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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4화 (144/184)

144화

곧 의회에서 샤리즈 후작에 대한 처분이 결정됐다. 디아나는 카를의 공작으로서 그 순간을 지켜봤다.

의회를 이끄는 재상 하인리히에게 이미 명령이 전달된 것인지, 황태자인 루카스는 뒤의 상석에서 그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전, 샤리즈 후작이 황실에서 나온 시녀를 범하려다가 미수에 그치자 오히려 도둑으로 몰아세운 일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황실의 일이니 엄격히 황실의 법도를 따른 바입니다.”

즉, 귀족들의 항의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황실 내부의 일을 의회에서 논의하는 건 드물었다. 이번 일처럼 내부적인 일은 통보에 그칠 때가 많았다.

“샤리즈 후작은 황실의 사람에 손을 댔고 모함까지 했으니 그 죄질이 극히 불량하나, 황태자비 전하의 친부라는 것을 참작하여 황실에서도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과연. 디아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의장을 바라봤다. 황후와 외척 세력의 의견은 뻔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이 아니었어도 황태자비의 세력을 밟아 둘 작정이었을 거다.

한번 겪어 봤던 처지라 그런지 비비안에게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쯤 얼마나 비참한 심정일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황실은 샤리즈 후작의 후작위를 박탈하고 수도에서 추방하며 후작령을 국고로 몰수하되 소유한 자작 영지는 보존할 수 있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금족령이 결정됐으며 의회에 출사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사회적인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이 자비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지만, 후작령에 딸린 자작 영지 따위는 문자 그대로 소소한 재산일 뿐이고 사회적인 위치나 그들이 이룬 부는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으로 제국의 유일한 외척 가문은 반 테스 공작가로 결정된 것이다.

“저런, 왜 그런 짓을.”

“황태자비 전하의 근심이 보통이 아니겠군.”

의회가 잠시 술렁였다.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재상을 제치고 의장석에 섰다.

“이만하면 큰 자비를 베푼 것이니 더는 언급을 금한다.”

황실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디아나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살며시 돌렸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미 의회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디아나에게 시선이 멈춘 채였다. 그 차갑고 끔찍한 시선을 디아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를 공작이 출사했군.”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디아나는 하는 수 없이 루카스를 보고 고갯짓으로 예를 올렸다.

“공작 즉위식이 엊그제 같은데…….”

루카스의 눈동자는 뱀을 닮았다. 이전의 생에서 그와 부부로 살 때도 단 한 번 온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온기는 있었으나 그건 전부 트리샤의 몫이었다.

그러나 트리샤의 사악한 힘을 알게 된 지금은 루카스에게 진정 온기라는 게 있긴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트리샤에게 보였던 따스함조차 마법의 영향이 꾸며 낸 것이라면, 루카스도 참 불쌍한 인간이었다.

“그래. 그때의 멋진 모피가 떠오르는군. 새하얀…… 분명, 제국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이 직접 잡아서 만들었겠지. 그에게 감사는 했나?”

역시, 디아나의 불안대로 루카스는 그 모피에서 에드윈의 손길을 읽어 냈다. 에드윈은 순수한 애정의 표현을 한 것이었지만, 그 솜씨가 너무 특출난 나머지 상대가 좁혀졌다. 루카스 특유의 집요한 성격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는데 디아나도 방심했다.

“예, 제 선친께서 물려주신 것이니 당연히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까진 없을 테니 이참에 못을 박아 두겠다는 뜻이었다. 루카스는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로 디아나를 주시했다.

“공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끝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는 태도로 봐선 디아나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에드윈은 대공저의 공무를 핑계로 자리에 없었다. 디아나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에드윈은 디아나가 관계되는 일에는 쉽게 이성을 잃었다. 공석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한 건 루카스에게 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카를로 떠날 생각인가?”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예. 그렇습니다.”

루카스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대놓고 루카스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어투였다. 고위 귀족들은 수도로 오지 못해 안달인데 굳이 수도를 떠나겠다는 심보까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남은 안건이 그것뿐이라면, 의회는 이만 해산해도 되겠군.”

디아나의 예상대로 루카스는 쉽게 디아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은 남도록.”

하지만 루카스의 대담한 발언은 예상을 벗어났다.

“공작의 요청이 정당한지 내 직접 대담하며 살펴봐야겠다.”

디아나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석 아래의 손은 주먹을 꾹 쥔 채였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간신히 이성을 붙들어 줬다.

되도록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디아나의 욕심이었나 보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검이 마주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디아나와 루카스의 싸움은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은 도망칠 핑계가 없었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카스가 디아나가 들어오자마자 빈정대는 말을 날렸다.

“공작은 항상 나를 피하잖아? 카를과 황실은 적도 아닌데.”

