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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5화 (145/184)

145화

루카스의 노려보는 시선을 더 견딜 수 없었던 디아나가 힘겹게 입을 뗐다.

“후입니다.”

디아나는 도박을 걸었다. 막상 말을 뱉고 나자 멈춘 것 같았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 또한 거짓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감히 전하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싱긋,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추궁하는 루카스로선 이해할 수 없는 태연한 미소였다. 디아나의 도박은 성공한 셈이다.

만일 에드윈과의 관계에 확신이 있었다면 루카스가 시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던진 과감한 도박이었다.

“어쨌든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건 부정하지 않는군.”

루카스의 추궁이 방향을 틀었다. 디아나는 다급한 그의 질문에서 심증만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루카스가 조금만 더 진중한 성정이었다면 차근차근 증거를 모아서 디아나를 압박했을 거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인내심이 없었다.

“예,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디아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루카스에게 확증이 없단 걸 알았으니 대화의 흐름을 잡는 것은 디아나였다.

“황후 폐하의 명이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뭐?”

루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역시, 루카스는 에드윈을 의심하고 있었다. 오늘 에드윈이 출사하지 않은 건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루카스는 에드윈의 예상보다 더 의심이 많았다. 디아나만이 아는 면이었다.

“황후 폐하께선 제가 황태자비가 될 수는 없으나 너무 절망하지 말라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언급하셨듯이 혼인 전에는 불임을 확정 지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시면서요.”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에 루카스는 디아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서로 뻔히 아는 인물이 있는데 설마 황후가 에드윈과 디아나의 사이를 이었단 말인가. 물론, 황후에게 그럴 저의가 있긴 했지만, 그레이스가 있는 한 나설 명분은 없는 채였다.

“하여, 황후 폐하의 주선으로 밀레타 영식을 만났습니다.”

“밀레타가 여기서 왜 나오지?”

“황후 폐하께서 주선하셔서 개인적으로 만난, 전하와 제가 모두 아는 그분이라면…… 달리 없지 않나요?”

황후의 심술이 예기치 못한 데서 디아나의 편을 들었다. 부당한 요구를 참고 견딘 보람이 있었다.

“밀레타 영식과의 만남을 주선하셨다고?”

“예. 당연히 그 말씀을 하시던 게 아닌가요?”

루카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반박하진 못했다. 차분하게 되묻는 디아나에게 이제 와 속셈을 꺼냈다간 체면이 상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혼자만 열을 내는 것 같아 불쾌했던 참이다. 감히 공작이 되었다고는 해도 한때는 고작 제 정비 후보였던 여인이다.

황태자비인 비비안조차 제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는데 공작의 이름으로 제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게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공국에선 대가 끊어져도 된다던가?”

저열한 빈정거림이었다. 제 마음대로 대화가 풀리지 않자 부리는 심술이었다.

“아직은 황후 폐하의 주선으로 만난 것뿐이라…… 다행히 영식께선 좋은 분이라 차차 대화를 나눠 보기로 한 정도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내심 리암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어차피 그의 정혼녀는 신분의 장애가 있어 당장 혼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두 사람이 교제하는 것으로 해 두면 서로에게 좋은 방패가 된다. 황후가 아주 딱 맞는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허, 작다고 해도 공국인데 내 정비 후보에서 탈락한 여인을 굳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황후 폐하의 명을 따른 거지요.”

루카스의 인신공격에도 디아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게 퍽 담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항상 제 눈치를 살피는 비비안이나 주위 궁인들만 대하던 루카스로선 신기한 광경이었다.

“참 이상하군. 공작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마치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아니면 가면을 벗은 건가?”

“아무래도 카를가를 책임지게 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는 들을수록 루카스의 기분을 흔들었다.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디아나의 존재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신비로운 푸른빛의 눈동자도.

“오늘은 그렇다 치지.”

루카스는 쉬이 단념하지 않았다.

“난 퍼즐을 즐기거든. 당장엔 확연히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모든 조각을 모으면 선명해지는 것이 재미있어. 공작도 함께해 보겠나?”

권유가 아니었다. 루카스의 시선에는 강압이 담겨 있었다. 디아나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이내 시종장에게 지나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리샤를 데려와라.”

쿵,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트리샤가 나올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루카스의 입에서 리샤라는 호칭이 나오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려 왔다.

지금, 이 순간, 디아나는 끔찍하게 여겼던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젠가 와야 할 것을 알았어도 견디기 어려웠다.

“전하, 찾으셨어요? 마침 새로운 퍼즐을 들고 왔는데…… 어머.”

등 뒤로 트리샤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간신히 숨을 내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서 일렁이고 있었다. 반짝, 루비 같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봤다.

