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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3화 (143/184)

143화

황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겨우 국혼을 치르고 후계자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황태자비가 처소에 연금당했으니 계획이 틀어졌다. 황실의 견고한 계획이 무너진 것은 트리샤 블랑이라는 사소한 시녀 하나에서 비롯됐다.

“시녀야 아무래도 좋은 것을.”

쯧, 황후가 혀를 찼다. 황후전의 시녀장 모니카는 그런 황후의 눈치를 최대한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트리샤란 아이를 황태자전의 시녀로 데리고 있겠다고?”

“예,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의 의견이 워낙 강하셔서요.”

“영특한 아이긴 했지. 하지만, 그래 봐야 미천한 시녀야.”

“황후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황후가 한숨을 길게 뱉었다. 제 아들이니 루카스의 성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기서 황후가 간섭한다면 루카스는 더욱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곧 19세가 되는 루카스는 점점 모후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차였다.

“황태자비에게 가 봐야겠다.”

“하오나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그것은 황태자의 명령이고, 난 황후다.”

스텔라가 정면을 응시했다. 아직은 루카스를 통제할 수단이 있었다.

“……소인이 실언했사옵니다, 폐하.”

그러나 루카스가 황위에 오르면 이런 권위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 대책을 세워야 했다.

무엇보다 모처럼 맞이한 정비에게서 후계자를 만들지 못하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루카스가 황태자일 때 어떻게든 몰아붙여서 해결해야 했다.

“가자, 시간이 없어.”

곧 황후의 행차가 황태자비전에 도착했다. 황태자의 명으로 엄중히 감시하던 근위병들도 차마 황후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황후는 그들을 슬쩍 노려보고는 바로 황태자비가 있는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시녀장인 엠마가 빠르게 황후를 막아서며 예를 올렸지만, 황후는 손짓 하나로 엠마를 치워 버리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비비안의 침소로 향했다. 현재 황태자비전이 처한 상황처럼 온통 침울하고 적막이 가득한 장소였다.

“폐, 폐하…….”

뒤늦게 황후의 존재를 알아차린 비비안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급하게 예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비비안의 얼굴이 무척 수척했다. 옷차림도 수수한 실내복으로 아예 죄인이 된 듯한 꼴을 보니 황후의 입에서 절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고작 그 정도 일로 이런 꼴을 하고 있느냐?”

“송구하옵니다…….”

비비안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처음엔 루카스의 처분을 부정해 보기도 했지만, 근위병이 들이닥치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저도 모르게 체념하고 말았다.

“사건은 나도 들었다.”

일부러 참견하진 않았지만, 황후가 모르는 황실의 소식은 없었다.

“어리석은 짓을 했더구나.”

“폐하, 오해입니다.”

후, 황후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나왔다. 당사자인 트리샤가 버젓이 살아서 증언한 데다 그 증언대로 샤리즈 후작은 다친 채였다. 그보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제가 어찌 트리샤를 해치려고 했겠습니까. 트리샤는 제 시녀이자 친구…….”

“됐다.”

황후가 지겨운 표정을 짓고는 비비안의 턱을 잡아 얼굴을 억지로 들었다.

“그깟 시녀 몇을 죽인대도 난 상관치 않아. 하지만, 처리를 똑바로 했어야지. 차라리 황실에서 죽이는 게 나았을 거다.”

비비안은 생각지 못한 황후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폐하, 저는 정말…….”

“진실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네가 루카스의 눈 밖에 났다는 거다. 그것도 후계자를 낳기도 전에.”

비비안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어졌다. 황후는 처음부터 비비안을 후계자를 낳을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고 확언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게 지금 상황에선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황후가 트리샤에 대한 혐의를 추궁하진 않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네 아비의 죄를 아느냐?”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개 시녀도 황실의 일원이다. 감히 황실의 사람을 해치려 했다는 것은 신분과 관계없이 중죄다.”

황후도 여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시녀를 없애 왔지만, 비비안처럼 안일하게 남의 손을 빌리진 않았다.

황실에서 시녀가 죽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황실 밖에서 시녀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건 황실에 대한 모독이었다.

“부디, 제게 지혜를 빌려주시고 기회를 주세요.”

비비안으로선 최선의 답이었다.

황후는 비비안의 턱을 놓고 그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겨우 이런 일에 초라해진 몰골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황후가 될 재목인데 시녀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되다니,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니 퍽 한심한 꼴이었다.

“황태자에겐 이미 명분이 있다. 너의 아비가 황실의 시녀를 해치려고 했다는 중요한 명분. 그걸 뒤집을 방법은 이제 없어. 그러니, 가문을 포기해라.”

“예?”

비비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네가 살아날 유일한 방도야. 내가 베풀 수 있는 자비는 이게 다다.”