그러나 루카스는 디아나의 적이었다. 상대의 집요함을 알기에 일부러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피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도 무리한 핑계를 댔다면 이 자리에 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직접 알아내야 했다. 트리샤의 존재가 루카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고 있는지, 둘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진위를 알아낼 수 있는 건 루카스가 직접 불러들인 디아나뿐이었다.

“전하께서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전하를 피하겠습니까.”

디아나의 태도는 우아하면서도 격조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황태자와 공작이라는 선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의 모습이 새삼스러운지 부담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디아나는 뱀이 자신의 피부를 기어오르는 것처럼 오한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도 그게 궁금하단 말이지. 나의 어디가 그리 싫어 혼담부터 줄곧 피한 것인지.”

“그 또한 오해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실의 대를 끊겠습니까.”

루카스가 담담히 대답하는 디아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디아나를 볼 때면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제 것이 될 여인이었기 때문인지, 루카스가 좇지 않는데도 도망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우연이 몇 번, 루카스는 희미하게 확신을 품은 채였다.

“그럼, 내 직감이 틀렸단 말인가?”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루카스는 평소에도 의심이 많은 성정이었고 멋대로 착각해서 궁인들을 처벌하곤 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디아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도망치면 쫓는 것이 사냥개의 본능이었다. 디아나가 루카스만큼이나 끔찍하게 싫어했던 세 마리의 검은 개처럼.

“연기가 완벽하지 못하군. 지금 공작의 눈동자가 어떤 빛인 줄 아나? 마치 뭔가를 필사적으로 숨기는 기색이야.”

“숨기는 게 없는데 그리 보인다니 이상한 일이군요.”

“과연 그럴까…….”

단둘이 마주하는 디아나에게선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절세미인으로 제국에서 소문이 자자한 건 잘 알았지만, 가까이에서 막 피어난 꽃처럼 싱그러운 생기를 풍기는 디아나의 미모는 또 새로운 면이었다.

루카스는 몰랐지만, 그의 주위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사내의 사랑을 받는 여인 특유의 달콤한 기색이었다.

“전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인지 혼전에 확신할 수 없다더군.”

“저는 황실의 검증을 따랐고, 적합하지 못하단 판정을 받아서 물러나게 됐을 뿐입니다.”

루카스에겐 몇 가지 더 의심스러운 게 있었다. 국혼 날, 살아 있는 피 냄새만 쫓는 개들이 디아나에게 달려들었던 것과 그때 나선 인물이 하필 디아나에게 모피를 선물할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에드윈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황태자비 검증이 사실이라면 디아나는 초경도 맞이하지 못한 몸이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루카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한층 자욱해진 여인의 성숙한 향기였다. 그건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 눈엔 공작이 혼인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숙해 보이는데?”

“저는 황후 폐하의 뜻을 따랐을 뿐이라서요.”

디아나는 같은 답을 내놨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 공작이 혼인할 수 없는 몸이라 치자. 그렇다면 왜 세간의 눈을 피해 다른 사내를 만났나?”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루카스가 어디까지 알고서 떠보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미 다 들었으니 오늘은 어지간한 핑계로는 도망칠 수 없다. 정말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면…… 그런 신분의 사내와 만날 수도 없을 텐데.”

디아나는 답을 보류했다. 그러자 루카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체취가 풍기자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또 모르는 척하는 건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그 사내를 이야기하는 건데.”

디아나의 푸른빛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루카스는 다시 한 번, 그때 만월의 밤에 비굴하게 제 죄를 고하던 디아나의 모습이 거짓이라고 확신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디아나에게선 타고난 고고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루카스가 아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의회에선 제 의견을 당당히 말하면서, 왜 내게만 대답조차 아끼는지 더 수상하군.”

“황태자 전하는 고귀하신 분이니 당연히 제겐 어려운 분이지요.”

적절한 대답이었지만, 루카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니 하문하겠다. 어찌, 세간의 눈을 피해 그를 만난 건지.”

당혹스러움이 지나치자 오히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아니, 전신의 피가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 이 잔혹한 녹안을 보며 입었던 상처가 자꾸 떠올랐다.

그 집요한 성정에 도대체 어디까지 조사한 것일까. 디아나는 일부러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루카스는 성정이 급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얻어야 했다.

“언제부터 특별한 관계였지? 국혼이 오가기 전인가, 후인가?”

루카스의 의심은 특유의 피해의식에 기인했다. 그 상대가 에드윈이라면 더 그랬다. 디아나에 대한 묘한 집착과 의심도 에드윈의 수상한 행적이 더해져서 시작된 것이다.

상대가 에드윈이라면 디아나가 후계를 생산할 수 있든 없든, 루카스로선 참지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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