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루카스가 여태 정성껏 안마했던 트리샤의 손을 툭 쳐 내고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의 녹안에는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편안한 기색이 사라지고 닿는 곳마다 죄 날이 서 있었다.
“대공이라니?”
“……예?”
트리샤가 일부러 긴장한 것처럼 당황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루카스의 눈에는 트리샤가 상황을 미처 모르고 실언했다고 느낄 정도로만 꾸민 표정이 꽤 그럴싸했다.
“방금, 대공이라고 했잖아.”
“예…… 그렇긴 한데. 저는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줄 알았어요.”
트리샤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루카스를 안마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루카스가 오히려 그런 트리샤의 팔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친밀감이 깊어질수록 서로의 몸을 만지는 데 스스럼이 없어진다더니, 지금이 그랬다.
“리샤. 난 이미 널 시녀로 생각지 않는다.”
“제가 전하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어요.”
“그러나 신분의 벽 때문에 늘 네가 조심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아.”
루카스는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로 바닥에 앉았던 트리샤를 일으켜서 제 옆에 끌어다 앉혔다.
트리샤는 속으로만 제 미약의 효과에 감탄했다. 분명 에드윈이 나왔으니 그 심기가 뒤틀렸을 텐데, 트리샤를 발로 차기는커녕 황태자인 그가 직접 트리샤를 일으켜서 옆에 앉힌 것이다. 이건 본래의 루카스에겐 없는 마음과 행동이었으니 전부 미약의 효과였다.
“난, 그런 건 싫다.”
“전하…….”
“네가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내게 예를 갖춰야만 하는 것도, 그래서 네가 순수한 우정만 줄 수 없는 게 싫어.”
루카스가 서글픈 녹안으로 트리샤를 응시했다. 아직 트리샤의 한쪽 팔을 잡은 채였다.
“만일 네가 내 지위를 이용하려고 했으면 날 더 부추겼겠지? 난 네가 너무 착하기만 해서 답답하다.”
트리샤는 겸연쩍어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니 정말 싫지만, 한 번만 리샤, 네게 명령해야겠어.”
“뭐든, 말씀만 하세요.”
“둘이 있을 때는 날 루카라고 불러도 좋다.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친구의 기본이잖아.”
그 말에 트리샤가 커진 눈동자로 루카스를 봤다. 과거의 기억에서 자신이 불렀던 루카스의 애칭이었다. 그땐 황제였던 루카스를 감히 루카라고 부르는 것은 트리샤뿐이어서 확실했다.
비록 사석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디아나조차 못 한 일이었다. 과거엔 지금보다 미약에 더 많이 침식된 후에 트리샤의 유도에 따라서 겨우 얻어 낸 호칭이었는데 이번엔 자청해서 제안하니 조금은 진심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예? 제가 감히…….”
“그럼 나와 친구라는 건 거짓말인가.”
“그럴 리가요! 전하의 친구가 된 건 제 인생의 영광이고 또…….”
“또?”
“평생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거예요.”
그런 트리샤를 보고 루카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그의 온화한 면이었다.
“그런 친구라면 더욱 공평하고 가까워야지 옳은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전하의 존함을…….”
“그건 내 아명이었다. 하지만 이젠 불러 주는 이가 아무도 없지.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리샤 너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릴 때처럼 매사가 신이 나고 마음이 편해.”
미약은 단기간에 쓰면 큰 효과를 볼 수 없지만, 한 명의 표적 옆에 밀착해서 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무한한 신뢰와 의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 날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단둘이 있을 때는 루카라고 불러 줬으면 한다. 말도 점차 편하게 놓고.”
“그래도.”
“이제 논쟁은 그만. 존대까지 바로 고칠 수는 없을 테니, 그건 시간을 준 거다. 대신, 점점 낮추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기대하지.”
