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의회의 결정과 황실의 타협에 따라 황태자비전의 연금은 해제됐다. 비비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치장을 하고 차분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자신까지 무너지면 가문에 희망이 없었고, 침울하게 지낼수록 루카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부부 사이라고 할 것도 없는 관계였지만, 루카스가 대강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비비안의 마음을 굳히는 데 차라리 나았다. 단지 후계자만을 원하는 관계라면 자신도 감정을 버리고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전하, 황후전에서 보낸 시녀장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비비안은 일부러 등을 곧게 세웠다. 곧 황후전의 시녀장인 모니카가 들어왔다. 황후의 측근으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비비안의 허세를 간파한 듯이 묘한 눈빛으로 예를 갖췄다.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비 전하를 위해 특별히 약을 하사하셨습니다.”
“약……?”
“예, 이전부터 순조로운 회임을 위해 준비하신 민간의 처방이온데 여러 일이 많아 지금에야 하사하시게 됐습니다.”
여러 일이란 비비안의 친정 사정을 일컫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황태자가 걸음을 끊었으니 회임을 위한 약이 소용없었단 뜻이다. 모니카가 손짓하자 시녀가 쟁반에 담긴 약을 갖고 나섰다.
“잠깐, 왜 전의가 오지 않고?”
“전의들은 이런 처방에 조예가 없다는 점을 우려하신 황후 폐하께서 특별히 준비하셨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민간의 처방이온데, 이미 부인들에게 먹여 효과와 부작용이 없단 것도 검증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어찌 민간의 처방을 아시고?”
“황태자비전의, 아. 아니…… 이젠 황태자전의 시녀인 트리샤가 약초에 능통한 점을 눈여겨보신 황후 폐하의 성의이십니다.”
정체도 모를 약도 꺼려지는데 하필 트리샤의 손을 탔다니 더욱 먹기 싫었다.
“난 민간의 처방은…….”
“이미 여러 부인에게 검증을 마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독은 물론이고 부작용도 없습니다.”
모니카의 어조에 강요가 묻어났다.
“언제쯤…… 트리샤가 이 처방을 올린 건가?”
“입궁하신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때의 트리샤는 비비안에게 악감정이 없었을 때다. 그렇다고 선뜻 손이 가지도 않았다. 루카스와 밤을 보낸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왜 황후가 벌써 이런 것을 준비했는지 그 부담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약이 식습니다.”
모니카의 말에 시녀가 다시 약이 놓인 쟁반을 비비안 쪽으로 들이댔다.
“꼭…… 먹어야 하는가?”
“황후 폐하께서 드시는 것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매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비비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단 뜻이었다. 후계자 문제에선 황후도 비비안과 같은 입장이니 독이 의심되진 않았다. 그저 그 압박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문제였다. 물론, 비비안은 지금 그런 걸 따질 주제가 못 됐다.
“황후 폐하의 성의에 거듭 감사한다고 전해라.”
비비안은 쓴 약을 삼켰다. 약보다 쓴 굴욕도 함께 삼키는 것이다.
“내, 반드시 후계자를 안겨 드려서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그것이 유일하게 남은 활로였다.
***
트리샤는 애써 피로를 떨쳤다. 낮에는 자꾸 루카스가 찾아 댔고, 성가신 개들을 돌봐야 했으며, 밤에는 주술을 위한 준비를 남모르게 하느라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무엇 하나 남에게 미룰 수 없는 것들이라 트리샤는 자신을 위해 만든 회복제를 억지로 삼켰다.
“이중 삼중으로 손이 가니, 쯧.”
투정처럼 말했지만, 트리샤의 주술이 쉽게 발각되지 않는 비결이었다. 만일 트리샤가 루카스를 표적으로 삼아서 그가 먹고 마시는 것에 미약을 섞는다면 금세 탄로가 날지도 모른다. 다행히 붉은 마녀의 힘은 견고했다. 마녀가 배척받았던 세월 동안 그들은 더 교묘해진 것이다.
“각각의 약초엔 뚜렷한 힘이 없지.”
루카스는 이미 트리샤를 곁에 두면서 어떤 약초의 성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그건 아무런 증상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약초였다.
하지만 또 다른 특정 성분과 맞닿았을 때 주술의 증폭제가 되어 강한 미혹을 일으켰다. 우정, 연대감, 더 나아가선 사랑까지…… 거짓된 감정에 홀리게 만드는 것이다.
“뭐, 그걸 엮어 주는 게 내 역할이니까.”
트리샤의 주머니엔 늘 다른 약초가 있었다. 때론 개를 끌기 위해, 때론 손끝에만 살짝 크림을 바른 후에 루카스를 살짝 건드리기 위해, 가끔은 그가 베고 잘 베개에 향유를 한 방울 떨어트리거나 화병의 꽃잎에 향수를 뿌리는 것까지 참 세심하고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었다.
‘리샤, 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그만한 대가가 있는 일이었다.
‘무언가 내가 잊고 있던 그리운 기분이 드는 느낌이다.’
루카스의 녹안은 이제 트리샤를 볼 때만 온화해졌다. 그 변화는 궁인들 모두가 느낄 정도였다.
‘한심한 황태자비이지만, 널 데려와 준 것은 감사해야겠군.’
이제 비비안은 트리샤에게 완벽히 쓸모를 잃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한 도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쯤 제 주제를 깨닫고 절망하고 있을 비비안의 얼굴을 구경하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디아나가 먼저였다. 무엇보다 트리샤는 이미 비비안에게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게 왜 얕은수를 써서는.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그 덕분에 기억을 되찾긴 했지만, 앞에선 웃으며 뒤에선 자신을 살해하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후작에게 건네게 한 건 무척 괘씸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순진해 빠진 비비안을 내심 업신여기던 트리샤로선 신선한 한 방이었다. 그래, 아주 조금 나은 평가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쓴 약을 먹은 보람이 있으려나…….”
