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수도로 들어오기 직전의 관문 앞엔 늘 인파가 북적였다. 수도를 드나드는 수많은 상인과 일꾼들은 모두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자연히 관문 밖은 여관과 상점이 즐비했다. 그러나 관문을 나선 그레이는 북적이는 관문 근처의 거리를 지나쳐서 말을 몰았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거점으로 쓰이는 오두막이 있었다. 기사단이 움직이려면 분명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수도에 들어설 것이란 추측에서였다.
“후…….”
벌써 모닥불의 연기가 보였다. 그레이가 기억하는 발루아 기사단의 움직임은 여전했다.
그레이는 잠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마지막 망설임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닥불을 본 순간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으로 지워졌다.
무엇보다 디아나가 준 속죄의 길이다. 그레이에게 그보다 더 큰 사명은 없었다.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 여겼는데, 그 각오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거기, 말을 탄 사람! 무슨 일로 어슬렁거리는 거지?”
“여긴 발루아 기사단밖에 없는데 무슨 목적으로 온 건가?”
그레이는 말 위에서 로브를 벗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 둘은 그런 그레이를 경계하며 여차하면 무기를 뽑아 들 기세였다.
“모두…… 여전한 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레이의 태평한 표정과는 달리 기사들은 무기를 뽑았다.
“수상한 자다. 비록 늙었지만, 무예를 익힌 듯 보이는 거구다.”
하지만 너무도 솔직한 그 평가에는 웃을 수 없었다. 반은 자의로 반은 타의로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그 평가가 내내 마음에 걸렸을 정도다. 잠시 후, 기사들이 끌고 온 곳은 그레이의 목적지기도 했다.
“단장님, 수상한 자입니다.”
갑옷을 입고 있는 단장의 무거운 걸음이 나무로 된 오두막을 울렸다.
“예. 늙은이지만, 거구에 무기도 있습니다.”
또 그 소리인가. 예상대로 잠시 후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사단장의 징표를 달고 있는 캘빈이 그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레이 못지않은 거구의 단장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를 끌고 온 신참 기사 둘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늙진 않았다.”
그 말에 단장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이 싫으시면 더 일찍 돌아오시지 그랬습니까.”
캘빈의 미소엔 애틋하고 서글픈 감정이 묻어났다. 그레이는 일부러 그 회한을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지식한 남자였다. 사내들끼리는 칼이나 술잔만 부딪치면 되지 구구절절 이야기나 늘어놓는 건 필요 없다는 주의였다.
“어울리지 않는 그 직업은 그만두신 모양이군요.”
“나름 잘 해냈다.”
캘빈이 낮게 실소했다.
처음 그레이가 집사장이 될 거라고 했을 때는 발루아 기사단의 모두가 믿지 않았다. 이런 거구의 남자가 그 어린 영애를 키우는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도.
그는 카를 공작 내외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지려고 했다. 아마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으리라.
“왜 돌아오셨습니까, 그럼.”
캘빈의 목소리엔 약간의 힐책이 묻어났다. 굳이 그레이가 그 사고의 책임을 전부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책임이 있다고 해도 기사단을 떠난 건 남겨진 자들에게 상처만을 줬다.
그날로 캘빈의 인생도 바뀌었다. 그 어렸던 영애가 자라나서 카를 공작에 즉위했단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다.
“속죄를 위해서다.”
“아직도 짐을 지고 계십니까.”
“한 가지가 더 늘었다.”
그레이가 캘빈의 눈을 바라봤다. 그것으로 지난 세월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주군을 지키려고 한다.”
“그거 퍽 기사다운 말이군요.”
후, 그레이가 실소를 뱉었다. 그리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서 또 이 자리로 왔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캘빈은 묵묵히 그레이를 껴안았다. 괜히 싫은 티를 내며 캘빈을 밀쳐 내는 무뚝뚝한 남자에게선 예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형님.”
형제의 재회였다.
“나 같은 늙은이도 다시 받아 주겠단 건가.”
“예, 거구에 무예를 익힌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요.”
한참 어렸던 캘빈은 이제 보니 그레이 자신을 많이 닮았다. 처음 그레이를 끌고 왔던 신참 기사 둘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둘이 닮았단 것을 몰랐을까. 게다가 발루아 기사단에 입단해서 줄곧 들었던 전설의 기사 그레이가 아닌가.
“저, 저기……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캘빈이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그건 백발이 돼서 돌아오신 형님 탓이다.”
“그래도…….”
“술이나 잔뜩 가져와라!”
“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검을 내려놓았던 캘빈의 영원한 우상, 그레이가 돌아왔다. 그러니 애달프고 가슴 아픈 지난날을 대신하여 술잔을 부딪칠 것이다. 그게 발루아 기사단의 방식이자 형제의 방법이었다.
***
혼자 남은 트리샤는 습관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머무는 곳이 크고 호화로워져도 마음은 늘 부족하다고 외쳐 댔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고 있는 트리샤의 다리에 하얀 고양이가 제 고개를 부벼 댔다.
“저리 가, 디나.”
성가시다는 듯 밀쳐 내도 고양이는 자꾸 트리샤의 품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어린 시절 길러 줬던 정을 잊지 못했다는 듯이 어미를 찾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디나, 너 정말!”
