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반 테스 공작가의 연로한 주인이었다. 평생 제국 정치를 암막 뒤에서 조정했던 드노아 경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흐름을 감지했다.
“뭔가 일어날 모양이군.”
드노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를 읽은 후 툭 내뱉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는 작은 점들이 모두 수도로 모여드는 것을 읽어 냈다.
무슨 작당인지는 몰라도 수도를 향해 꽤 많은 무력이 들어와 있었다. 명분은 제각각이었고 따로 보면 문제가 없었지만, 수도 안에 제국군이 아닌 병력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
“왜 카를가의 주위에서만 이런 이변이 생기는 건지, 원.”
황태자비 검증 사건부터 유독 카를 공작가가 자꾸 튀어나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제가 듣기로는 새로운 공작을 알현하기 위해 영지에서 발루아 기사단이 왔다고 합니다.”
드노아의 곁에 서 있던 알렉이 낮게 고했다. 그러자 드노아의 따가운 시선이 알렉을 향했다.
“허면, 대공가의 병력은 어찌 설명할 테냐.”
“대공 전하께서 루모스 기사단을 수도에 두시는 것은 이미 허가하신 사항이라고…….”
“그걸 증원하는 걸 허락한 적은 없다.”
드노아가 빽빽한 글자의 한가운데를 콕 집었다. 체스터 대공령에서 루모스 기사단원을 수도로 더 불러들였다는 보고였다. 그것이 정말 순수한 기사단원인지 병사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왜 내게 고하지 않았지? 아니면, 자네 동생이 루모스 기사단장이라 감싼 것인가?”
알렉은 동생인 딜런을 떠올리며 입가를 굳혔다. 그는 반 테스가를 모시는 것을 거부하고 에드윈의 심복이 되는 걸 택했다. 그러나 알렉은 대대로 반 테스가의 가신이었던 피어드 가문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드노아의 곁에 남았다.
“제 충정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드노아가 불쾌하다는 듯이 알렉을 노려봤다.
“질문은 내가 한다. 이건 자네 동생의 뜻인가, 대공의 뜻인가.”
“제가 딜런과 아무런 교류가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피어드가의 형제는 그 주인이 달라지면서 자연히 교류를 끊었다. 그것이 혈연을 넘은 기사의 도리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도 있다는 뜻이군. 안 그런가?”
드노아는 때론 잔혹한 주인이었다. 끝까지 그 충심을 시험하는 것이다.
“대공저에서 기사단의 이름으로 병력을 증원한 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순수한 목적이라면 곧 해산할 것이고, 저의가 있다면 카를 공작가의 움직임과 연관이 있으리라 봅니다.”
알렉은 끝까지 충직을 지켰다. 드노아는 그제야 마뜩잖은 시선을 거뒀다.
“당장 선대공비를 불러라. 가장 빠른 전서구를 보내.”
“예.”
“그리고 내일 입궁하겠다. 미리 채비해 둬라.”
“알겠습니다.”
알렉은 제 소임을 다하고 묵묵히 방을 나섰다.
드노아의 판단은 옳았다. 루모스 기사단의 움직임이 수상했다는 것을 알렉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아마 드노아도 반쯤은 알렉의 심정을 눈치챘으리라.
그러나 이 문제를 두고 에드윈이 아닌 그레이스를 불러들이는 것도 옳은지는 알 수 없었다. 드노아의 판단력은 언제나 완벽했지만, 아직은 제 손자들을 너무 어리게만 본다는 것이 언젠가 치명적인 약점이 될 터다.
물론, 알렉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여태처럼 피어드가의 맹세를 지키기만 하면 됐다.
***
오늘 밤은 처음으로 밤손님의 역할이 바뀌었다. 디아나는 딜런의 마중에 어색함을 숨기지 못했다. 샬롯은 당연히 말렸지만, 디아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어차피 공작저는 발루아 기사단원으로 떠들썩해서 에드윈이 몰래 올 수 없었고, 딜런의 말에 따르자면 선대공비가 대공저를 비운 덕에 오늘 밤은 괜찮다고 했다.
“나도…… 나무를 타고 담을 넘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디아나가 로브에 달린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리며 묻자 딜런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저와 함께 마차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디아나는 딜런이 타고 온 대공저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샬롯은 디아나를 뜯어말리다가 실패하곤 반대의 시위로 배웅을 걸렀다.
물론 샬롯의 의견이 백번 옳았다. 밤손님을 들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판국에 디아나더러 밤손님이 되라니.
“대공저로 모시는 것은 처음이군요.”
딜런의 말에 디아나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선대공비를 만나기 위해 왔던 적은 있었지만, 밤손님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전하께서 머무시는 곳 근처는 전부 제가 통제하고 있고, 하인들도 걸음을 하지 않게 해 뒀습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막을 두른 마차는 곧 대공저의 대문을 지나서 정원을 가로질렀다.
본래대로면 여기서 내려야 했지만, 딜런은 마차를 끌고 건물 안쪽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짐을 옮기기 위한 통로였는데, 미리 그곳에도 장막을 둘러 둔 덕분에 디아나는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안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대로 층계를 오르시면 됩니다.”