루카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자마자 황태자로 책봉된 루카스에게 친구는 없었다. 몇 번, 또래의 영식을 궁에 들여 공놀이를 시키기도 했지만, 아무도 루카라고 부를 수 없었고 반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카스의 어린 시절은 무척 따분했다. 존재감도 없는 부황과 매사에 철저하게 루카스를 통제했던 모후 아래에서 즐거운 일 따위는 없었다. 진짜 친구도 없었던 루카스가 트리샤의 친구 놀이에 쉽게 걸려든 이유였다.
“리샤, 시종장에게 차를 내오라고 해. ……아니, 와인도 좋겠군. 술은 마실 줄 아나?”
“조금은요.”
“역시 리샤야. 시종장!”
트리샤가 시킬 것도 없이 루카스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시종장이 알아서 다가와 명령을 듣고 물러갔다. 디아나가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트리샤도 루카스와 똑같이 대우를 받는 느낌. 같은 자리, 같은 곳에서 나란히 와인 잔을 부딪치자 그 느낌은 더욱 짜릿했다.
“저는 화이트 와인은 듣기만 했지, 처음 봤어요.”
술이니 당연히 쓸 거라고 여겼는데 황실의 고급 와인은 청량한 풍미와 달콤함이 톡톡 튀었다. 난생처음으로 마셔 보는 화이트 와인을 음미하는 트리샤는 잠시나마 제 피로에 대한 대가를 즐겼다.
“정말 맛있어요!”
“나중엔 더 좋은 걸 가져오라고 하지.”
루카스가 꽤나 뿌듯한 표정으로 트리샤를 봤다.
“감사…… 아니, 고마워요.”
어색하지만 조금이나마 말을 낮추니 둘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루카스가 원하던 유대감이라는 거였다.
“호칭은?”
“으음…… 루카.”
한참 뜸을 들이던 트리샤가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러자 루카스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루카스는 항상 황실의 후계자라는 것 외에 다른 이의 누군가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트리샤를 곁에 둔 후로는 자신이 황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됐다. 그는 아마 이런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친구고 우정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리니 왠지…… 기쁘다.”
“전하 아니, 루카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불러 줄게요.”
루카스는 제 기대에 부응하려는 트리샤의 또렷한 눈망울을 보다가 기특하고도 귀여운 마음이 들어서 트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느 때보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본론은 아직이었다. 트리샤는 루카스의 빈 잔에 와인을 다시 채워 주면서 그가 내면의 자존심 싸움을 끝냈는지 눈치를 살폈다.
“참…… 아까 대공이라고 했지.”
“네?”
결국, 루카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트리샤는 일부러 모른 체했다.
“아까, 디아나가 대공을 만나 행복해질 거라는 투로 말했잖아.”
“그거…… 사실 전, 아니, 루카가 알고 있는 줄 내 멋대로 착각해서 한 말이라……요.”
갑자기 어투를 바꾸려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너무 어색했다. 답답한 걸 참지 못하는 루카스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날 루카라고 부를 땐, 황태자가 아닌 진짜 친구로 여기고 허물없는 반어를 쓰도록. 항의는 받지 않겠다. 내가 널 리샤라고 부를 때도 지위나 배경을 떠나 진짜 친구로 여기고 있으니까.”
“으…… 응, 루카.”
무척 어색했지만, 루카스가 듣기에 제법 나쁘진 않았다. 갑자기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리샤, 우리는 친구고 둘이서는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어. 그렇지?”
“응…… 루카가 원한다면…….”
트리샤는 아직도 곤란한 듯 시선을 여기저기에 두면서도 뺨을 살짝 붉혔다. 그리웠던 느낌이 드는 것은 루카스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트리샤도 기억 속에서 자신을 리샤라고 부르고 자신도 루카라고 부르며 서슴없이 대하던 때가 그리웠다.
“후, 그럼 이건 친구 사이의 비밀이야.”
트리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루카스를 보자 그의 녹안이 반짝 빛났다.
“실은, 디아나가 불임 가능성이 있다며 황태자비 후보에서 물러나고 대공 전하와 사적으로 만났다고…… 곧 정혼이라도 할 분위기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국혼의 여파가 지나가면 하려나 봐.”
