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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50화 (150/184)

150화

분개한 루카스는 에드윈에 대한 악감정을 토로하다 동이 틀 무렵에 겨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트리샤는 그 과정에서 루카스의 불안을 읽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뛰어난 세 살 연상의 이종사촌은 루카스에게 얼마나 증오스러운 존재였는지.

그러나 증오보다 무서운 것은 의심이었다. 루카스는 에드윈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라고 몇 번이나 역설했다.

“이미 다 가졌으면서 뭐가 그리 불안할까.”

트리샤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태어나자마자 황태자로 책봉되어 그야말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아이로 자라난 루카스인데도 근거 없는 피해망상과 에드윈을 향한 열등감이 짙게 묻어났다. 뭐, 트리샤로서는 그걸 조금만 부추기면 되니 행운인 셈이었다.

“부디, 좋은 꿈 꾸길.”

트리샤는 싱긋 웃으며 잠든 루카스의 코 아래를 살짝 만졌다. 그건 곧 그의 숨결이 되어 가장 갖고 싶은 것과 극한의 행복, 그리고 바로 고통으로 추락하는 심연을 꿈에서 맛보게 해 줄 것이다.

“으음…….”

잠든 루카스가 뒤척였다. 트리샤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관찰했다. 과연 이 제국의 황태자가 갖고 싶은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디아……나…….”

내심 알고 있던 답이 루카스의 잠꼬대로 흘러나왔다. 트리샤는 싸늘해진 얼굴로 루카스를 내려 봤다. 친구라고 했으면서, 심지어 신분을 넘어서 말을 편히 하라는 특혜도 줬으면서 결국 꿈에서 찾는 건 디아나였다. 늘, 그랬듯이.

“그럼 악몽은 이미 알 것 같네.”

트리샤가 혼잣말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카스의 코밑에 바른 미약은 극한의 행복을 보여 준 후에 심연의 고통으로 영혼을 몰아넣는다. 악몽 속에서 그리 갖고 싶어 하는 디아나를 뺏고 루카스를 짓밟는 게 누구일지는 뻔했다.

“이제 퍼즐이 꼭 맞겠네.”

의심의 씨앗을 부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트리샤는 수고를 덜었다는 듯 후련한 얼굴로 황태자의 침실을 나섰다. 디아나와 에드윈을 함께 몰아넣을 수 있다면 꽤 좋은 광경이 될 것 같았다.

***

디아나는 발루아 기사단을 둘러본 후에 마음이 한층 든든해진 것을 느꼈다. 북부의 기사들이 용맹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모두의 기백이 하늘을 찌를 것같이 높았다.

“발루아 기사단을 데려와 줘서 고맙다, 그대가 단장이라지?”

“예.”

묵묵히 답하는 캘빈은 누가 봐도 그레이의 형제로 보였다. 거구부터 무뚝뚝한 태도, 새로운 공작을 향한 의심스러운 시선까지. 캘빈은 몰랐겠지만, 오히려 디아나로선 이런 방식이 그를 대하기가 쉬웠다.

“오로지 날 위해 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레이 경을 보낸 것은 내 반칙이었어.”

디아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형제의 인연과 그레이라는 기사단의 거목이 있었기에 발루아 기사단은 순순히 공작에게 충성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은 디아나가 군주로서 복종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레이 경의 인망이 다하기 전에 그대들에게 군주로서 인정받고 싶군.”

“공작님께선 특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영지를 소유한 군주들은 대부분 기사단을 쓸모 있는 병력으로만 생각했다. 에드윈처럼 침식을 같이하며 존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기사단의 유구한 역사는 군주의 가문을 빛내는 장식품처럼 여겨졌다.

그런 군주가 반대로 기사단에게 인정받고 싶다니, 과연 그레이를 설득해서 발루아 기사단으로 돌려보낸 사람다웠다.

“형님, 그러니까 그레이 경이 공작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캘빈이 카를 공작가를 따를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결심을 무르면서까지 공작님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한번 검을 내려놓은 그레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즉, 지금 공작에게 기사단이 절실히 필요하며 그 공작을 향한 충심이 진짜라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 발루아 기사단은 그레이 경을 따릅니다.”

캘빈은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목숨을 걸고 북부의 기상으로 공작님을 지킬 겁니다.”

“그거 고마운 이야기군.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나 그레이의 이름에 기댈 생각은 없어.”

싱긋 디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자칫 무례할 수도 있는 캘빈의 말에도 디아나는 진솔한 대답을 돌려줬다.

이런 군주라면 녹슬어 가고 있던 발루아 기사단에 두 번째 전성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캘빈이 기사의 예를 갖추고 디아나의 앞에서 물러섰다. 그제야 멀리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커다란 그림자도 같이 사라졌다. 애초에 그레이의 거구를 숨길 나무는 공작저에 없었지만.

“그레이는 묘하게 쑥스러움을 탄단 말이지.”

디아나가 혼잣말하고는 웃었다. 다시 갑옷을 입은 그레이는 낯선 제 모습이 머쓱한지 디아나의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앞에 나서지 않았다.

“공작님. 무슨 말씀을 그리 재밌게 하세요, 혼자서.”

샬롯이 다가와 디아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 그레이가 최근 모습을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서.”

“그런가요? 아침에 저와 간단히 식사했는데.”

“……응?”

