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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1화 (141/184)

141화

생각지 못했던 전개였지만, 디아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그레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그저 제가 죄인이 되어 기사단에서 추방당한 몸이라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작은 나야. 그 죄라는 것을 내가 판단하고 싶어.”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나는 그런 그레이를 눈짓으로 채근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님도 아니, 공작님이기 때문에 용서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것도 내가 판단하겠어.”

디아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디아나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일이다.

하긴, 한 번은 꼭 해야 할 이야기였다. 이미 죄인으로 살아오면서도 고백을 망설이다니, 그레이는 그런 자신의 못난 마음에 자괴감을 느꼈다.

“선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엔 제 탓이 있습니다.”

“……뭐?”

분명 디아나의 선친은 마차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문자 그대로 사고였다고.

“부모님은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사고였죠. 당시 북부의 카를 영토 근처엔 작은 부족 단위의 유랑민이 있었습니다. 선친께서는 그들이 약탈을 일삼는 것을 아시고 강력한 대응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게 원한을 샀던 겁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토선 근처의 약탈자를 벌하는 것과 마차 사고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전 그 무렵 선친과 함께 수도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레이는 목에 돌이 걸린 것처럼 힘겹게 말을 뱉었다.

“아직도 그날을 후회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제가 기사단 외의 세상을 몰랐기에, 너무 쉽게 유혹에 넘어간 겁니다. 그녀는…… 제 아이를 가졌다며 고백했고, 저는 바보같이 기쁜 마음으로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레이에게도 청춘이 있었다. 디아나의 아버지가 결혼하고 디아나를 낳은 후였으니 짝을 지을 나이였다. 그동안 내심 그레이가 혼자의 몸이라는 게 의아했는데 그 또한 사연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녀를 이미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인지, 경계심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제게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공작저의 사정이나, 그 사고가 일어나던 날의 일정까지…….”

돌이킬 수 없는 만큼, 후회가 짙었다. 그레이는 그 모든 일을 무수히 후회했다. 한때는 제법 활달했던 그가 과묵해진 것도 늘 후회의 쓴맛을 되새겼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녀에게 공작님을 호위하기 위해 며칠 수도를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주 좁은 산길에서 급습을 받았고, 마차는 누군가 손봐 둔 것인지 바퀴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레이에게 그날의 악몽은 어제처럼 선명했다.

“호위병이 전부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좁은 길목에서 급습은…… 마차로 이동하던 일행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모두 안전하다고 여긴 길이어서 더욱.”

참다못한 그레이가 바닥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을 설명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전 적을 베느라 후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선친 내외를 해칠 목적이었기에 두 무리로 나누어 한쪽은 공격을 한쪽은 암살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디아나는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좁은 길에 갇혀 버린 마차, 호위병은 채 들어오지도 못하고 계획된 습격과 암살이 노리는 치열한 순간을 상상하자 더 그랬다.

“간신히 적을 섬멸했을 땐…… 이미 선친 내외가 크게 다치신 후였습니다. 독화살로 추정되는…….”

그레이가 괴로운 듯이 말을 흐렸다.

“말은 폭주했고, 전투 때문에 마차가 길을 벗어난 때였습니다. 선친께서는…… 제가 달려가자 무엇보다 마님을 구하라고, 무엇이든 마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미 전신이 중독되신…… 후였습니다.”

디아나의 아버지인 아서 카를은 그레이에게 있어서 주군이자 어린 시절부터 칼을 맞대고 자란 친우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의지했고, 평생 그를 섬기는 것을 운명으로 알았다.

“전, 망설였습니다. 주군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훈련받았기 때문이었죠.”

막상 급박한 상황이 되자 훈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레이는 그때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제 꼬락서니는 참으로 한심했을 겁니다. 선친께서는 마지막 목숨을 써 가며 제게 명하셨는데도……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의 마차와 죽어 가는 주군 내외…… 저는 도저히.”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직도 그랬다. 그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미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을.

“그래서 어떻게 됐지?”

“정신을 차리고 마님을 살폈을 땐, 이미 모두 늦어 버린 후였습니다. 고통이 심하셨던지 마님께선…… 항상 지니고 다니시던 단도로 자신을 찌르라고 명령하셨지만, 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디아나가 잠시 숨을 멈췄다.

“그 단도라는 게, 혹시.”