황후의 입김으로 예부에선 부랴부랴 합궁일을 잡았지만, 루카스가 고집을 부리면 그만이었다. 트리샤는 매일 비비안이 굴욕을 들이켜길 원했다. 아무런 소용도 희망도 없는 쓰디쓴 굴욕을 삼키면서 더 절망하기를.
마침, 오늘도 예부에서 정한 합궁일이었다. 트리샤는 또 새로운 핑계를 가지고 루카스에게 접근해서 그의 옷매무새를 만져 줄 것이다. 그러면 루카스는 마법에 걸려 트리샤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존재는 잊은 채로 트리샤와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며 웃음소리로 황태자전을 가득 채울 것이다.
“전하, 오늘 황태자비전에 가시는 날이죠?”
트리샤는 온 얼굴 가득히 미소를 준비한 채 루카스의 앞에 섰다.
“밤바람이 차니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가세요. 기침 예방에 좋대요.”
“아무튼, 리샤 너는.”
루카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트리샤를 보고는 차를 머금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을 때쯤, 우연히 트리샤와 손이 스쳤다. 트리샤는 살짝 뺨을 붉히면서도 일부러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전하, 손이 건조해요.”
“그래. 네 손이 하도 부드러우니 그렇게 느껴진다.”
“이건 제가 만든 보습 크림인데, 전하도 발라 보세요.”
말만 그렇게 했지, 트리샤는 이미 크림을 짜서 루카스의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단지 크림을 발라 주는 것치고는 나른하고 묘한 행동이었지만, 루카스는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채였다. 그저 마음이 무척 평온하고 달콤한 연기에 잠긴 것처럼 노곤해졌다. 마치, 오늘은 이 방을 나서고 싶지 않았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제 황태자비전으로 가셔야죠?”
“아니, 안 간다.”
“하지만 전하, 예부에서…….”
“예부건 어마마마건 내가 안 가겠다는데.”
루카스가 딱 잘라서 말하고는 기다란 소파에 드러누웠다. 절친한 친구인 트리샤만큼은 루카스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 밤을 같이 보내 줄 것이다.
모후처럼 자신을 채근하지도, 비비안처럼 후계자를 원하는 눈빛을 보내지도 않는, 순수한 친구니까.
“리샤, 너도 이리 와서 뭐든 얘기해 봐.”
트리샤는 못 이기는 체 루카스가 누운 소파의 머리 쪽 바닥에 앉아서 익숙하게 그의 손과 팔을 안마했다.
루카스는 신경질적인 성격 탓에 가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곤 했는데 트리샤가 용케 그것을 알아채고 부드럽게 안마를 해 주곤 하다 그게 습관이 됐다.
“왜 전의는 이렇게 못 하는 건지. 리샤, 네 손만 못한 것들이야.”
트리샤는 빙긋 미소만 지은 채 안마에 열중했다. 루카스는 제 피부로, 호흡기로 미약이 스며드는 것은 모르는 채로 이 나른한 한때에 빠지고 있었다.
“전하, 정말로 황태자비 전하께 가지 않으실 건가요?”
“너까지 잔소리하려고?”
“아뇨…….”
“아무리 본인은 몰랐다고 해도, 그 아비가 네게 심한 짓을 했던 걸 잊었어?”
“그런 무서운 일을 어찌 쉽게 잊겠어요, 하지만…….”
후, 루카스가 트리샤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실소를 뱉었다.
“됐다. 넌 너무 착해. 그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황실에서 살아가려고 하나.”
“그래도 전 아주 든든한 친구가 있잖아요.”
트리샤의 미소가 화사했다. 루카스는 싫지 않은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은 잘하는군. 내가 있다고는 해도, 황태자비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런 아비 밑에서 자랐으니 널 시기할 수도 있어.”
비비안이 이 꼴을 봤으면 그대로 기절할 노릇이었다. 트리샤의 무서운 점은 루카스에게 상대의 험담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 상대가 먼저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영악한 수였다.
“아닐 거예요. 물론, 저는 디아나와 지낸 시간이 더 길어서…… 황태자비 전하를 알고 지낸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런 식으로 슬쩍 미끼를 흘리고 상대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는 게 트리샤의 수법이었다.
“그래. 넌 원래 디아나의 친구였다고 했지?”
“네. 국혼이 결정되기 전에 후작가에 고용됐고요.”
“뭐야, 황태자비와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니잖나.”
“저야 시녀의 신분인데요, 뭘. ……디아나와는 어릴 때 만나서 친구이지만요.”
루카스가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어릴 때부터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가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어요.”
이곳, 응접실에서 만났던 디아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부신 백금발과 같은 빛으로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던 속눈썹 자락까지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이 세밀했다.
정교한 인형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싱그러운 생기가 넘쳐 나던, 제 것이 될 뻔했던 여인이었다.
“공작, 아니 디아나에 대해서 잘 알겠군?”
“네. 친구니까요.”
트리샤는 언제나처럼 정성을 다해 루카스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었다.
“제 친구라서가 아니라, 디아나는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물론, 제국에서 절세미인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요.”
“소문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아쉽게 됐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루카스를 보고도 트리샤는 빙긋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비록 황태자비가 되진 못했지만, 그걸 이해해 줄 분을 만나서.”
트리샤가 달콤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 그 사내라면.”
루카스는 밀레타 영식의 건을 떠올렸다.
“네. 대공 전하께선 분명 디아나를 행복하게 해 주실 거예요.”
그걸 바로잡아 주는 것은 트리샤의 역할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자, 디아나의 든든한 비호를 맡은 에드윈을 과녁으로 짚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