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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2화 (142/184)

142화

디아나는 그레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자신의 몫도 아니었고 그레이가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카를의 공작으로서 그레이 셔먼에게 명령한다.”

이 명령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대했던가. 그레이는 아직도 어리석었던 자신을 깨달았다.

선친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소중한 존재는 무한히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를 넘어서 어엿한 공작이 되었다. 눈앞에 두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자신은 정말이지 우둔했다.

“죄인 그레이 셔먼이 공작님의 명을 듣겠습니다.”

“그대는 나의 선친과 내게 죄를 지었다. 허나,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아니기에 나 이외의 자에게 죄를 청하지 마라.”

언뜻 냉정하게 들리는 말은 그레이를 향한 배려였다. 디아나가 아닌 누구도 그레이의 죄를 물을 수 없게 하겠다는 배려였다. 그레이는 목이 메어 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또한, 카를 공작의 권한으로 발루아 기사단에 그대의 복권을 요구하겠다.”

“그건…….”

“부탁하는 게 아니다. 이제부터 내 말은 곧 명령이다.”

디아나는 그레이를 다룰 방법을 깨달았다. 그의 깊은 죄책감과 충성심은 자신이 지켜 온 영애 디아나의 부탁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카를의 공작으로서 명령하는 것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오늘부로 집사장은 해고다.”

그레이를 오랜 죄의 사슬에서 풀어 줄 때가 됐다. 부모님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성정이 들었던 대로라면 아마 기뻐해 줄 것이다.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 발루아 기사단에 복귀해라. 그게 내가 내 주는 첫 번째 임무다.”

그레이가 아버지의 최측근이자 발루아 기사단을 이끄는 존재였다는 것은 지금 발루아 기사단에도 영향이 클 것이다.

“그리고 발루아 기사단의 충성을 받아 내서 내게 바쳐라.”

군주의 위엄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레이는 지금 누구보다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주는 속죄의 길이다.”

이제 그레이가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아직도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내 명령을 따르겠는가.”

그레이가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 카를의 공작이었다.

“어찌, 어찌 제가…… 감히 거부하겠습니까.”

그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죄의 무게는 덜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생에 속죄의 길을 주고 싶었다. 아마 선친도 그걸 원하실 거라고 믿었다.

지금 디아나에겐 후회 속에서 죽은 고목처럼 살아가는 집사장보다는 발루아 기사단의 충성을 바칠 기사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발루아 기사단의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증명해라.”

“예…… 공작님.”

잔혹한 명령이었다. 그리고 가장 다정한 위로였다. 디아나 카를이 진정한 카를의 공작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

***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그레이가 저택을 떠났다. 샬롯은 집사실에 그의 집사복이 정갈히 개켜져 있었다는 것을 디아나에게 보고했다.

그레이는 발루아 기사단이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디아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창밖의 먼 길을 내다봤다.

“그레이 집사장…… 아니, 그레이 경은 잘 해낼 거예요.”

샬롯이 어색한 호칭을 붙였다. 사고 후에 저택으로 돌아왔던 그레이의 얼굴에 담긴 처참한 고통을 지우기 위해서 오랫동안 입에 담지 않았던 호칭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고작 다섯 살이 된 디아나를 돌봤다. 긴 세월, 나름의 동지였던 셈이다.

“모든 일에는 과거와 이유가 있는 거구나.”

공작저에서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최소한의 인력만 남겨 둔 건 첩자를 감별하기 위해서였다. 카를의 가신들은 더욱 보수적인 태도로 내부 통치에 들어갔고, 발루아 기사단은 암살을 시도했던 약탈 부족을 섬멸해서 피의 복수를 마쳤다.

그러나 후임인 아론이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았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해서 단순한 마차 사고로 끝낸 것이다. 전부 지난밤 샬롯이 해 준 이야기였다.

“어쩌면 숙부님도 최선이었던 거야.”

“그럴……까요?”

“명분이 뭐든, 카를은 군사를 일으켰어.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했지. 과연 제국에서 그 사실을 반길 사람이 있었을까?”

카를의 일이었으니 간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시 대상이 됐을 것은 분명했다. 언제든 자체적으로 무력을 쓸 수 있는 곳으로 간주당하면 황후와 외척 세력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숙부님이 무심한 사람이라는 건 알아. 그래서 소극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도.”

디아나의 아버지를 닮았다면 당장 카를로 돌아가서 더 본격적인 행보를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그 소극적인 방법 덕분에 난 수도에서 평범한 영애로 자랄 수 있었어.”

그게 아론의 의도였든 아니든 결론은 그랬다. 그게 지나친 나머지 황태자비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미래에 어떤 불행이 있는지는 아론도 몰랐기 때문에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샬롯에게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겠지?”

샬롯은 디아나의 시선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잠이 안 오는 밤이 있다면 그때 들려드릴게요. 뭐, 그리 대단한 건 없지만요.”

“응, 언젠가 꼭 듣고 싶어.”

디아나는 과거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현재를 이룬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조각들이 운명의 흐름을 따라 세차게 흐르며 미래를 만들어 낸다. 디아나는 지금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너무 깊은 후회는 아무런 미래도 가져올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아.”

