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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3화 (153/184)

153화

선황의 서거와 루카스의 즉위로 모든 것이 변했다. 그동안 병석에 누워 있느라 아무 의미가 없었던 황제의 존재가 새롭게 제국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언제까지나 제 아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스텔라는 물론, 외척 세력의 장기 집권을 예상했던 드노아까지 벽에 부딪혔다.

그들의 계산대로라면 루카스는 허울뿐인 옥좌에 앉아 정치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리 믿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가 될 루카스의 수많은 권한을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그게 독이 됐다.

“오늘이면 장례식도 끝이군.”

루카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선황의 장례를 이렇게 약식으로 치를 수는 없다며 예부에서 강력히 반발했지만, 황제의 권력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곧 반대했던 예부의 대신이 교체됐다. 여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던 자였다.

예부만이 아니었다. 루카스는 제 뜻에 반대하는 자들은 즉각 해임하고 죄를 물었다. 황실에 루카스의 뜻을 따를 자만 남기까진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황태후가 된 스텔라는 검은 베일을 쓴 채 억울한 울음을 토해 냈다. 죽은 선황을 위한 슬픔이 아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틀어진 미래가 억울한 것이리라.

“뭔가 잘못됐어! 지금이라도 조사를…….”

“황태후 폐하, 관에서 손을 떼셔야 합니다.”

새로운 예부의 대신이 황태후를 완력으로 떼어 냈다. 그러자 황태후는 시선을 돌려 루카스를 노려봤다. 스텔라가 평생을 살아온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후계자를 원했던 게 아니란 말이다.

“어마마마가 늘 중요시하던 예부의 말인데, 왜 따르지 않으십니까?”

루카스가 눈물로 젖은 스텔라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제 아들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루카스…….”

“여긴 공석입니다. 난, 누군가의 아들이기 이전에 제국의 황제인 것을.”

스텔라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친 루카스가 대신에게 손짓했다. 이제 장례의 마지막 절차로 선황의 관을 지하의 황실 묘지에 안장하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존재감이 없었다고는 해도 제국의 황제였던 자의 장례식은 너무 조촐했다.

“폐하. 선황의 죽음엔 미심쩍은 부분이…….”

이미 스텔라도 루카스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었다. 루카스의 반항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에 막상 그가 황제가 됐을 때 손을 쓸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어마마마.”

루카스가 그런 스텔라의 귓가에 낮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어마마마의 멋대로 움직이던 예부의 대신도, 항상 명령하길 즐기는 드노아 경도. ……그래요, 어마마마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어찌, 이 어미에게!”

“내 어머니이니 경고해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는 날 이용할 수도, 멋대로 갖고 놀 수도 없다는 것을.”

살벌한 목소리였다. 꼭 트리샤의 주술 때문은 아니었다. 루카스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권력에 미쳐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한 번이라도 드노아 경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들로서, 한 사람으로서 루카스를 봐 줬다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봐라, 황태후 폐하께서 선황의 서거로 슬픔이 크신 모양이니 처소로 모셔라.”

“루카스! 한 번만 이 어미의 말을 들어 다오.”

스텔라의 다급한 목소리는 루카스에게 닿지 않았다. 그 말은 이미 늦었다. 적어도 루카스가 소년이었을 때, 이 황실에서 가장 외롭고 고귀한 존재였을 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전부 늦어 버렸다.

“대신들을 모아라. 알현실에서 칙령을 내릴 것이다.”

“예, 폐하.”

고독과 오만 사이에서 비틀려 버린 루카스의 손에 황제의 권력이 쥐어졌다.

트리샤는 그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마법은 루카스의 폭주를 조금만 앞당길 뿐이었다. 이 폭주의 끝에서 트리샤가 원하는 건 하나,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

혼란은 가장 먼저 수도의 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내심 선황이 서거하고 루카스가 황제가 되어도 드노아 경의 치세가 계속될 거라고 믿었던 귀족들은 칙령의 반포를 듣고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카를 공작저는 그렇게 안일하지 않았지만,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선황의 장례식은 황실의 일원이 모여서 조용히 끝났다. 그것은 교황청도 이 문제에서 어찌 힘을 쓸 수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이 칙령의 내용이었다. 수도 각지에 방을 붙이는 거로도 모자라 각 귀족가에 직접 황실의 사절단이 가져온 칙령은 상식 수준을 벗어났다.

“전쟁도 아닌데, 계엄령을 내리다니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어떻게…….”

디아나는 과거의 생에서 봤던 루카스를 떠올렸다. 그는 난폭하고 어린아이처럼 감정 기복이 심했지만,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황태후와 외척 세력인 드노아 경이 선황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루카스는 제 세력을 도려내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택했다. 예측하지 못한 변화였다.

“당장, 대공 전하를 만나야 해.”

디아나의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좋겠는데요.”

