여서 밉살스러운 소리를 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전, 전하의 이 탈취극에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일이 잘못돼서 죄를 물게 되면 이 일을 주관한 루모스 기사단장인 딜런도 위험했다.

“그런 것치고는 태평해 보이는군.”

“전하 덕분에 사선을 넘는 데 좀 익숙해졌습니다.”

이쯤 되면 딜런도 달관한 것 같았다. 에드윈이 큰일을 벌일 때마다 늘 딜런도 함께 연대 책임을 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신부를 탈취하지 않아도, 곧 황실과 부딪칠 테니까…… 똑같은 셈 아닙니까.”

칙령에 대공가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음 과녁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최악의 경우엔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니 오히려 기사단에게 이 정도의 일은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들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건 정신 나간 칙령을 반포한 황실과 황제를 향한 일종의 시위였다.

“그보다, 전하.”

딜런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선대공비 전하께선…… 아직 아무것도…….”

“곧 알게 되시겠지.”

에드윈은 잘도 태연히 말했다.

“전하, 선대공비 전하께 고할 때는 저라도 빼 주십시오.”

“……사선을 넘는 건 익숙해도 내 어머님은 무섭단 거냐?”

“예.”

딜런은 솔직한 사내였다. 선대공비의 원망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모자간의 일에선 빠지고 싶었다.

“차라리 전장에서 싸우겠습니다.”

에드윈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고 싶다.”

이번에는 에드윈도 딜런과 같은 심경이었다. 선대공비에겐 완벽했던 아들이 처음으로 반기를 드는 셈이었다. 그것도 통보하듯 신부를 데려오는 일이다.

소문은 파다하게 났고, 돌이킬 수도 없으며, 대놓고 선대공비의 의사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에드윈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바로 앞에 디아나가 타고 있는 마차가 보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아름다운 신부를 얻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에드윈의 혼잣말에 딜런은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빠르게 말을 몰았다.

이제 대공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실에도 소식이 닿았을 것이다. 다행히 일행은 해가 저물기 전에 대공저에 도착했다. 예정에 없었던 새 신부의 도착이었다.

***

옥좌에 앉은 루카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 고해 봐라.”

재상인 하인리히가 곤란한 듯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카를 공작가에 난입하시어 그 소위 도둑 결혼이라는 것을…….”

“그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라고!”

황실에서 나고 자란 루카스에게 도둑 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게 존재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신분이 높은 자들에겐 드문 일이었으니 루카스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말 그대로 신부를 도둑질하듯이 데려가는 것인데…… 보통 민간에서는 정을 통한 연인 사이에서 반대를 무릅쓰기 위해서 신분이 더 높은 신랑이 절차를 무시하고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정을 통한 사이?”

루카스의 녹안이 분노로 가득 찼다. 디아나를 보면서 느꼈던 막연한 의심이 전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였단 말인가. 언제부터 에드윈은 디아나를 몰래 취하고 자신을 기만했던 것인가.

“민간에서는 그렇사옵니다만, 이번 일은 소신도 내막을 모르는지라…….”

“당장 근위대를 보내라. 디아나 카를을 입궁시켜!”

“황공하오나, 이미 대공 전하께서 카를 공작을 데리고 대공저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대공저에는 군사를 보낼 수 없습니다.”

쾅, 루카스의 주먹이 옥좌를 내리쳤다.

“감히…… 그 더러운 것들이 나를 기만했단 말이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따위 말을 할 시간에 어서 가서 대공을 잡아들일 방법이나 가져와라! 썩 꺼져!”

하인리히는 더한 불똥이 튀기 전에 황급히 어전에서 물러섰다. 루카스는 그러고도 분이 삭지 않았는지 마구잡이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신성하고 고귀한 어전 앞의 붉은 카펫이 엉망이 되고서도 그 난폭한 숨결이 가라앉지 않았다.

“리샤의 말이 옳았어. 에드윈이 내게서 디아나를 훔친 거야. ……내 것을 전부 빼앗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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