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먹구름이 몰려와 달을 가리고 바람이 스산하게 불기 시작했다. 기온은 겨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았지만, 아무래도 곧 비바람이 닥칠 것 같았다.
에드윈은 디아나가 잠시 몸을 누였던 제 침대를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니콜라를 죽이세요.」
제롬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쪽지가 의미하는 바는 컸다.
제롬도 트리샤의 마력과 니콜라가 연결되어 있단 걸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니콜라의 죽음으로 이 사태를 끝낼 수 있었다면 굳이 디아나에게 말하지 않고 니콜라를 죽이면 그만이었다.
“아직 확신이 부족하군.”
에드윈이 낮게 혼잣말했다. 제롬에겐 니콜라의 죽음이 트리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직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니콜라의 목숨에 큰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적어도 마지막 상황에서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전하, 공작님을 무사히 모셔다 드리고 왔습니다.”
딜런이 나타나 에드윈의 상념을 끊었다. 에드윈은 고갯짓으로 딜런의 수고에 감사했다.
“상의할 문제가 있다.”
디아나의 표정이 비장했듯, 에드윈도 그랬다. 딜런은 이미 예상했던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딜런에게 이미 태워 버린 쪽지와 제롬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 그건 확실히 좀.”
딜런은 보기보다 뼛속까지 기사도에 충실한 자였다. 아니, 기사가 아니어도 죄 없는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것은 망설일 만했다. 제롬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묘한 쪽지를 전달한 것이다.
“아니, 난 그런 문제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에드윈은…… 할 수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며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야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디아나와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을 거다.
제롬은 처음부터 그런 에드윈에게 이 쪽지를 보낸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는 제롬 경도 상대가 어린아이라고 망설일 자는 아니고.”
“그건 그렇죠.”
“트리샤 블랑과 남동생의 연결고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해. 하지만, 그 이상은 누구도 모른다. 니콜라가 트리샤 힘의 근원인지, 그나마 제어하고 있는 존재인지도.”
에드윈의 깊은 뜻을 깨달은 딜런이 얼굴을 굳혔다.
“제롬은 자신이 없었던 거야. 니콜라를 죽였을 때, 트리샤가 힘을 잃을지 반대로 폭주할지…… 그러니, 희망이 없는 마지막 상황에서만 그 아이를 죽이라고 한 거지. 어차피, 잃을 게 없어졌을 때 말이다.”
사사로운 동정심이나 약한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망설일지 모르겠지만, 에드윈이 그렇듯 제롬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니콜라를 죽일 수 있었다.
“공작님은 아십니까?”
“아니. 번민하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다.”
딜런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디아나가 직면한 문제가 많은데, 이런 도덕적 판단까지 떠맡으면 상황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문제도 큰일이군요.”
“아.”
에드윈이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선대공비는 드노아의 부름을 받아 반 테스 공작저로 향했다. 무척 드문 일이었고, 그 내용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에드윈이 불러 모은 건 순수한 루모스 기사단만이 아닌 용병까지 포함돼 있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드노아가 놓쳤을 리 없다.
“어쩐지 먹구름이 몰려오더라니.”
괜한 날씨 탓을 하는 에드윈이 긴 한숨을 뱉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의외로 내일은 화창할지.”
“아니. 이건 폭풍의 전조다.”
에드윈이 씁쓸하게 끝을 맺었다.
***
해가 뜨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포근한 기온은 그대로였고 먹구름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나 화창한 하늘이었다.
마치 겨울의 끝을 알리는 것 같은 이른 봄 날씨였다.
그 사이로 고요한 폭풍이 제국을 흔들었다.
제국의 황제가 병석에서 서거했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실의 후계자는 단 한 명으로 분명했고, 제국법에 따라서 대관식이 치러지기도 전에 황태자였던 루카스 파렐이 황제의 모든 권위를 손에 넣었다. 진정 새로운 폭풍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옥좌에 앉은 루카스의 녹안은 모후인 스텔라도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차디찼다.
“제국에 불온한 움직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황실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병상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선황을 대신하여 하늘이 짐을 보낸 것이다.”
아무리 정이 없는 부황이어도 아직 장례가 끝나지 않은 채로 옥좌를 차지하고 할 말은 아니었다. 지금이 전시라면 모를까, 태평성대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더욱.
“혼란한 때이니, 선황의 장례는 최소한으로 치르도록 예부에 명한다.”
루카스의 옆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부황의 죽음에 눈 하나 까딱하지도, 놀라지도 않은 채로……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옥좌에 올라서 기다렸던 것처럼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또한, 짐의 정비였던 비비안 샤리즈는 죄인의 여식이니 황후로 봉하지 않고 폐비한다.”
검은 베일을 쓴 스텔라가 눈빛으로 강한 항의를 보냈지만, 루카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황실에서 내보내 그 부모와 죄인의 삶을 다하게 하라.”
“잠깐!”