디아나는 목에 걸린 단도를 꺼내서 보였다. 그레이는 괴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마님의 꿈을 꾸시고 그 단도를 지니기 시작하셨단 말을 듣고 저는…… 역시나 제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느꼈습니다. 마님께선 저의 불충을 잊지 않고 공작님을 모시라는 뜻으로 꿈에 나타나신 거라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고였다. 디아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단도는 디아나를 회귀시킨 성유물이었고, 애초에 어머니의 티어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이라고 했다.

디아나만이 이 단도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마 어머니는 그 순간에 죽음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찌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괴로운 역할을 그레이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끝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셨던 건지 마님께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아니다. 아마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디아나를 떠올렸을 거다. 근거는 없었지만, 디아나는 막연히 확신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 단도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런 말을 했다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때, 마차가 버티지 못하고 크게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떠올리고 만 것이다. 성유물이 일으키는 회귀는 온전하지 않음을, 지금의 인생 일부를 필연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것과 회귀 이후에 어린 딸의 존재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까지.

성유물이 일으키는 회귀는 완전하지 않았으며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사용했던 디아나조차 그랬으니 어머니는 더 두려웠을 거다. 지금, 소중한 존재를 가진 디아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려움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던 건지……. 마님은 마지막으로 절 밀치셨습니다. 직후, 마차가 추락……했습니다.”

그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카를 공작 내외 마차 사고의 실체였다. 카를가에서 은폐한 사실이기도 했다. 영지의 일은 수도의 사교계에서 떠들게 내버려 둘 일이 아니었다.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한 분도 구하지 못했고, 마차조차 붙들지 못했습니다. 제가 무엇 하나라도 했다면…… 적어도 시신이라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난 일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소용이 없었다. 그레이는 그걸 알면서도 매 순간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 자신이 정신만 제대로 차렸더라면 무엇이라도 하나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에게 주어진 가장 무거운 벌은 후회였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사건의 조사를 하자 자취를 감춘 제 정혼녀가 한 패였다는 것이 밝혀졌고 저는 기사단의 재판에 나가서 무력했던 제 모습을 고백했습니다.”

그레이가 천천히 거구를 일으켜 서더니 디아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공작님의 선친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디아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비록 디아나에겐 존재감이 없는 부모님이었지만, 그레이에겐 또 다를 것이다.

“그래. 괴로운 이야기를 해 줬어.”

그레이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항상 그의 얼굴에 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도 밑도 끝도 없는 공작가에 대한 충성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건 그레이의 천성이 너무도 정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평생 속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던 남자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이해했어.”

디아나가 용서하더라도 그레이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레이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 거짓말을 했지?”

디아나가 조금 슬프게 읊조렸다.

“나도 기사도를 알아. 그리고 그레이가 내게 해 준 이야기 중 어느 것도 기사도의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밀고의 죄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직접 행했을 때였다. 그레이는 처음부터 표적이 되어 이용당한 죄밖에 없었다. 게다가 첩자는 분명 하나가 아니었을 거다.

고지식한 그레이의 성정에 흘린 정보라고 해야 고작 공작저의 사소한 일이나 공작 내외의 외출 일정이었다. 나머지 첩자들이 충분히 캐고도 남은 정보일 거다. 그 정도 일을 계획했으니 오죽하겠는가.

“저는…….”

“날 속이는 것이야말로 주군을 기만하는 죄야. 그렇지 않아?”

그레이는 부정하지 못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일어서 그레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레이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기사단에서 추방한 건, 본인이었겠지?”

당시 그레이는 기사단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의 성정을 잘 아는 디아나에겐 쉬운 추측이었다.

“영원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자기 자신……. 그건 이미 너무도 괴로운 형벌이 아닐까.”

디아나는 후회하는 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앞을 보지 못하고 악몽 속에서 헤매는 나날들을.

“그래. 내게 그레이를 용서할 힘은 없어.”

디아나가 차분히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레이는 그 순간 오랜 세월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시는 것도 몰랐다. 디아나의 안에 선친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명령할 수는 있어. 카를의 공작이자, 선친의 후계자로서.”

“공작님, 저는.”

“일어나라, 그레이. 똑바로 서서 날 봐. 공작의 명령이다.”

디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서늘한 푸른 눈동자와 굳어진 입매는 선친과 똑같았다. 그레이는 그 모습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일어섰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그레이가 지키지 못했던 공작 내외가 그대로 디아나 안에 살아 있었다는 것을.

“카를의…… 공작님을 뵙습니다.”

툭, 그레이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뺨을 적셨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후회 속에서 지켜 내지 못했던 그들을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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