집무실로 오기 전에 이미 칙령을 보고 온 그레이였다. 설령 폭군으로 후대에 규탄을 받는 일이 있대도 지금 당장 황제인 루카스를 막을 명분이나 힘은 없었다.

“먼 옛날 폭군으로 유명했던 루시우스 황제도 전시가 아닐 때 계엄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황제의 고유권한인지라 당시엔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곳은 제국이니까요.”

“그때도 귀족들을 강제로 입궁시켰어?”

“예. 그땐 종교재판도 성행하던 때라 더 심했습니다.”

칙령의 내용에서 가장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은 고위 귀족들에게 당장 입궁을 명한 것이었다.

이유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즉위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지만, 반역의 빌미를 막기 위한 게 분명했다.

게다가 계엄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거나 멋대로 제 영지로 돌아가면 제국의 반역자로 규정짓겠다는 경고가 함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국의 모든 권위는 황제 폐하께 있습니다. 여태 그것을 모두가 잊었을 뿐이지요.”

그레이의 설명을 들을수록 절망적이었다.

“공작님,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남아야겠지요. 카를 공작가는 루시우스 황제뿐 아니라 온갖 역사를 다 겪고도 이렇게 건재하게 남았습니다.”

강인한 그레이의 목소리가 디아나의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이젠 내 차례라는 건가.”

“반드시 정면돌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정정당당함을 추구하는 그레이답지 않은 말이었다. 디아나는 의아함을 담아 그레이를 바라봤다.

“전 이대로 공작님께서 입궁하시는 건 반대입니다. 지금의 폐하는 이미 폭군의 행보를 걷고 계시는 바, 그 요망한 계집까지 함께 있는 황실에 공작님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샬롯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도 아무런 대비 없이 입궁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아직 기한은 이틀이 남았지만, 제롬은 소식이 요원했다. 적어도 제롬이 가져오는 증거라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이건 무도회 따위가 아니야. 핑계가 통할까?”

“한 가지, 이 칙령에서 제외된 가문이 있습니다.”

체스터 대공가였다. 대공은 일개 귀족으로 치기엔 개별적인 세력이 무척 강했고, 그의 영지는 일국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고작 칙령으로 그 자유를 빼앗긴 부족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루카스는 곧 그 방법을 실행할 계획이겠지만.

“나더러 대공가로 피하라는 건가? 그대들은 어떻게 되지? 카를가는?”

디아나 혼자였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문제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공작이었고 디아나를 위해 모인 발루아 기사단이 있었다. 이젠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작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혼자라도 피하시는 게 우선입니다. ……그리 말해도 듣지 않으시겠죠.”

그레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방법은 있어요…… 그레이 경의 말대로라면.”

샬롯이 그레이의 말을 대신 이었다.

“가문의 결합.”

디아나도 답을 알고 있었다.

“즉, 내가 전하와 결혼하면 우리 모두 대공저의 그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가장 분명한 길이었다.

“예. 현실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허나, 공작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공작님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두 사람은 반역의 죄를 얻는다고 해도 끝까지 디아나를 따를 것이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 지금 웃으실 때가 아니에요.”

“지금 웃지 않으면 언제 또 웃겠어, 샬롯. 아무튼, 그대들은 정말 바보야.”

“……예?”

그레이가 의아한 질문을 던졌지만, 디아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난 대공 전하와의 결혼이 싫었던 게 아니야.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힘으로 트리샤와 악연을 끊어 내고 싶었을 뿐.”

물론, 혼자의 힘으로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카를의 영지를 다스리고 기사단을 모으고 세상을 더 알고 싶었다.

“그것도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어쩌면.”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묵묵히 기다려 주기로 했지만, 그의 아쉬움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러다 깨달은 건 결혼하든, 하지 않든, 에드윈이 이미 디아나의 인생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공 전하는 날 가둬 두실 분이 아니야. 나 혼자서 겁을 먹은 거지.”

이전의 생에서 결혼이 너무도 끔찍했기에 디아나 혼자서 벽을 쌓은 것이다. 하지만 에드윈은 달랐다.

“공작님 말씀은…….”

“칙령의 말미는 이틀. 더 고민할 여지는 없어.”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디아나에겐 이미 확신이 있었다.

“이런 못난 청혼이라도 전하께서 받아 주신다면.”

아마 에드윈은 웃어 줄 것이다. 어쩌면 너무 놀랄지도 모르겠다.

이런 형태를 빌리게 돼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디아나는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체면에 얽매여서 불행했던 기억들은 이제 지겨웠다.

“그레이, 대공 전하께 뜻을 전해 줘.”

“예.”

루카스와 트리샤가 있는 황실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혼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두려운 적이니만큼, 모두가 맞서야 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뭔가 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지긋지긋해.”

디아나가 후련한 말을 뱉었다.

“어차피 후회할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후회하고 싶어.”

제국을 흔드는 격변은 디아나의 안에서도 고요히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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