모두 루카스의 독단이었다. 여태 정치나 황실 내부의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런 관심도 없던 아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스텔라가 막아섰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혼란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 지금은 물러가라.”
스텔라의 명령에 급하게 모였던 대신들이 예를 갖추고 문을 나섰다. 아직 드노아가 입궁하지 않았기에 그들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루카스, 지금 뭘 하는 거냐. 아직 아무 결정도 나오지 않았어.”
루카스가 고개를 돌려 황망한 표정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녹안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스텔라는 어째서인지 아들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루카스의 성정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보통도 못 된다는 것은 어머니인 스텔라도 잘 알았다.
“루카스. 이 어미의 말은…….”
“지금 짐의 말을 끊고 멋대로 대신들을 내보낸 겁니까.”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마치 제 아들의 모습을 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제국법에 따르면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도 난 이미 황제일 텐데. 어마마마의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이는지?”
루카스의 신랄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루카스, 이 어미의 뜻은 그게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상의한 바가 없으니 시기상조라는 거고, 곧 아버님이 입궁하실 테니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내가 황제인데 왜 드노아 경의 말을 들어야 하죠?”
루카스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스텔라는 제 눈과 오감을 믿을 수 없었다. 여태 루카스는 군주가 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암묵적으로 정치는 드노아 경에게 맡기기로 되어 있었고 루카스 본인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직은 아버님의 지혜가 필요해. 무엇보다, 선황의 죽음이 의심스럽다. 병이 나아지진 않아도 악화했단 보고는 없었어. 여러모로 황실 안이 수상해. 그 조사를 우선하고 장례는 황실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축소해선 안 된다.”
스텔라의 심각한 태도에도 루카스는 옥좌에 못 박힌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루카스……?”
스텔라가 옥좌로 다가서 직접 제 아들을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스텔라가 제 몸에 손을 대기 전에 제 어머니의 어깨를 차갑게 밀쳤다.
스텔라는 뒤로 밀린 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루카스를 바라봤다.
“내게 가르침은 필요 없습니다, 황태후 폐하.”
타인도 이보다 차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뭔가가 이상했다.
스텔라는 어머니의 직감으로 재차 자신을 거절한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루카스는 잠시 다급하고 절실한 손길로 제 아들의 얼굴이며 어깨를 만지는 스텔라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루카스, 네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거냐?”
그러나 루카스는 여전히 차가운 녹안으로 제 어머니를 주시했다.
“내 아들이 아니야……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스텔라는 루카스를 마구 더듬다가 문득 두려움을 느낀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떨어졌다. 분명 제 아들인데 아니었다. 그 기묘한 이질감은 본능적인 공포를 불렀다.
“선황을 해친 것이 내 아들도 해친 건가? 루카스, 제발 정신 차리고 이 어미를 봐라, 제발. 지금 넌…… 내가 아는 루카스가 아니잖아…….”
스텔라가 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말을 뱉어 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절규도 루카스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본래 어긋난 모자 사이였다. 스텔라에겐 루카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황태후께서 선황의 서거로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그 의문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옥좌 뒤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나타났다. 트리샤 블랑이었다. 깜박, 스텔라는 그저 눈만 움직일 수 있었다.
“넌, 그때의…….”
스텔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리샤가 시녀를 불러들였다. 아무 망설임 없는 붉은 눈동자가 소름 끼치게 빛났다.
“황태후 폐하께서 충격이 크신 것 같으니 처소에서 잘 모시라는 폐하의 명이다.”
트리샤의 말에 시녀들이 복종하고 있었다.
“감히, 시녀 따위가. 이거 놔라!”
그들은 황태후의 거부를 무시하고 거의 완력으로 스텔라를 루카스 앞에서 끌어냈다. 트리샤의 말을 따르는 시녀들은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었다.
“루카, 대신들을 다시 들어오라고 할까?”
트리샤가 뒤를 돌아 루카스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제국에 반역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하잖아.”
“그래, 그랬지…….”
루카스가 느리게 말을 반복했다. 트리샤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미약으로 루카스를 홀려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드디어 본격적인 주술을 건 결과였다.
붉은 힘은 트리샤의 예상보다 더 강했다. 어쩌면, 루카스와 상성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어머니에게조차 정이 없었던 루카스여서 여기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트리샤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꼭두각시에게 다가서 그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드노아 경이 루카를 방해하는 게 싫어. 이제 루카가 황제인데 왜 그런 노인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안 그래?”
루카스의 녹안이 트리샤를 향했다. 그 순간에만 생명력이 담겼다.
“리샤, 네 말이 맞아. 그 늙은이의 입궁을 금지해.”
“좋은 생각이야.”
싱긋, 트리샤가 미소를 지으며 루카스의 곁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에드윈…… 그 자식을 반역죄로 처단하겠어.”
트리샤의 주술은 그 사람이 마음 깊이 품고 있었던 생각을 더욱 자극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이 모든 것은 애초에 루카스가 품고 있었던 마음이다.
트리샤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살짝만 마법을 걸었을 뿐. 그래,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