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단둘이 남자 루카스가 한층 노골적인 시선으로 디아나를 관찰했다. 늘 루카스를 피하는 인상을 줬던 디아나는 어릴 적 친구인 트리샤를 보자마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과 나는 인연이 깊은 사이인데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군.”
디아나는 오래전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됐다. 서로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만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는 고귀한 분이니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특히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남은 건 처음이었다. 루카스는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한때 제 것이 될 여인이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흐음, 단지 그것뿐인가?”
“예?”
“나를 피했던 이유 말이다.”
루카스는 태어나자마자 황태자로 책봉됐다.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과 피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실에서 떠들어 대는 소문을 모를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황태자비가 되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 입으로 부족한 점을 고하고 물러나는 건 루카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여태 내심 공작이 국혼 전부터 날 피했다고 추측했거든.”
디아나는 루카스의 녹안 안에 자리 잡은 의심 한 자락을 봤다.
“역시 황태자 전하는 속일 수가 없군요. 네, 맞습니다.”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디아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일찍 부모님을 여읜 것을 아시지요?”
“모르는 자도 있나.”
“그래서 전 어릴 때부터 가족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어요.”
디아나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제 몸에 이상이 있단 걸 알았지만, 의원들은 조금 더 지켜보자고만 했죠. 하지만 전 아무 변화 없이 성인이 됐어요.”
“모후께서도 그대의 불임을 확정한 것은 아니잖나. 내 말은…….”
“왜 침묵하고 황태자비가 되지 않았냐고요?”
루카스는 늘 그렇듯 생각이 짧았다. 디아나가 루카스와 혼담을 피하고자 불임을 가장하긴 했지만, 실제로 불임이었어도 황태자비가 될 수는 없었다.
1년, 어쩌면 2년, 3년…… 그 정도는 기다려 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까지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정비가 고개를 떳떳이 들 수 있을까.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어찌 불안한 마음으로 죄를 지을 수 있겠어요. 무엇보다……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감히 전하께 드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지난 생에서 디아나는 허울뿐인 왕관을 쓰고서 후계자도 생산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황태자비로 손가락질받았다.
디아나가 제 손으로 첫 회귀를 일으킨 건 아이를 유산한 직후였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를 위로하긴커녕 제 씨를 뿌리려고 기계적으로 디아나를 범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트리샤를 입에 담던 그 순간을 어찌 잊겠는가.
“안타깝군.”
디아나의 표정이 너무도 비통해서 루카스는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디아나가 받았을 상처보다 괜히 눈에도 안 차는 비비안을 비로 들인 걸 손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적임자가 눈앞에 있는데 하필 치명적인 불임의 가능성이라니, 루카스로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짜증스러웠다.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안 그런가?”
루카스의 발언이 살짝 선을 넘었다. 제게 디아나를 범할 기회가 있었다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였다. 그건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한 뉘앙스였다.
“오늘 의회에서 들었겠지만, 황태자비의 가문이 큰 죄를 저질러서 당분간은 그쪽에서도 후사를 볼지 모르겠거든. 불투명한 미래라는 건 똑같지 않나?”
뻔뻔하게 읊어 대는 루카스를 보자 디아나는 마음속에서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조차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기회는 있었다. 이전의 생에서 루카스는 디아나를 독점했다. 그러나 이미 제 것이 된 디아나에게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주지 않았던 것도 루카스였다.
“그래도 황태자비 전하께선 모르시는 일이었잖아요. 전하께서 너른 마음으로 품어 주세요.”
“물론…… 나는 관대하니 이 정도에서 끝내 준 것이다.”
“네, 참으로 관대한 처사에 저도 감동했습니다.”
디아나도 꽤 뻔뻔해졌다. 먼저 이런 수를 두면 루카스의 자존심에 그런 체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예상대로 루카스는 큼, 하고 헛기침했다.
그사이 얼마나 걸음을 재촉했는지 트리샤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분명 숨이 찰 텐데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말씀대로 밀크티를 내왔어요. 아, 물도요.”
물론, 디아나는 트리샤가 내온 것에 손을 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퍼즐은 처음 해 보는데요.”
“난 때때로 즐긴다. 뭔가 성취감이 들거든.”
트리샤가 애써 마련해 온 티 세트는 바로 외면받았다. 최근 루카스의 관심을 받는 건 자신뿐이었는데 디아나가 나타나기 무섭게 루카스는 더 신선한 대상에 온 시선을 빼앗겼다. 트리샤는 허무하고도 분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생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 디아나. 전하께서는 얼마 전에도 정말 섬세한 퍼즐을 완성하셨어.”
트리샤가 더 밝게 둘의 주의를 끌었다.
“그때 마지막 세 조각을 찾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잖아요, 전하.”
“아, 그랬지.”
“나도 같이 맞췄거든. 디아나는 모르겠지만, 퍼즐을 맞추다 보면 시간이 정말 금방 가.”