트리샤가 손을 홱 치켜들었지만,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차마 때리지 못하고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의 자신은 얼마나 순진해 빠졌던지, 디아나를 잊지 못하고 고양이에게 디나란 이름을 지어 줬다. 디아나는 이미 그전에 모든 것을 알고 트리샤를 버린 것뿐인데.
“진짜 디아나가 돌아왔어.”
트리샤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진짜야.”
루카스 앞에서 보였던 디아나의 미소가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아하고 당당한 미소와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트리샤의 눈에도 그랬는데, 루카스에겐 어떻게 비쳤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항상 날 비참하게 만들지. 겉으로는 호의를 베푸는 척…… 날 이용해서 더 돋보이려는 거야. 물론, 이번엔 나도 참을 수 없어.”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 걸까. 트리샤의 손이 기계적으로 고양이의 털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조금만 혼내 주면 디아나도 마음을 고쳐먹을 테니,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지?”
기억 속 트리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선연하게 빛났다. 생기를 잃은 디아나와 루카스 사이에서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이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했던 후작 트리샤의 모습은 시든 디아나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 트리샤의 완벽한 미래를 위해선 반드시 셋이어야 했다.
“괜찮아. 이제부터 하나씩 바로잡으면 돼. 쓸모없는 비비안을 치우고 다시 디아나를 데려오는 거야.”
트리샤는 마치 꿈을 꾸는 소녀처럼 순수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이는 내가 낳으면 돼. 우린…… 친구니까.”
루카스는 황제가 되고, 디아나는 부족함 없는 황후가 된다. 겉으로 내세우기 좋은 이 황실의 화려한 장식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어도 황실엔 필요한 존재였다. 그 사이에서 트리샤는 아이를 낳을 것이다. 트리샤의 아이는 루카스의 권세를 물려받고, 디아나의 혈통으로 포장되어 완벽한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전부, 다 가질 수 있어.”
트리샤는 미래에 야망을 덧그렸다. 이 제국을 삼킬 만큼 거대한 어둠이었다.
***
다음 날이 밝자 카를 공작저엔 발루아 기사단이라는 대규모의 손님이 찾아왔다. 실상 손님이 아닌 제 식구이자 공작저를 지킬 무력이었다.
디아나는 대외적으로 그레이가 다시 기사단에 복귀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며 공작저에 기사단의 거처를 마련했다. 캘빈은 그레이에게 기사단장의 징표를 넘겨주려고 옥신각신 중이었지만, 어느 쪽이든 공작저에 든든한 무력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전하께선 뭐라고 하셔요?”
씩씩한 단원으로 가득해진 정원을 보며 에드윈의 서찰을 받아 든 디아나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단을 얻게 된 걸 축하한다고…… 하지만, 조금 서운하신가 봐.”
“카를가에도 기사단이 있으니 당연한 일인걸요.”
루모스 기사단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온전히 자신만의 추가 전력이 생기는 건 디아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에드윈이 서운해하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온 저택이 기사단으로 북적이니 밤에 드나들 수 없는 것이 아쉬운 거다. 그 말을 했다간 샬롯이 또 눈매를 추어올릴 테니 디아나는 일부러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레이 집사…… 아, 아니. 셔먼 경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됐네요.”
거구에 갑옷까지 입고 검술 수련을 다시 시작한 그레이는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있었다. 발루아 기사단원들이 말했듯 늙었지만, 열 명의 현역도 거뜬히 때려눕힐 백발의 노장이었다.
“응, 그레이는 마음에도 단단한 갑옷을 입었으니까.”
“잘됐어요. 셔먼 경은 강한 사람이니까 보다 어울리는 위치로 돌아가야죠.”
그 말을 하는 샬롯의 목소리가 어딘지 쓸쓸하게 울렸다.
디아나가 혼자 남게 되고 둘이서 디아나를 돌봐 온 세월이 길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둘은 디아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각 가족의 빈자리를 메우려 노력했다. 과묵한 그레이였지만, 샬롯과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역할이 달라졌을 뿐, 우리 공작저의 식구들이라는 건 여전히 같아.”
이번엔 디아나가 샬롯의 손을 잡았다. 그 마음의 허전함을 읽힌 것 같아 샬롯은 마음이 울컥했다.
그 어린 영애를 어찌 키워야 하나 막막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이리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어엿한 성인이 됐다. 그 사실만으로도 샬롯과 그레이의 인생은 의미가 있었다.
“아마 앞으로는 힘들어지겠지. 우리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그 말을 하는 디아나의 얼굴은 묘하게 후련했다. 쫓고 쫓기는 건 지쳤다. 이제 곧 결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찍지 못했던 마침표였다.
“트리샤의 사악한 힘이나 황실의 권력에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그러나 디아나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난 싸울 거야. 이 악연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 날을 보고 싶어졌어.”
이생엔 소중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무엇 하나 바꿀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 모두 공작님과 함께 싸울 거예요.”
“응. 그리고 모두 함께 미래를 그리고 싶어.”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서 디아나는 각오를 굳혔다. 이 책의 이야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량을 뛰어넘었을 때, 디아나가 스스로 적을 수 있는 백지가 나타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