나선형의 좁은 층계를 향해 딜런이 말했다. 에드윈은 창문을 넘기 힘든 날이면 이 층계를 통해 밤마실을 나가곤 했다. 디아나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로 층계를 올랐다.
새삼스럽게 그간 자신의 침실을 찾아왔던 에드윈의 수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발밑에 주의해서 층계를 오르던 차,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나타나 디아나를 낚아챘다. 놀라서 소리를 내려는 찰나, 에드윈의 체취가 물씬 풍겨 왔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잖아요.”
디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에드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디아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 계단은 위험해. 너무 좁고 가파르지.”
“그리고 어디서 누가 낚아챌지 모르고요.”
에드윈의 입가에 낮은 미소가 어렸다. 그는 익숙하게 복도를 지나서 제 침실로 가서 디아나를 고이 내려놓았다.
에드윈이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은 디아나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보는 에드윈의 공간이었다.
“왠지…… 쑥스러운데.”
“전하는 항상 제 침실에 오시면서.”
공간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에드윈의 방은 넓고 웅장했으며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뭐든지 커다란 가구가 신기했고, 그의 흑안처럼 검은색으로 장식된 방의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하는 매일 이곳에서 지내시는군요.”
“전하는?”
에드윈이 짓궂게 되물으며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에드, 당신 말이에요.”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에서 듣고 싶은 말이 나오자 에드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내가 매일 잠드는 곳에 누워 보는 건 어떨까.”
에드윈의 목소리가 달콤하고 나직하게 유혹을 속삭였다. 디아나는 그 마음에 응하고도 싶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할 이야기가 많아요.”
디아나의 또렷한 눈동자를 본 에드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순간의 쾌락에 미래까지 저버릴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허락된 안에서는 디아나를 품고 싶었다.
“얼굴이 야위었다.”
에드윈이 손을 뻗어 디아나의 뺨을 쓸었다. 그러더니 이내 디아나를 안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디아나는 그 커다란 품에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지쳤던 며칠에 대한 말 없는 위로였다.
“이야기는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꼭 디아나의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나도 그렇게 분별이 없는 자는 아니야.”
에드윈의 믿음직스러운 말이 귓가를 울렸다. 디아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분히 늘어놓았다. 순서대로 이야기를 마치고 제롬이 남긴 쪽지까지 설명한 후에야 디아나의 말이 멎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너무 불안해요.”
오직 에드윈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실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몰래 밤길을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사건에 대한 보고는 누구나 전할 수 있지만,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상대는 달리 없었다.
“디나, 우린 잘하고 있어. 난 감히 이게 최선이라고 본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요…….”
트리샤는 아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괴물을 상대하느라 괴물이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어.”
에드윈은 언제나 올곧았다. 디아나는 흔들리는 제 마음을 붙들어 줄 온기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 가는 방향이 옳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불안을 전부 지울 수 없는 게 사람이었고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우린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죠.”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카를가와 대공가의 무력을 합치면 설령 루카스가 총공세를 한다고 해도 버틸 만했다.
두 가문의 영지가 북쪽 땅에 있다는 것도 일종의 보험이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영지로 후퇴하면 수세에 몰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어차피 반역도 각오한 터다.
“그래서, 제롬의 쪽지는 펼쳐 봤나?”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망설이고 망설였지만, 다니엘의 경고를 들은 후라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판단이야.”
에드윈은 모를 소리와 함께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쪽지엔 뭐가 됐든 디아나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이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이겠지.
“그 쪽지, 내게 맡길 수는 없을까?”
“에드, 당신에게요?”
디아나가 의아한 눈으로 에드윈을 봤다. 이 쪽지가 있어서 자꾸 생각이 복잡해졌다. 몇 번은 진짜 펼쳐 보려고 했지만, 다니엘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마…… 제롬은 그걸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디아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해도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에드윈이 부드럽게 디아나를 감싸 안았다.
“그때 내려야 하는 선택은 내가 맡고 싶어.”
그 쪽지를 손에 쥐고 있는 한 디아나는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미루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차라리 에드윈에게 맡기면 고민에서 해방될 수는 있었다.
“지금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제롬이 따로 쪽지를 맡기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읽지 않은 쪽지 같은 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에드윈의 말이 옳았다. 디아나는 품에서 작게 말린 쪽지를 건넸다. 에드윈은 디아나에게 눈짓하고 혼자서 일어섰다. 천천히 벽난로의 불에 다가간 그가 쪽지를 펼쳐서 빛에 비춰 봤다.
평정심을 가장하는 데 능숙한 에드윈이라서 표정으로 쪽지의 내용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쪽지를 펼쳐서 읽고, 벽난로에 던져서 재가 되는 것을 확인했다.
「트리샤를 막을 수 없게 되면, 니콜라를 죽이세요.」
에드윈은 그 쪽지의 내용을 머릿속 깊이 새겼다. 죄가 없는 어린아이를 죽여야 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