디아나는 재잘거리며 자연스럽게 티 세트를 끌어다 놓는 트리샤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미약을 쓰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트리샤가 그 광경을 직접 보여 줄 것 같진 않았다.
이전의 생에서 트리샤는 분명 디아나에게만 자신의 주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디아나가 이 책의 밖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은 디아나에게 가장 큰 무기이자 방패였다.
“그러고 보니, 공작의 이름이 디아나였지.”
루카스는 여전히 디아나에게 관심이 쏠린 상태였다. 그 꼴이 퍽 우스웠다. 이름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트리샤가 부른 것을 기회로 삼아서 수작을 부리려는 거다.
“디아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다시 듣자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과찬이십니다.”
디아나가 어른스럽게 루카스의 얕은 수작을 잘랐다.
“디아나 그대와 리샤는 어릴 적부터 오랜 친구고, 리샤는 나의 새로운 친구…… 애매하군, 그래?”
루카스가 은근히 공작이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디아나는 불쾌함을 참고 태연한 얼굴을 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다음에 올 말이었다. 디아나가 이미 지겹게 겪었던 그 관계다.
“아, 그럼 차라리 디아나 그대와 내가 친구가 되면 해결되겠군.”
“좋은 생각이에요, 전하. 디아나와 전하와 저…… 셋이 친구라니 이렇게 멋진 일은 또 없을 거예요.”
트리샤는 예전부터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붉게 반짝이는 트리샤의 눈동자가 디아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관계가 디아나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영롱한 눈동자였다.
“어떤가, 디아나.”
디아나는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정말 영광이에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와 우정을 이어 갈 수 있어서 더…… 특별하네요.”
화사한 미소와 트리샤의 바닥을 꿰뚫는 시선이 함께했다. 세 사람이 다시 친구라는 미명으로 묶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것은 그뿐이었다. 이제 그때의 순진한 디아나는 없었다.
***
해가 저물어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난 디아나는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다행히 황실은 개문과 폐문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외부의 손님은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야 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밤새 그 끔찍한 조합으로 퍼즐 쪼가리나 맞춰야 했을 거다.
과거 황태자비였던 때는 항상 그런 식으로 둘의 우정에 전리품처럼 끼어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 봐야 디아나의 역할은 그 둘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한지 증명하기 위한 존재였다.
트리샤의 배신은 그렇다 쳐도, 남편인 루카스까지 디아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봐 주지 않는다는 건 잔인했다.
“공작님, 많이 피곤하시죠?”
샬롯이 부르는 호칭에 디아나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입가엔 피로를 견딜 미소가 번졌다.
“응, 그렇지만 내가 지금 공작이라는 사실이 기쁘네.”
샬롯은 디아나의 모를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곤 능숙하게 시중을 들었다.
외출복을 벗고 몸을 닦아 내고 다시 실내복을 입을 때까지도 디아나는 입을 닫았다. 샬롯은 디아나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고 잘 준비를 마치고 숙면에 좋은 차를 내왔다. 디아나는 차를 한 모금 머금고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 트리샤를 만났어.”
“네?”
“그것도 황태자 전하와 함께. 정확히는 의회에 갔다가 황태자 전하의 초대를 받아서 독대하게 됐고 트리샤가 끼어들었지. 예상대로 트리샤는 황태자 전하의 곁에 있었어.”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에 샬롯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신분을 초월한 친구라며, 트리샤를 리샤로 부르시더라고.”
“……네?”
샬롯도 자신이 답답했지만, 계속 놀라운 소리만 들으니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모든 부분이 다 놀라워서 어디를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합류했어. 그 친구 놀이에. 물론, 내가 좋아서 한 건 아니지만.”
디아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샬롯은 잠시 선 채로 눈만 끔벅거렸다.
“어…… 그러니까, 오늘…….”
“괜찮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그냥, 딱 내 생각만큼 불쾌했어.”
샬롯은 복잡한 말을 늘어놓는 대신 디아나의 어깨를 도닥였다. 의회에 출사한 디아나가 늦어지기에 속을 태웠는데 그 시간 동안 디아나가 고통받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고생 많으셨어요.”
“소득도 있어. 오늘 내가 트리샤의 속을 좀 긁었거든.”
트리샤의 약점은 바로 그 열등감이다. 그리 영악한 트리샤도 열등감을 찌르는 상대에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아마 그 성정은 여전할 것이다. 루카스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서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곧 급하게 움직일 거야.”
어차피 트리샤의 존재는 독이었다.
“그러면 시간이 없는 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가 되지.”
디아나가 손을 쓸 수 없는 황실에 숨은 트리샤는 상대하기 몹시 까다로웠다. 하지만 트리샤가 먼저 나서 준다면 그 걱정은 사라진다.
몇 번의 생은 허무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디아나는 매번 죽어 가면서 조금씩 트리샤라는 독에 면역을 길러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