“기사단원을 위한 간식도 부탁하던걸요.”

디아나는 약간 배신감이 들었지만, 뭐라 항의할 수는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아까도 나무 뒤에서 나오지 않았으면서 샬롯과는 똑같은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니 속은 것 같았다.

“그보다, 급히 확인하실 게 있어요.”

“뭔데?”

샬롯이 주위를 살피고 디아나의 귓가에 바싹 다가왔다.

“제롬 경의 조수가 왔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디아나는 대답도 잊고 저택으로 발을 돌렸다. 안 그래도 제롬의 부재가 아쉬웠던 차였다. 조수가 직접 왔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급하게 집무실로 향한 디아나는 곧 제롬의 조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무척 피로해 보였지만, 제롬처럼 총명해 보이는 눈에 생기가 있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예는 그만하고, 본론부터 말하도록.”

디아나는 다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조수를 봤다. 그는 항상 제롬 곁을 따라다니던 최측근 조수로, 디아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제롬 경의 밀서입니다. 동쪽 땅에서 전서구를 보내는 게 여간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늦어졌습니다.”

조수가 책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간의 여정을 증명하듯 흙탕물이 튀고 바래진 봉투였다. 디아나는 서슴지 않고 그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어 내렸다.

「붉은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곧 증거를 수도로 이송할 겁니다.」

제롬의 글씨는 급하게 휘갈겨 쓴 것 같았다.

「특히 니콜라란 아이를 확보하고 계셔야 합니다.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트리샤 블랑이 사악한 힘을 쓰는 것과 남동생의 존재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사악한 힘은 두 가지, 미약으로 사람을 홀리거나 주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트리샤 블랑이 본격적으로 주술을 사용하게 되면 니콜라에게 특이한 점이 나타날 겁니다.」

디아나의 예상이 또 적중했다. 니콜라의 알 수 없는 열과 등에 나타난 반점은 수상했다.

그러나 최근 며칠은 아무런 징조가 없었다. 트리샤가 이상하게 조용한 것과 같았다. 제롬의 조사가 옳다면 지금은 트리샤가 주술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주술의 힘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사악한 힘입니다. 증거는 확보했지만, 아직 힘의 근원은 조사 중입니다. 그때까지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 늦지 않기를.

- 제롬 하이든.」

제롬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트리샤는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지도 않았다. 디아나도 어느 정도 각오했던 부분이지만,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두려웠다.

“제롬 경이 가져오겠다는 증거가 뭐지?”

디아나가 조수를 바라봤다.

“어떤 사내입니다.”

“증거가 사람이라고?”

“예. 제롬 경은 붉은 일족의 숲 근처에서 방황하고 있던 한 사내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정신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제 처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롬 경은 지금 그자를 데리고 수도로 오는 길인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조수의 무책임한 대답에 디아나가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모른다니? 이 서신을 전달한 것도, 그자를 직접 본 것도…….”

“제 설명이 부족했군요. 저는 제롬 하이든 경의 수석 조수, 다니엘 쇼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제롬의 측근답게 수상쩍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그 이름도 가명일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제롬 경은 이번 사건의 조사에 여태 모아 온 전 재산을 쏟아부었습니다. 재산만이 아니라 모든 걸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역할은 공작님께 상황을 알리는 것이고, 제롬 경은 그 힘의 근원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되는 자를 데려오는 것은 다른 사람일 겁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지만, 확언은 할 수 없고요.”

디아나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머리가 복잡했다.

“즉, 여럿으로 나눠서 움직인다고.”

“그만큼 제롬 경이 조심스럽다는 뜻입니다. 전서구도 못 믿을 정도니까요.”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서두르다가 모든 것을 망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제롬 경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 일은 제롬 경이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만 맡기고 있습니다.”

디아나는 착잡한 기분을 삼켰다. 마음처럼 빨리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다니엘, 그대는 내게 연락하는 역할로 끝인가?”

“아닙니다. 제롬 경이 굳이 절 보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디아나가 시선으로 되물었다.

“저는 제롬 경이 없는 동안 공작님의 수족이 되란 명을 받았습니다.”

“내겐 이미 내 사람들이 많아.”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롬 경이 굳이 절 보낸 건, 제가 유일하게 황궁에 잠입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본래의 제 역할이죠.”

제롬에게 끄나풀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황실에도 잠입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다. 다니엘은 디아나의 의심스러운 눈빛에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의 의뢰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한 의뢰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위험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우린 모두 제롬 경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붉은 힘의 정체에 대해, 우린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

평범한 고용 관계는 아닌 것처럼 들렸다. 하긴, 제롬이 돈으로 고용한 사람을 진정 믿을 리 없었다.

“제 예상대로라면, 그 ‘증거’를 데려올 사람이 더 친절히 설명해 드릴 겁니다. 곧 도착할 테니 공작저의 뒷문을 열어 주십시오.”

지금으로선 제롬의 말을 따르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저는 오늘 밤, 황궁으로 잠입하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묻지 않기로 했다. 다니엘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디아나에게 건넸다.

“이건…… 트리샤 블랑의 주술 때문에 큰 위협에 닥치게 됐을 때 열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노트 한 줄을 찢어 도르륵 만 것 같은 크기였다.

“저라면 미리 열어 보지 않을 겁니다.”

다니엘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선 간단히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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