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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0화 (140/184)

140화

에드윈은 복잡한 심경으로 공작저를 나섰다. 디아나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을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디아나는 디아나 나름대로 내일 발루아 기사단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연인은 짧은 입맞춤을 나누고 아쉽게 각자의 걸음을 옮겼다.

“샬롯, 아직도 보고 있어?”

“네. 볼수록 이상해서요.”

샬롯의 손에는 셀린이 작성한 일지가 들려 있었다.

“참 꼼꼼히도 작성했네요.”

니콜라의 등에 난 점의 모양까지 기록했을 정도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열이 난 건 트리샤의 행보와 일치하지?”

“네, 공작님 말씀대로…… 확실히 연관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등의 자국이라고 해야 할지, 점이라고 해야 할지, 무척 기묘한 모양이네요.”

전체적으로 니콜라의 붉은 점은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점의 군집이었기에 아직 무슨 모양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셀린의 말에 따르면 점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으니 앞으로는 모를 일이었다.

“셀린 같은 사람이 와 줘서 안심이야.”

“그러게요. 도저히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샬롯은 잠깐 니콜라를 본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수도원에 귀의한 몸이라고 해도 셀린이 하는 일은 대단했다.

“별채에 들이는 음식이나 물건에 더 신경을 쓸게요. 셀린 양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응, 그렇게 해 줘. 혹시 셀린이 필요하다고 하면 수도사를 모셔 오는 것도 방법이고.”

“네. 내일 물어볼게요.”

이 소모전이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분명한 건 이제 시작이라는 거고, 셀린의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작님도 쉬셔야죠.”

샬롯이 걱정스레 물었다. 호칭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디아나는 샬롯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했고 제 손으로 길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디아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샬롯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었고 삶의 이유가 되어 줬다. 감히 샬롯의 자식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한다는 것만은 자랑스레 말할 수 있었다.

“몇 가지만 더 확인하고. 가신들에게서 온 서신이 밀렸어.”

“그래도 즉각 서신을 보내서 충성 맹세를 하고 수도로 오겠다니, 다행스럽네요.”

“숙부님께 감사할 일이지.”

디아나가 픽,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가신들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 영지에 관심을 가져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은 아론이 지나치게 카를을 방치한 탓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내가 젊은 여성이라서 썩 내키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카를에선 주군이 없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네, 아론 경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현자 오웬 경도 아론을 설득하러 올라왔다가 오히려 되레 당하고 돌아갔다. 수도에서 권세를 가진 공작이 제 영지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카를 영지가 지닌 힘으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제대로 된 주인은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오웬 경은 제대로 배웅도 못 했네.”

“하지만 굉장히 흡족하게 웃으시던걸요. 공작님의 서신을 몇 번이고 보시면서요.”

“그래?”

의외의 말에 디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오웬은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서 새로운 주인을 확인하러 왔다.

“다행이네. 합격한 모양이야.”

디아나의 역량을 제 눈으로 보겠다는 의지였으리라. 그런 오웬이 디아나의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지금 가신의 충성도 있는 것이다.

현자의 권위는 강력했고, 지금 공작의 뜻을 대신해서 카를을 통치하기에 충분했다. 디아나의 의도가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남은 건, 발루아 기사단인가.”

가신은 대부분 디아나의 통치를 반겼지만, 기사단은 알 수 없었다. 에드윈과 루모스 기사단의 오랜 유대를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정말, 그 방법이 통할까요?”

“그러길 바라야지.”

디아나는 한번 결정한 일을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그레이 집사장을 불러올까요?”

“아니, 내가 집사실로 갈래. 그곳이 적당할 것 같아.”

“차를 준비해 둘게요.”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하나의 담판을 지어야 했다.

***

샬롯이 그레이의 집사실에 정성스러운 티 세트를 차렸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썩 내키지 않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투박하고 정갈한 집사실에 꾸려진 티 세트가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 공간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이 집사실도 그랬다.

“그레이,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예상대로 잠시 후 디아나가 집사실에 나타났다. 그레이는 내심 짐작했던 것처럼 미리 벽난로를 따뜻하게 데워 뒀다. 그런데도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평소에도 말수가 없고 무뚝뚝한 사람인데, 표정까지 굳어 있으니 아무리 디아나라도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지?”

“예.”

디아나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레이에게도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마지못해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은 입가는 그의 완고한 성정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레이는 디아나의 선친과 비슷한 또래였다. 얼굴에 그의 인생이 묻어날 나이였다.