트리샤는 일부러 여자들이 가십을 얘기하는 투로 가볍게 말을 흘렸다.
그때 숲에서 트리샤를 쫓던 루모스 기사단을 봐선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 트리샤와 관계된 일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디아나의 엄청난 신뢰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하필 제국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대공 전하라니 나머지는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었다.
“내게…… 그런 말은 한마디도.”
루카스의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디아나가 밀레타 영식을 방패로 진짜 제 연인을 숨겼다는 걸까.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디아나는 국혼이 파기되어서 불편한 위치니까. 대공 전하는 어떤 분일까? 디아나는 좋은 분이라고 했는데.”
트리샤는 일부러 눈치가 없는 듯 한가로운 말이나 덧붙였다.
“리샤.”
“……으응?”
아무리 트리샤라도 바로 말을 놓는 건 꽤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 루카스에겐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디아나가 정말 대공과 만났다고? 그것도 국혼 이후로?”
“언제부터인진 잘…… 모르겠어. 나는 국혼 전에 샤리즈 후작가로 가게 됐으니까.”
여지를 주는 것이다. 루카스가 의심할 여지. 에드윈 때문에 국혼을 피했다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트리샤의 계산대로 루카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녹안이 저리 싸늘하게 굳은 걸 보니 내면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 자신도 분명한 이유나 명분을 아직 모르는 분노였다.
“대공 전하는 그 유명한 루모스 기사단과 함께 용맹을 떨치는 분이라던데…… 좋은 분이겠지? 그래야 디아나도 행복해질 테니.”
보이지 않는 트리샤의 손이 루카스의 속을 긁었다. 고양이 디나가 자주 하는 장난처럼 살짝만 긁어 두는 것이었다. 과연, 루카스의 얼굴에 이미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서늘한 녹안이 매서웠다.
“루카…… 표정이 왜…….”
트리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고집스러운 입매와 뾰족한 눈매는 역시 황후를 닮아서 신경질적이었고 날카로웠다.
“또 에드윈인가.”
“에드윈?”
“대공의 이름이다. 그리고 난 전혀 인정하지 않지만, 외사촌지간이지.”
루카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에드윈과 비교를 당하며 살았다. 심지어 첫 울음소리가 에드윈처럼 우렁차지 못했단 말을 열 살까지 몇 번이고 드노아 경에게 들어야 했다.
왜 에드윈처럼 씩씩하지 못한지, 왜 키가 더 자라지 않는지, 왜 에드윈처럼 건강하지 못한 건지, 왜 에드윈처럼……. 쿵, 짜증스러운 기억에 루카스는 소파에 괜한 주먹을 꽂았다.
“그럼, 무척 가까운 사이잖아. 대공은 어떤 분이셔?”
“오만하고 야망에 미친, 탐욕스러운 놈이다.”
에드윈은 항상 루카스보다 몇 발짝 앞서갔다. 성장의 모든 순간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루카스가 에드윈을 앞지른 것은 황태자라는 신분뿐이었고 어떤 면에서도 그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드노아 경의 총애를 받는 에드윈의 야망이 무엇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설마…… 대공 전하가 우리 디아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트리샤가 눈썹을 기울였다. 붉은 눈동자에 그렁그렁 걱정이 맺혔다.
“그런 놈이 하려는 건 항상 똑같은 짓이지. 대공가는 전부 야망에 눈이 멀어 호시탐탐 황실을 시기하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에드윈의 계획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만일 에드윈이 일부러 디아나를 빼돌려서 자신의 비로 보란 듯이 삼는다면 루카스는 또다시 그에게 패배하는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리샤.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너도, 네 친구인 디아나도 내가 지켜 줄 거다.”
“응, 디아나가 나쁜 사람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꼭 지켜 줘.”
트리샤가 루카스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군가가 이토록 자신을 의지하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매달린다는 것이 무섭게 속을 태우고 있던 열등감이란 불을 간신히 껐다. 오래가진 못할 처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