디아나도 그동안 숱한 후회를 했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루카스의 관심을 끌지 않았더라면, 트리샤를 더 확실하게 단념시켰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들에 대해서.

“현재를 살아야지.”

지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성유물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 깃든 것들은 유일하게 현재에만 존재했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진짜 인생은 단 한 번이니까…….”

디아나가 찾은 사람들과 이야기, 그리고 애정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 없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인생 그 자체는 하나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샬롯이 다가와 디아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길었다. 두렵고 알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꼿꼿이 서서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바라보는 디아나가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떻게든 길은 이어질 것이다. 디아나가 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 희망이 있었다.

***

이른 새벽에 깬 루카스는 두통을 호소하며 온갖 짜증을 부려서 황태자전을 발칵 뒤집었다.

루카스는 가끔 신경성 두통에 시달리곤 했는데 딱히 약이 듣지도 않을뿐더러 주위 사람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늘도 그 두통이 도진 것이다.

“전하, 우선 약을…….”

“듣지도 않는 약을 자꾸 먹으라는 거냐!”

시원하게 전의를 걷어찬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가끔 발작하는 두통은 루카스를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황후도 루카스가 두통을 앓을 때만큼은 거리를 둘 정도였다.

“뜨거운 물수건을 대령했습니다.”

황태자전의 시녀장인 제인이 눈치껏 행동했지만, 루카스는 그마저도 손으로 거칠게 쳐 냈다.

“안 그래도 울화통이 터지는데 나더러 쪄 죽으라는 거냐?”

저번엔 뜨거운 물수건이 있어서 그나마 살 것 같다더니, 그 변덕은 오랜 시녀장이라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전하…… 트리샤를 불렀으니 곧 올 겁니다.”

제인이 속삭이듯 덧붙이자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느 달밤, 개들이 미칠 듯한 소동을 일으켜서 잠을 못 이루던 루카스까지 황실 사냥터로 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그곳엔 얼마 전 후작가에서 패물을 훔치고 도망쳤다던 트리샤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전……하, 살려 주세요…….’

그 순간 루카스는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안간힘을 다해 온 것인지 트리샤의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었고, 그런 몰골로도 루카스에게 손을 뻗으며 간절히 외치던 것이 너무 가엾게 느껴졌다. 루카스의 인생 최초로 진정한 동정심을 느낀 순간이었다.

‘절…… 구해 줄 분은…… 루카스 전하……뿐이에요.’

밤바람이 가녀린 트리샤의 목소리를 귓가에 전했다. 물론, 트리샤가 바람에 실어 보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형태가 없는 매혹이 루카스에게 물씬 풍겼다.

아무도 그것이 매혹인 줄 몰랐다. 루카스 본인조차도. 하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그 후로 루카스는 트리샤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게 명령했고, 트리샤의 말만 듣고서 샤리즈 후작과 황태자비를 벌했다.

“아직 몸도 회복 안 됐을 텐데.”

쯧, 루카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궁인은 속으로 경악을 삼켰다. 저리 말하면서도 내심 풀어진 루카스의 표정이 더 놀라웠다.

짧은 시간 동안 트리샤 블랑이란 존재는 황태자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루카스는 한창 바늘처럼 날카로운 신경으로 짜증을 부리다가도 트리샤가 오면 거짓말처럼 온화해졌다.

그리 미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하고 어찌 보면 미천한 출신의 트리샤가 무슨 매력을 가졌는지 모두 의아했지만, 루카스가 좋다니 할 말은 없었다.

“전하, 트리샤예요!”

황태자 전의 예법도 생략한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트리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황실 사냥터 근처에서 발견됐을 때의 몰골은 어디로 갔는지 붉은 머리카락은 풍성했고 피부엔 윤기가 흘렀다. 황태자전의 좋은 것은 모두 갖다 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 두통이 도지셨다면서요.”

“별것도 아닌데 저것들이 널 깨웠군.”

“전하의 두통이 어떻게 별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큰일이 어디 있다고요.”

트리샤가 눈썹을 기울이며 루카스에게 바싹 다가섰다. 루카스는 트리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한결 통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카스는 그게 트리샤만이 가진 편안한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오해였다.

“어디, 열이 있나 볼게요.”

트리샤가 대담하게 루카스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짜증스러운 두통이 물러나는 시원한 손에 루카스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상하게 네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두통도 나아지는 건가.”

루카스의 말에 트리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약간 수줍은 듯, 그러나 활달함을 숨기지 않는 트리샤 특유의 편안하고 명랑한 미소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 알 것 같은데요?”

트리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때쯤 루카스는 두통 따위는 이미 잊은 채였다.

“저는 전하의 개들과 친구잖아요. 실은, 얼마 전에 전하 모르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전하도 제가 편해지신 거죠. 루키, 카탄, 스톤처럼요.”

재기 넘치는 말이 싫지 않았는지 루카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너도 내 친구인 셈이군.”

“네? 제가 감히…… 전하와는 신분이 너무도 다른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트리샤의 눈은 영롱하게 빛났다.

“괜찮다. 친구란 그런 거겠지.”

트리샤는 착실하게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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