“그레이, 나는.”

“불가합니다.”

디아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레이가 단칼에 잘랐다.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공작님을 섬기겠다는 저의 맹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의 뜻은 분명했다.

“저는 죽는 날까지 카를 공작저의 집사장으로서 평생 공작님을 섬길 겁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역할을 바란다면? 내게 그 역할이 지금 너무도 필요하다면.”

그레이는 이미 디아나의 의중을 다 알고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지만, 지금으로선 디아나에게 유일한 카드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레이는 먼저 나서지 않았다. 묵묵히 충직을 다하는 그가 필요를 알면서 자처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고한 거절을 뜻했다. 디아나는 그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그레이와 단둘의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어떻게든, 그레이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원하지 않는 역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그레이밖에 없어.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너무도 중요한 역할이야.”

그레이는 다시 침묵했다.

“알아. 누구보다 공작가에 충성을 다해 온 그레이가 거절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묵묵히 찻잔을 보는 그레이에게서 삶의 피로가 묻어났다. 에드윈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드물게 기골이 장대한 그레이라도 세월과 고된 인생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왕년의 무장은 이제 쉴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강요나 명령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디아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도 난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는 걸 배웠거든.”

원작의 흐름을 바꾸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항상 루카스의 아내가 되어야 했고 트리샤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은 깨졌다. 그렇다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조그만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 기회를 줘.”

디아나의 절실한 눈빛이 그레이에게 닿았다. 아무리 무뚝뚝한 그라도 어떤 의미에선 샬롯과 같은 마음으로 디아나의 성장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공작이나 주군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서.”

겉으로는 목석처럼 무심해도 그의 마음엔 충성과 의무만이 아닌 애정도 존재했다. 그렇게 피가 섞이지 않은 세 사람은 조금 이상한 가족의 형태를 이루며 오늘까지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레이의 이유를 들려줘. 그리고 내가 이해하게 해 줘.”

디아나는 한 사람으로서 그레이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주군으로서 명령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떤 일은, 특히 사람과 사람의 일은 권세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이유를 듣고 내가 설득에 실패한다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그레이는 잠자코 찻잔의 표면을 응시했다. 워낙 말수가 적은 그는 긴 이야기를 꺼내는 데 서툴렀다. 샬롯이 항상 디아나 가까이에서 사소한 일을 살폈다면, 그레이는 거목처럼 그 그늘을 지켜 왔다.

“자! 어쨌든 사연을 전부 듣기 전에는 여기서 한 걸음도 안 비킬 거야.”

디아나가 보란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 대담하고도 순수한 디아나의 행동만큼은 그레이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영애일 무렵부터 비범한 행보를 보였던 디아나다. 정말로 꿈쩍도 하지 않을 작정일 거다. 결국 그레이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 무거운 입을 열어야 했다.

“전 공작님의 선친과 유년기를 함께 보냈습니다. ……예, 발루아 기사단에서요.”

디아나는 그동안 그레이의 존재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선친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레이는 공작저의 집사장이었다. 스치듯 그가 기사였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그리 대수로이 여기진 않았다.

그게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에드윈의 의견을 듣기 전엔 그랬다. 에윈은 그레이의 과거 직책이 지금 루모스 기사단의 딜런 경 정도 되었을 거라고 귀띔을 했다. 그런 이가 집사장에 머무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였다.

“저는 선친의 측근이었고, 선친께서 수도로 오시면서 동행했습니다. 그때까진 기사단의 신분으로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공작님이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레이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려놓았다.

“우선, 한 가지 바로잡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공작님의 청을 거절하는 건 저의 과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제가 기사의 신분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번 기사도를 저버린 자는 두 번 다시 기사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기사도란 그런 것이니까요.”

드물게 그레이가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기사가 아니었지만, 이 세계의 기사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았다.

유서 깊은 기사단일수록 그 소속감이 컸다. 한번 일원이 되는 건 몹시 어려웠고, 죽을 때까지 그 기사단의 소속으로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즉, 그레이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기사단을 떠났을 것이다.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고서는 평생 기사단을 벗어나지 않는 게 기사도였다.

“공작님께서 모르시는 것 같군요. 전, 제 발로 기사단을 나온 게 아닙니다.”

확실히 그건 디아나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전 죄인이 되어 기사단에서 추방당한 몸입니다. 그리고 속죄를 위해 공작저의 집사장으로 평생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깜박, 디아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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