“디아나, 정말 오랜만이야!”

티 없이 맑고 천진난만한 트리샤의 목소리.

“앗, 제가 감히 실언을…… 공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루카스를 향해 가련한 체를 하는 모습.

“아니, 둘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지? 내가 허락할 테니 예의 차릴 것 없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둘 사이에 루카스가 놓였다. 그는 기꺼이 둘의 우정을 격려했다. 마치, 이전의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어찌 공작님께.”

“친구라면 신분은 아무래도 좋은 거지. 안 그런가, 리샤?”

리샤, 리샤, 리샤…… 디아나의 생을 옭아매던 그 이름이 부활했다.

“전하께서 관대하신 거죠.”

트리샤는 어린 소녀처럼 천진하게 루카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둘은 이미 디아나가 모르는 곳에서 악연을 맺은 후였다.

“공작은 아니고?”

루카스가 굳이 짓궂게 물었다. 디아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꾹 누르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트리샤도 해내는 연기를 디아나가 못 해낼 리 없었다. 무엇보다 트리샤가 선수를 치게 놔두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디아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각오가 굳었다.

“그럴 리가요.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트리샤.”

디아나의 얼굴에 싱긋,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루카스는 잠깐 저도 모르게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 전에 큰일을 겪었다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깜박, 트리샤가 디아나를 봤다. 그 미소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루카스는 모르는 둘만의 시선 교환이었다.

“응, 전하의 자비 덕분이야.”

트리샤가 또 잔망을 떨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디아나는 이미 그런 순간을 질리게 봐 왔다. 그래서 한발 앞서기로 했다.

“황태자 전하. 제가 전하를 너무 어렵기만 한 분으로 오해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디아나가 루카스를 보며 눈썹을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고귀한 분이라 저도 모르게 큰 부담을 느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자비로운 분인 줄 몰랐어요. 한낱 시녀인 트리샤와도 우정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루카스는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디아나의 태도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냉담하게 선을 긋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디아나의 사적인 모습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꽤 좋은 기분이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관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야 물론이지만, 인간적인 면으로도 존경심이 들어요. 그동안 저 혼자 전하를 너무 어려워해서 괜한 오해만 샀네요.”

“아…… 아까의 이야기인가?”

트리샤는 아까부터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미소를 유지한 채 둘을 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등장해야 할 순서에 미소를 장착했는데 보란 듯이 디아나가 제 순서를 가로챘다.

이건 기억의 어느 부분에도 없던 디아나의 일면이었다. 즉, 트리샤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디아나는 늘 루카스를 피하고 어려워해야 했다. 그 차갑고 고고한 태도에 루카스가 질색해야 한단 말이다.

“저어, 두 분…… 차를 내올까요? 퍼즐은 어디에 펼치면 좋을지 전하께서 정해 주세요!”

트리샤가 억지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필사적인 미소를 띤 채였다. 다행히 루카스는 힐긋 트리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름을 다시 가져올 차례였다. 디아나에게 우정과 약간의 미약이 가진 효과를 보여 줄 때다.

“트리샤, 나는 밀크티로 부탁해. ……그래도 될까요, 전하?”

“물론이다. 나도 공작에 대해서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군.”

디아나는 허점을 주지 않았다.

“전 어릴 때 병약했던지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러서요……. 하지만 제 절친한 친구인 트리샤를 곁에 두시는 전하의 모습을 뵙고 나니까 벽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실제로 디아나의 말투에서 격식이 사라졌다. 차분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동시에 디아나에게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시선은 트리샤를 잊은 채 디아나를 향했다.

“오늘 공작의 새로운 면을 많이 보는군.”

루카스의 조급한 성정은 무척 변덕스러웠다. 즉, 다루기에 따라선 어린아이처럼 기분을 맞추고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트리샤도 그런 루카스를 자주 이용하곤 했다. 디아나는 그 무렵 이미 루카스에게 애정이 사라진 후라서 노력조차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공작이 날 피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것도 오해였나?”

“네. 막연히 전하를 어려워했던 제가 부끄러워요.”

“리샤가 우리 사이의 오해를 풀어 주게 됐군.”

루카스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트리샤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디아나가 콜록, 마른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긴장했더니 목이 타서.”

“저런. 리샤, 차를 내오면서 물도 같이 내와라.”

루카스가 생각하는 친구라는 건 고작 이 정도였다. 그는 우정을 느끼는 체 연극을 즐기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무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트리샤는 기꺼이 웃으며 그들의 심부름을 하러 물러가야 했다.

“……네, 전하.”

방을 나선 트리샤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잠시 잊었던 굴욕감이 떠올랐다.

“어디 애써 봐. 그래도 내 힘을 뺏을 수는 없어.”

트리샤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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