황후는 냉정하게 비비안을 주시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네 아비가 벌인 일로, 샤리즈 후작가를 처벌하고 황태자비인 너는 무관한 것으로……. 그게 낫지 않겠느냐? 네가 후계자만 낳으면 가문의 명예야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

어차피 황후는 자신의 가문 외의 외척 세력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실부모한 디아나가 적임이었지만, 샤리즈 후작가도 나쁘진 않았다.

전형적인 졸부로 벼락출세한 가문이기도 했고, 지금처럼 적당한 꼬투리를 잡으면 바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즉, 늦든 빠르든 샤리즈 후작가는 짓밟힐 운명이었다.

“아니면 가문과 함께 평생 유폐된 신세로 살겠느냐?”

비비안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널 구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황후가 일부러 비비안을 몰아세웠다.

“가문과 함께 연금된 채로 평생을 보낼지, 이 고비를 넘겨서 황실의 적자를 낳고 명예를 드높일 것인지……. 무엇이 현명할까.”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비비안은 황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부디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몸짓이자 황후에게 복종을 선언하는 뜻이었다.

“황후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모든 것은 네가 적자를 낳으면 해결된다. 내 말을 알겠느냐?”

“예, 폐하…… 저, 부모님은 어떤 처벌을…….”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허나, 최대한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해 보마.”

“폐하께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황후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침 적당한 구실로 적당한 때에 외척을 쳐낼 수 있다니 뜻밖의 수확이었다. 물론 비비안이 적자를 낳기도 전에 샤리즈 가문의 모든 힘을 짓밟아 낼 계획이었다.

“트리샤 블랑이 루카스의 눈에 들어 황태자전의 시녀로 있다더군.”

“……트리샤가요?”

비비안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황후는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는 듯 쉽게 말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실의 사람이 된다는 건 비비안의 각오보다 더 가혹했다.

“넌 트리샤를 해칠 뜻이 없었고 친구라고 했지?”

“예…….”

“그렇다면 황태자비로서 관용을 베풀도록 해라.”

황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비비안이 너무 순진해 보여 실소가 났다.

“그래, 아직 어리니까…….”

황후가 혼잣말하곤 다시 비비안을 봤다.

“네가 트리샤를 관대하게 대한다면 곧 네 결백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면 루카스의 마음이 좀 풀어질 테지.”

루카스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 건 처음이었다. 황후도 그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 루카스는 트리샤란 아이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당분간은 그 놀이에 동참하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씀은…….”

“걱정하지 마라. 여기는 황실이야. 적법한 후계자는 너만이 낳을 수 있고, 총애를 받았던 시녀들은 남모르게 사라지기 마련이지.”

황후의 뜻은 명백했다. 비비안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루카스와 트리샤의 즐거운 한때에 어울릴 것과 설령 그들의 사이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더라도 묵인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비안이 해야 할 것은 오로지 후계자를 낳는 것뿐이었다.

“감정 따위,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후계자를 낳는다면 나처럼 권세를 누릴 수 있지.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지.”

경험에서 우러난 황후의 충고였다. 스텔라가 황태자비였을 때도 이런 고비는 숱하게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인 드노아 경은 어떻게든 후계자를 낳는 것에 사활을 걸라고 했다.

결국, 시간은 스텔라의 손을 들어 줬다. 황제가 자신을 기만하며 보란 듯이 유희를 즐기던 시녀들은 아무도 모르게 하나둘 사라졌다. 남은 것은 유일한 황실의 후계자인 루카스와 그 모후인 스텔라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비비안이 간신히 입을 뗐다. 황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비비안을 응시하다 이내 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비비안의 안색이 창백했다. 황후가 떠나자마자 다급히 들어온 엠마가 휘청이는 비비안을 붙들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비비안은 대답하는 대신 부들거리는 팔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아니.”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나온 소리였다.

갑자기 여태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졌다. 비비안은 태어나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겪은 후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트리샤의 귀환과 즉시 제게 달려와서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을 외치던 루카스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땐 그저 돌이 되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황후의 말을 듣고 나자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난, 패배한 거야.”

비비안이 짓씹듯이 말했다. 애초에 비비안이 어리석은 수를 썼기에 가문에까지 피해가 끼치게 됐다.

황후는 너무도 쉽게 후계자만 낳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더 굴욕을 참아야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끔거렸다.

“전하, 황실에선 무엇도 속단할 수 없어요. 참고 견디시면 다시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엠마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아무리 트리샤가 잠시 환심을 산대도, 황태자비는 전하세요.”

어떤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비비안이 기댈 것은 황태자비라는 지위뿐이었다. 황후도 비비안을 걱정한 게 아니라 정비에게서 후계자를 보지 못할까 봐 나선 것이리라. 그러니 비비안이 해야 할 일은 더욱 자명했다.

그렇게 황실에선 또 하나의 스텔라가 태어났다. 단지 제 왕관을 지키고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괴물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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